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시공연속체라는 것의 의미

개벽과 창조/우주변화의 원리 2011. 11. 19. 00:22

 

어떤 분이 이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제가 생각하는데로 한번 써봅니다.

요즘 우주변화원리에서 土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열릴려고 해서 제가 쓰는게 얼마나 도움이 될른지는 모르지만 한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물질과 공간은 일체

아시다시피 물질과 공간이 하나라는 사실은 동양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서 서양에서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의해서 들고나와서 시공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습니다.

이 시공에 대한 개념은 시공(時空)이 서로 관통하여 일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정신이나 물질이나 리(理)와 기(氣)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개념과 뜻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 개념은 현대 물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운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아가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라는 개념으로 진화하였지요. 앞엣 것은 특수상대성이론이라고 하고, 몇년 뒤에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다시 제창된 것은 일반상대성이론이라고 합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重力)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핵심 개념은 큰 질량은 공간을 휘게 만들며 심지어는 빛까지도 휜 공간 위에서 휘어서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공간의 밀도가 다르므로 그 안에서 돌아가는 시간도  질량이 큰 곳에서는 천천히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론이 처음에는 너무 생소하므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몇 십년 뒤에 태양 주변을 지나는 먼 별의 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서 휘어지는 현상이 실험적으로 관측되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탄 것은 이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성 이론 이전에 썼던 광양자 효과(1905)에 대한 업적으로 받은 것이 유명합니다.

 

2. 시공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유

아인슈타인 이전에는 뉴턴의 시공에 대한 세계관이 주류였는데,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직관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뉴턴은 물질과는 관계없이 무한과거에서 무한미래로 진행하는 절대시간과 무한히 펼쳐져 있는 절대공간을 상정하고 그 위에서 물질 상호간의 힘을 주고 받으면서 운동을 하는 우주를 생각했고, 그것이 역학적인 물리현상을 설명하는데 대 성공을 거두면서 법칙화되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철학, 생물학, 화학, 열역학, 경제학에서 사회학까지 미치면서 우리의 사고 방식을 절대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시공을 분리해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이 물질환경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 변화원리적인 통찰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직시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우주의 변화의 뿌리까지 다 알아낸 것이 아닌 구체적인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이론들을, 화이트헤드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라고 했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절대좌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절대 속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생겨나고 변화하고 있는데 다분히 수학적으로 절대좌표와 속도, 공간을 상정해서 현상계에 투영시키는 것은 우리의 왜곡된 인식에 기반하는 것일 뿐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사고 구조가 어떤 다른 것과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의 대상이 다른 것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하도록 만든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근거로 우리의 언어구조에서 찾는데, 말은 "주어"와 "서술어"로 크게 구성되지 않습니까? 사실은 나와 세계, 나와 너는 서로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의 나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말은 나는 나, 너는 너 그렇게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 수행의 세계에서 나와 우주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개념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알아차리기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氣로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

우주적으로 펼쳐져 있는 이 힘의 장을 과학에서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동양철학으로 생각을 해본다면 기가 펼쳐져 있는 영역입니다.

과학에서는 공간에서 물질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과거,현재,미래가 나뉘어 움직이는 것을 시간의 변화라고 하는데, 운동을 하든 하지 않던 시간은 절대적으로 흐르는 것이고 절대시간 속에서 존재의 행방은 하나의 질점만을 차지하고 힘의 장에서 맹목적으로 어디론가 운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기의 변화로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변화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을 하겠지요. 그래도 시간과 공간은 기라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따로 분리해서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침투되어 있으며 일체로 움직인다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氣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낍니다.

우리는 氣라는 것을 연구함으로써 물질과 공간,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5. 물질과 공간의 관계

아인슈타인의 말과 같이 "물질은 장(場, 氣)이 고도로 응축한 것"입니다. 공간과 물질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의 구조를 형성하며 상호의존의 일체관계에 있습니다. 또한 물체는 자신이 생겨난 전 우주의 공간(氣=場)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주 공간의 생명 모체인 기(장)의 전격적인 변화운동이 일어나면 우주 공간 자체는 물론 그 안에 존재하는 천지 만물은 모두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천지일월의 대변화운동인 천지개벽이란 천지 일월성신의 시공 궤도의 수정으로 이루어지면, 이 궤도의 대변동은 이들을 이루어놓은 우주 에테르인 장(기)의 질적인 대변화 작용으로 발생하는 신비롭고 심오한 현상입니다.

 

5. 물질이 정신에 주는 존재 의의

이 세상에 출몰하는 화려한 만물의 변화는 물질적인 동시에 또한 정신적이기도 합니다.

빛도 광자(光子)라는 소립자(에너지 덩어리=물질)의 흐름이며, 물체간에 작용하는 힘(인력)도 그래비톤(중력자)라는 소립자의 흐름임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말소리, 노래소리, 사고작용, 꿈 속에서의 의식 작용 등 모든 표현 방식은 물질(소립자)의 흐름과 전달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라는 것은 정신의 표현 수단입니다.

