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방 기원설
민족문화대학 2011. 12. 3. 10:36
송호수
1.동방역사의 근원
지금으로부터 약 5만년 이전에서 비롯하여 1만 5천년 전까지 계속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 4빙하기시대의 지층에서 우리들 현존 인류의 직계 조선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1926년에서 1928년 사이에 북경 주구점(北京周口店)에 대하여 프랑스의 와이덴 러이히 교수는 "북경인이 불(火)과 기계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분명하니 인류문화의 기원도 역시 같은 시대에서 구할 수 있다" 고 발표하였다.(日本民族論, PP.17,18)
그런데 또 삼성기(三聖紀)에서는 동녀동남(童女童男) 8백인이 흑수(黑水)와 백산(白山)에 내렸다. 이에 한임(몄?은 감군(監群)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서 불을 일으켜 먹는 법을 처음 가르쳤다.
이를 '한국(桓國)리라 하고 그를 천제한임(天弟桓因)이라고 하며 한 아버지'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와이덴 러이히 교수의 발표나 삼성기의 기록들은 동방인이 먼저 불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에서 그 문화의 선진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와다나베교수(渡邊)는 "有色人種의 대불평" 이라는 제하에서 동방에서는 치우(蚩尤)천왕 시대(약 4,700년 전)에 이미 청동기(靑銅器)를 만들어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인 문화의 선진설이 터무니없음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치우(蚩尤)천왕의 동두철액(銅頭鐵額)과 치우가 동과 철을 채굴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병기(兵器)를 만들어 썼다는 고기(古紀)들이 산견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또 황제(皇帝)와 치우(蚩尤)가 교전(交戰)을 할 적에 치우의 운무(雲霧)전술에 방향감지를 위한 무기로써 지남차를 황제가 만들어 대승하였다는 것인데 지남차(指南車)란 쇠붙이가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치우, 황제시대에 동(銅), 철(鐵)로 만들어진 기기(機器)가 이미 있었음이 확실하다. 최근 중국 인민일보(86.7.25)의 발표에 의하면 5천년 전의 여신묘(女神廟)가 발굴 되었다고 하여 전설적인 신화로만 취급되어 오던 삼황오제(三皇五帝)설이 역사적 사실(史實)로 확인되었다는 것, 더욱이나 여신묘가 발견된 곳은 요령성인데 요령성은 당시 고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5천년 전 요령성 문화는 동이(東夷) 것임이 확인된 이상 문화 동방발상설이 더욱 뚜렷해 지고 있음의 시사이다.
또 1977년 2월 광명일보(중공)가 밝힌 것을 보면 당시 동이족이 살던 절강성(折江省) 부근에서는 7천년 전의 벼농사지를 발굴했다고 발표하였으며 중공의 "사회 과학적 고척추동물연구소"와 서북대학의 "발해연안 발굴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직계 조상이 신석기 시대부터 5천년 이후의 사람들과도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혈연적인 관계가 있었을것"이라고 말하면서 발해 연안이란 "광의로 발해 남쪽의 산동반도, 서쪽의 하북성, 북쪽의 요서, 동쪽의 요동반도를 위시하여 길림성, 한반도 일부를 포함한다고 지칭한다"고 하였다.
1981년 8월 18일자 북한의 중앙통신은 "평양 부근의 남경 유적지에서 4천년 이전의 집터와 곡식, 종자, 생활도구 및 청전의 집터와 곡식, 종자, 생활도구 및 청동기를 발굴했다."고 발표하였다.
중공학자 당란(唐蘭)이 발표한 대문구문명권(大汶口文明圈)의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산동반도의 한강 이남만한 광역에서 5천 7백 85년전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는데 이 중에는 그곳의 통치자였던 소호(少昊·東夷族)라는 이름이 나왔고 또 문자생활의 일면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앙소(仰昭)문화와 용산(龍山)문화라는 중국문화의 지금까지의 상한선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최근에 발굴된 요령성의 3황 5제 유물발굴과 더불어 동이족문화의 상향에 결정타를 가한 셈이다.
