대별왕과 소별왕의 수수께끼 내기
민족문화대학/우리나라 신화 2017. 7. 5. 17:51(25) 대별왕과 소별왕의 수수께끼 내기
2005-05-12
신화속 화두, 풀 것인가 속일 것인가
제주도 창조신화 <천지왕본풀이>에는 천지왕의 아들 둘이 등장한다. 대별왕·소별왕 형제, 천지왕과 지상의 총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신들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창조된 세계를 누가 다스릴 것인가를 두고 다툰다. 이승과 저승 가운데 서로 이승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본토 창조신화에 보이는 미륵과 석가의 싸움(7회 참조)과 흡사하다. 그러나 제주도 신화에는 본토 신화에 없는 부분이 있다.
<천지왕본풀이>에도 미륵과 석가처럼 대별왕과 소별왕의 꽃 피우기 시합이 있지만 그 전에 둘은 먼저 수수께끼 내기를 한다. 제주 말로 ‘예숙제낀다.’
형인 대별왕이 묻는다. “어떤 나무는 주야 평생 이파리가 안 지고, 어떤 나무는 이파리가 지느냐?” “속이 여문 나무는 주야 평생 이파리가 안 지고, 속이 빈 나무는 주야 평생 이파리가 집니다.” 소별왕의 대답에 형은 틀렸다고 대답한다. “설운 동생아, 모르는 말 하지 마라. 청대와 갈대는 마디마디가 비어도 이파리가 안 진다.” 같은 방식의 수수께끼 문답이 한 번 더 되풀이된다.
대별왕=어떤 일로 동산의 풀은 자라지 못하여 짧고, 구렁의 풀은 잘 자라 길어지느냐?
소별왕=이삼사월 봄에 비가 오면서 동산의 흙이 구렁으로 가니 동산의 풀은 짧고 구렁의 풀은 키가 큽니다.
대별왕=설운 동생아, 모르는 말 하지 마라. 그러면 왜 사람의 머리는 길고 발등의 털은 짧으냐?
허실을 꿰뚫은 대별왕
경험적 사고에 머문 소별왕
창조세계 건 한판의 대결
지혜 아닌 속임수로 결판
대별왕은 수수께끼를 내는 신이고 소별왕은 그것을 풀어야 하는 신이다. 그런데 늘 수수께끼 시합에서 우위에 있는 자는 출제자다. 수수께끼는 상대편을 잡도록 계산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계산된 질문의 허를 찔러 수수께끼를 풀어야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지만 소별왕은 대별왕의 허를 찌르지 못한다.
소별왕은 경험적이고 일상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나무는 속이 꽉 차야 이파리가 튼실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봄비에 언덕의 흙이 씻겨 내려가 구렁에 쌓이니 기름진 구렁의 풀이 무성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 대별왕의 수수께끼는 당연한 이치의 빈 곳을 공략한다. 단단하게 속이 찬 실(實)한 나무가 잎이 튼튼하고 열매(實)도 먹음직스러운 것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다시 보면 자연에는 그런 이치를 거스르는 자연물도 있다는 것이다. 대별왕은 속이 텅 빈 대나무를 일례로 삼는다.
▲ 신화는 그 자체가 수수께끼의 일부다. 우리 땅 곳곳에는 그런 수수께끼들이 깃들어 있다. ‘구멍신화’의 원형이 담긴 제주도의 삼성혈.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천지왕본풀이>의 첫 번째 수수께끼 문답이 제기하는 허실(虛實) 문제는 간단치 않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촉발시키지만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화적 사유를 철학의 언어로 바꾸어 놓은 <노자>의 잠언들이다. “계곡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검은 암컷이라고 한다. 검은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히 존재하니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이 죽지 않는 계곡의 신(谷神)을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텅 빔’(虛)으로 해석한다. 허야말로 여성적 원리이고 모든 것의 근원이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대별왕의 수수께끼 풀이는 노자의 잠언과 다를 바 없다. 소별왕은 자연의 실한 상태만을 보았지만 대별왕은 자연의 허한 지점까지 꿰뚫어 본 신이다. 허실의 두 이치를 통관해야 천지를 다스리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수수께끼 풀이의 참뜻이다.
두 번째 수수께끼 역시 연장선에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두 번째 수수께끼에는 갑작스런 사고의 비약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와 달리 대별왕이 내놓은 답은 엉뚱하게도 대지의 풀에서 사람의 터럭으로 변환된다. 대별왕은 대지의 풀과 사람의 터럭을 동일시함으로써 경험적 사고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동일시를 우리는 은유라고 부른다. ‘머리를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이라고 묻고 ‘연기’라고 대답하는 수수께끼 문답 속에 작동하는 언어의 놀이가 바로 은유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수수께끼 언어의 본질인 은유를 적절히 보여 준다.