물질을 매개하지 않으면 정신은 활동할 수 없으며 정신이 없는 물질은 죽은 생명일 뿐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한 본체의 양면성입니다. 이를 생명(이기)의 존재 원리로 말한다면 우주 공간에 미만(彌滿)해 있는 기(氣, 천지기운)는 만물을 빚어내는 물질 창조의 모체이며, 이 우주생명(氣) 스스로가 지닌 창조와 변화의 원리(理) 자체가 정신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이기(理氣)는 둘이 아닌 일체이며, 기는 변화원리(理)의 섭리에 따라서 운동하므로 정신의 주체가 됩니다. 그리하여 우주의 창조 이상은 영혼이 물질 속에서 성장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유심론이나 유물론은 모두 반쪼가리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창조원리에 의해 화생된 인간도 정신과 육체의 이원구조로 존재합니다. 리기가 둘이 아닌 것과 같이 정신과 육신도 물심(物心) 일체의 관계로 상호작용합니다.

(출처: 증산도의 진리 p.114 -제4장 천지개벽이란 무엇인가?)

 

6. 시간과 공간은 기의 변화현상의 이중성

성인들은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그 일심의 경계에서 진리를 이야기해왔습니다. 시공이 일체란 말은 나와 우주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개체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객관적 우주인 천지와 주관적 우주인 나를 동시에 이해하는 천지 만물의 순환 법도라고 하는 우주론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 만물의 순환의 법도인 음양오행의 원리, 즉 우주변화의 원리에서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봅시다.

시간은 변화 운동이라는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영원히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본체가 있어야 하는데, 본체라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유는 "영원"을 향해서 변화를 하고 있지만, 기실 그 변화의 바탕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바탕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서의 수 많은 세포들도 그 수명이 며칠에서 몇 주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라는 존재가 수십 년동안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그보다 훨씬 오래 동안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가장 큰 영역이나 가장 작은 영역에서나 시간의 흐름의 도수는 360도 정역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도수가 영역의 대소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이므로 빨리 죽고, 늦게 죽고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중심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늦게 가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모습은 균일하게 체계화되어 있으며, 다차원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투영해서 본다면 전체 시간은 대우주의 시간이 흘러나오는 空의 영역으로 포섭되는 것입니다.

과학에서도 질량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곳에서의 시간은 천천히 갈 뿐이고, 질량의 크기가 어느 한계 이상으로 커지면 시간도 매우 천천히 가고 심지어는 빛의 속도로도 빠져나올 수가 없는 블랙홀이 되고 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그 영역을 관찰 할 수 없게 됩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자신(소우주)의 인식권이 차지하는 영역일 뿐입니다. 관찰되는 세계에 대한 추상이 절대공간이라는 것까지 생각을 하게 하였지만, 소우주의 인식권을 넘어서는 곳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에너지(場, 氣)와 물질이 서로 바뀌면서 생성하는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따로는 공간 속에 기를 분산하기도 하고, 기를 압축하여 물질이 생성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귀납해서 본다면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내는 것은 사고/인식 작용에 의해서 분리 된 것이고 시간과 공간은 자체로 하나인 氣의 변화 현상의 이중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 우주의 정신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태초에 우주는 시공이 하나되어 있는 空자리에서 창조되어 나와서 음양으로 나뉘고, 음양은 분화를 계속하여 천지와 일월을 낳습니다. 천지 이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월의 운동에 의해서 드러나며 만물을 낳고 자라고 거두어 성숙시키는 작용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상계(木,火,金)에 드러난 만물도 본체의 생명력(水,土)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고, 그 생명력이 지속될 때에만 영원히 변화를 계속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 만물은 영원한 변화를 지속하기 위한 내면의 운동이 있는데, 그것을 정신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 정신이라는 것은 생명이 탄생한 그 본체에서부터 근원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은 반드시 자신의 지나간 역사(歷史)를 기억하며,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여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라는 것은 그 정신 운동의 능력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으로 우주를 파악하는 관념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탐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신과 물질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생성하는 것입니다.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의 운동의 내면현상이고, 물질 운동은 정신 운동의 외면현상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우주에는 반드시 정신운동을 주체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뉴턴 역학은 우주가 통일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을 기본 전체로 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무너졌습니다. 상대성 이론은 우주가 통일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주 만유의 변화를 묘사를 하는데 진력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아직 우주가 영원히 팽창할 것인가, 아니면 수축할 것인가.. 하는 두 개념 속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우주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인 틀이 없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밖에 없었지만, 우주 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 우주정신에 의해서 우주가 통일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할 때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하나의 도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의 역철학에서는 어떤 절대시간을 상정하고 그 위에서 시간을 계측하는 시간이라는 개념보다는 변화의 정도나 변화의 마디를 뜻하는 도수(度數)를 시간 위의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8. 결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철학 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자연의 변화운동의 절대성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소우주인 인간이라는 개체가 대 자연을 파악하는 방식이 음적으로는 공간으로 나타나고, 양적으로는 시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우주인 '나'가 자연을 인식하는 원리가 대자연으로 객체화되어 확장되었을 때, 우리 문명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자연 인식의 원리가 생깁니다.

그러나 철학은 대자연과 소자연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소자연의 주관적인 인식원리에 의해 생겨난 우주에 대한 인식이 절대원리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우주론은 일면 옳은 것 같지만, 시대가 변하고 천지 기운이 변하면 틀려지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은 그 변한다는 것(易)을 철학의 종주(宗主)로 삼고, 변화 현상의 원리가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변화의 영원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본체에 대한 탐구를 하여 진리의 골간으로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 안담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