소련의 소련과학원 역사 언어 철학 연구소에서 간행한 "고조선"이란 책자에서 저자인 U.M ·푸진은 "일본 사관이 중국계의 기자(箕子)가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고 날조했으며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왕궁유적지, 또 중앙 행정기관의 유적지도 발굴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소련의 여류 민족학자 R.S.H 자리가시노바의 발표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고 신석기 시대인 약1만 년에서 1만 2천 년에는 곧 고도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한의학(韓醫學)의 가장 오래된 동방의학의 기본경서인 황제내경 소문(皇帝內經 素問)에서 "동방 지역은 천지가 비롯된 곳이다(東方之域 天地之 所始生也).…
침술도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해왔다(亦石 역從東方來) 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황제의 물음에 대한 기백이 응답한 내용이다. 여기서도 동방 문화의 시생(始生)성을 읽어 볼 수 있다. 한방 의학의 최고 원전인 황제내경은 천지의 모든 인간 문화가 시발(始發)한 곳을 동방지역이라고 했다.
그런데 1984년에 우리나라를 다년간 바 있는 스웨덴의 고고학자 부부가 우리나라에 와서 남기고 간 중요한 말이 있다.
"나는 한국에 와서 학계의 이상한 현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내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한국까지 6개월 걸려 고고학적인 조사를 해가면서 면밀한 답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모든 문화가 내가 지금 도착한 종착점인 이 동방한국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차츰 옮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국 학자들은 왜 "모든 문화의 흐름의 방향을 서방으로부터 동으로 옮아왔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라고 하여 지금까지의 문화발상 향방에 대한 시정을 역설한 바 있다.
역사는 아무리 바뀌더라도 밝혀지는 유적을 찾음으로 해서 흘러간 흔적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사적의 실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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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방사상의 진원지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있는 현묘지도(玄妙之道)인 배달도(風流道)가 3교의 진리를 원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유고적인 충효사상과 도교적 무위불언(無爲不言)사상과 그리고 불교적 권선징악(勸善懲惡)사상이 모두 본래적으로 우리의 고유사상 속에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3대 사상인 유, 불, 도 사상을 후래적으로 취합 조립한 것이 아니고 원천 발상적으로 그 요소들이 우리의 한민족 사상 속에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3교사상이 홍익사상과는 관계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어진 것인지 아니면 홍익사상에서부터 분화유출(分化流出)된 것인지 그 상호의 상관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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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도교사상의 산출
소위 도교라는 노장(老莊) 사상은 그 시원이 황제(皇帝)로부터 계승되었다고 하여 일명 황노지학(黃老之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중국 고전(古典)인 초사에 보면 황제는 생어백민(生於白民)이라 하였고 또 그는 동이족에 속했다고 하였다.
또 포박자(包朴子)에서는 황제가 백두산에 있는 자부선인(紫府仙人)으로부터 사사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황제가 동이족임이 분명하고 그 사상 역시 동이족 사상인 것이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이 도교적 신선사상은 중국이 우리 동방을 향해 신선불사지국(神仙不死之國)이라고 일컫던 것과 연관지어 지는 것이 되겠다. 그런데 황제가 사사(師事) 받은 스승인 자부 선생은 발귀리(發貴理)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발귀리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발귀리는 신시한웅(神市桓雄)시대의 선인(仙人)이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장자의 사상은 노자로부터 노자의 사상은 황제로부터였다고 하였는데 황제는 동이족이었고 황제가 수학했던 자부선인도 한밝산(白頭山)에 살던 동이족의 신선이었으며 그의 선조되는 발귀리 역시 한웅시대의 신선인 동이족이었으니 도교(道敎)사상의 뿌리는 동방의 동이문화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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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유교사상의 원류
낙동강의 하류는 김해 들녘의 곡창을 비옥하게 하였고 부산 시민의 상수도의 수원이 되었지만 그 발원지는 강원도의 태백산이다.
이처럼 유교가 중국지방에서 공자, 맹자란 대철인에 의해 그 꽃을 피웠지만, 그 발원지는 동방의 동이족에서 시원되었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유교의 연원을 제시한 책은 중용인데 그 서문에서 "중용 한권이 유교의 연원을 밝힌 것이다(中庸一書 聖學之淵源)"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이다. 자사는 말하기를 "중니(공자)는 요와 순의 사상을 계승하여 서술했다(仲尼 祖述堯舜)"고 하였으니 자사의 조부되는 공자가 유교를 지어 낸 것이 아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수수(受授)하여 서술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사상은 요와 순으로부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그리고 주공(周公)으로 이어져 비로소 공자 자신이 계수(繼受)했다는 것이다.