▲ ‘곰신화’가 머문 금강의 연미산,
그런데 이 은유를 유심히 들여다보노라면 18세기 조선의 철학적 화두였던 인물성론(人物性論)이 슬며시 떠오른다. 인간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하든 다르다고 하든 거기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어 이른바 호락(湖洛)논쟁으로 불이 붙었지만 <천지왕본풀이>의 대별왕에게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애초에 다를 수가 없다. 대지의 풀과 사람의 터럭이 같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물과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한 두 번째 수수께끼 풀이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나는 너다’, 혹은 ‘나는 풀이다’라는 깨달음, 곧 논리적 추론 너머에 있는 직관 안에서 솟아난다. <천지왕본풀이>의 두 번째 수수께끼에는 이런 지혜가 있어야 창조된 세계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신화의 논리가 숨어 있다.
창조신화의 이런 수수께끼 형식은 영웅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아마도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에 있는 돌 위 소나무 아래 내가 감춰둔 물건을 찾으라”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주몽이 부여를 떠나면서 미래의 아들에게 남긴 수수께끼다. 후레자식이라는 모욕을 당하고 돌아와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들은 유리는 산골짜기를 찾아 헤맨다. 수수께끼임을 깨닫지 못하고 소별왕처럼 지시적인 뜻만을 좇아 헛수고를 한 것이다. 유리는 고생 끝에 돌아와 자기 집 마루 기둥에서,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편>에 따르면, ‘슬픈 소리’를 듣는다. 그때서야 깨달은 유리는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는 일곱 모가 난 돌을 일컫는 것이고, 돌 위의 소나무란 기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답게 푼 것이다.
칼의 슬픈 소리에 이끌려
영웅이 된 유리처럼
삼라만상에 깃든 신화 세계
지혜를 찾아 떠나봅시다
그런데 유리의 수수께끼 풀이 과정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슬픈 소리’다. 이 소리가 없었다면 유리는 딜레마를 헤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고, 끝내 아버지를 만나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유리는 스스로 ‘지혜로운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소리의 도움, 다시 말해 주인을 만나지 못해 슬픈 소리를 내고 있는 부러진 칼의 도움으로 수수께끼를 푼 영웅이 된 셈이다.
▲ ‘창세신화’의 흔적이 녹아든 경북 안동의 제비원 석불.
그러면 유리를 영웅으로 만든 부러진 칼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유리는 이 칼을 들고 고구려로 가 주몽의 부러진 칼과 이를 맞춘다. 칼은 부자관계를 확인하는 신물(信物)이면서 동시에 신성한 왕권의 계승을 상징하는 신물(神物)인 것이다. 한데 부러진 칼들은 합체가 되면서 피를 흘린다. 이는 <제석본풀이>에서 아버지를 찾아간 삼형제와 아버지인 중이 손가락을 베어 은바릿대에서 피가 섞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관계를 확인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친자를 밝히는 방법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합체된 칼에서 흐르는 피는 왕권의 획득과 유지에 수반하는 폭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칼의 소리’를 통해 수수께끼를 풂으로써 증험된 유리의 지혜는 창조신화의 대별왕의 지혜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여기서 되돌아봐야 할 존재가 수수께끼 내기에서 진 소별왕이다. 그는 수수께끼 내기에서 지자 마지막으로 잠자면서 꽃 피우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한다. 본토 <창세가>에 등장하는 석가의 제안과 같다. 물론 소별왕은 이 내기에서도 꽃을 피우지 못해 패배자가 되지만 형을 속여 내기에서 이긴다. 소별왕은 부당한 방법으로 지혜로운 자를 저승으로 쫓아내고 이승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낙토(樂土)가 아니라 고토(苦土)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 창조신화의 세계인식이다. 이 고토에서 유리는 칼이 부르는 슬픈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수수께끼를 푼다. 칼의 유인을 당하고서야 수수께끼를 푼 유리, 수수께끼 내기에서 지자 속임수로 꽃을 피운 소별왕, 칼을 든 영웅과 사기꾼 창조신은 둘이 아니다.
지금까지 신화 안에 제시된 수수께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것만이 수수께끼는 아니다. 신화 자체가 이미 수수께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누가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것인가?”라는 <리그베다>의 물음처럼, “현명한 거인이여, 땅과 저 위의 하늘은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에다>의 신 오딘의 목숨을 건 질문처럼, 수수께끼 식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답변은 논리적 추론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예컨대 창조신이 하늘을 밀어 올려 천지를 만들고, 죽은 후에는 몸의 각 부분이 만물로 변형되었다는 식의 시적 이야기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답변 자체가 또 다른 수수께끼가 된다. 그렇다. 신화는 우리에게 한판 수수께끼 내기를 하자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6개월여 동안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라는 이름을 내걸고 한판 수수께기 놀이를 벌였던 셈이다. 소별왕처럼 속이지 않고 이겼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지혜를 찾아 신화의 바다 속으로 긴 항해를 떠나야 하리라.<끝>
조현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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