맹자는 요와 순을 성인(聖人)이라고 단정하고 있다(膝文公上·孟子) 공자도 순(舜)을 성인이라고 확언하였다.(舜其大孝也與. 德爲聖仁 : 中庸第十七章)
그런데 사기(史記 第十三)에서는 요가 황제의 직계5세손이 (帝堯起皇帝 至佶子五世 號日唐堯)라고 하였는데 또 고사변(古史辨)에서는 요는 황제의 5세손이고 순은 황제의 8세손이라고 하였다.(古史辨七冊上編 쪽 208, 쪽191; 舜爲黃帝之八世孫)
이렇듯 요와 순의 선대(先代)를 황제라고 단정하여 밝혔으니 황제가 동이족인 이상 그의 직손인 요순이 동이족이 안 될 수 없다.
또 맹자는 말한다.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서 부하 땅으로 옮아 갔다가 명조 땅에서 졸하였는데 그는 동이사람이었다.(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 鳴條 東夷之人也…)
이렇게 유교사상에서 진원지적인 존재로서의 요와 순 그는 동이족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공맹(孔孟)사상의 계맥에서 제2인자적 존재인 맹자의 증언 즉 "순은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부정하겠는가 말이다.
동이족의 요순의 사상 즉 동이사상을 이어 받은 것이 공자의 사상이요 맹자의 사상인 소위 공맹 철학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명확히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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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불교의 동방선재(선재)
지금의 불교가 석사불을 그 교조로 하고 있으나 석가 이전의 부처는 가섭불(迦葉佛)인데 가섭불이 해동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석가의 불교가 중국을 거쳐 대륙을 동으로 횡단하면서 해동 고구려에 도착한 것은 석가가 가신 지 약 9백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도승 아도(阿道)가 국경을 넘어 계림(新羅) 땅으로 최초에 불교를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도가 신라 땅에 오기 그전부터 신라나라에는 전불(前佛)시대의 절터가 일곱군데나 있었다고 하였다.(阿道本碑)
현존 동류한 석가 불교시대에 지은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黃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妙寺), 천왕사(天王寺), 담엄사(曇嚴寺) 등이 그것인데 이 절 등은 모두 전불시대의 절터에다 다시 세운 신라창건사이다.
또 중국에서 불교가 고구려에 최초에 유입된 것이 소수림왕 2년(372)이라고 했는데 이보다도 오히려 369년 전인 한평(한평) 4년 (서기 4년)에 금강산에 금상 52불(金像五十二佛)이 있어 절을 세웠다고 하였다.(東國與地勝覽)
또 "해동 금강산에는 보살들이 살고 있었는데 예로부터 보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곳은 법기보살이 권속 1천 21백명을 거느리고 거기서 늘 불법을 설하고 있다."라고 대방광불화엄경 보살주철품에서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옥룡집(玉龍集) 및 자장전(慈藏傳)에서도 "신라의 월성 동편 용궁남(龍宮南)에 는 가섭불이 설법한 연좌석(宴座石)이 있는데 그곳은 즉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절터였으나 지금의 황룡사로서 일곱절터중에 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또 고려 충숙왕 15년에 인도의 석가로부터 1백 8대 조사인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양주 천보산의 회암사(檜巖寺) 땅을 둘러보고 "이곳은 과거에 7불시절의 큰 절터였다. (此基地 上世七佛時節 大伽藍之址也)라고 회암사 상량 모연문(上樑募緣文)이 밝혀 놓고 있다.
또 태백유사에서는 "불교가 처음 들어와서 절을 세워 대웅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승도(僧徒)들에 예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옛습속을 따른 것이지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本非僧家之言也)라고 하면서 "한웅(桓雄)을 대웅(大雄) 이라고 일컬었다"고 적혀 있다.
이상에는 도교, 유교, 불교 문화의 그 뿌리 향방을 추적해 보았을 때에 모두가 우리 해동의 동방 동국에 연관되어져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동양사상의 발상원천이 동국으로 가설지어짐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Stepping Stones over the River Mole, Box Hill, Dorking by Johan J.Ingles-Le Nobel |
3. 서구 사상의 뿌리
서구 문화의 두 줄기는 신본주의 (神本主義:헤브라이즘)와 인본주의 (人本主義:헬레니즘)로 나누어 살필 수가 있는데, 이 둘은 그 사상사적 근원을 소습 추적해 본다면 약 5500년 이전에 매소포타미아 지방에 있었던 슈메르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서구 문화이 근원을 알려면 수메르 문화의 향방 출처를 탐색해 보자. 그런데 영국 학자 크램머(Kraemer.1897)는 "슈메르 족은 동방에서 왔다"고 했는데 다크라쓰는이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 했다.(슈메르 이스라엘 한국, 문정창). S. 크램머와 C.J 볼 역시 슈메르 족이 사용했던 설형문자가 복희(伏羲:전 3528~3413)가 만든 설형문자와 너무나도 같다는 것이다.(김상일, 한사상 67쪽)
또 일본의 우에노(上野景福)도 "슈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는 태호 복회가 사용한 팔괘부호(八卦符號)등과 흡사하고 소아시아에선 영국까지 이동한 켈트(celt) 고음부(古音符)와 오감(ogam)문자 등과 흡사한 것이다"하였고, C.H. 고든 박사(영국)도 슈메르족들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서기 전에 무슨 고대문자적인 기호를 가지고 온듯 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구 문화의 시원의 원점인 슈메르 문화가 동방에서 옮아 왔다고 하였고 동방에서 옮아올 적에 가지고 온 문 자가 태호복희가 창제한 문자와 같다고 하였다고 슈메르 문화의 뿌리는 복희시대, 복희의 원향(原鄕)과 관계지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말하자면 "실로 한국어와 슈메르 어의 비교는 적어도 ①우리 한국 문화가 인류 시원 문화라는 것과 ②우리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 이전부터 있어 중국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과 ③일본 문화는 한국 문화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 줄 것이다." (김상일 한사상, 69쪽)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H 고든(영)도 "일본어의 모어(母語)는 부여어(夫餘語)였다" 고 지적한 바 있다. 수메르에서 신(神)이 딩그르(dingir)인데 옛적의 상형문자가 ※로 표시되었다.
C.J 볼(Ball)은 ※에서 한자의 임금 "제"자가 만들어졌다고 하였는데 (김상일 한사상, 80쪽) 고사변(古史辨)에서는 임금 "제"자 고자가 ※이렇게 모습되어 있는 (古史辨 7권190권)것으로 보아 슈메르 ※는 동방의 ※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조금 복잡한 동방 표기에서 슈메르의 표기가 간소화된 것임을 엿볼 수가 있다.
세계의 법률학자들의 법률의 원천을 탐색한 논문 중에 보면 전 동경대학의 나까다(中田薰·日本)교수의 "고법전에 근거한 문화동원론고(文化東源論考)"에 본다면 모세의 5경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법조(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까지 함무라비(전, 1704)법과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밀러(Miller)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바빌로니아의 남(南)우루 시(市)에서 함무라비 왕의 고향인 하라안을 거쳐 가나안 땅에 이주했을 때 갖고 왔던 하나의 법전을 상정하며 모세법은 함무라비 법과 같은 원법전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빌로니아의 제 1왕조 제6대왕인 함무라비가 공포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이전에 있었던 슈멜 법의 수정보수법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는데 1914년 미국의 크레이(Clay)나 루츠(Lutz)가 슈메르 법전의 단간(斷簡)을 발견하면서 의심못할 정설이 되었다.
그렇다면 모세의 5부경이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왔고 함무라비 법은 슈메르 법에서 근거하였다고 정돈되어지는 데는 의심할 바 없다. 그렇다면 슈메르 문화가 동방 동이족인 태호복희 문화와의 관계적 유출상을 보아 "서구 문화의 정점인 슈메르 문화의 원향(原鄕)은 동이문화에서"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헤브라이즘(Hebraism:神本主義)과 헬레니즘(Hellenism:人本主義)의 뿌리 즉 서양문화의 집약된 두 개의 줄기는 슈메르 문화라는 뿌리에 귀착이 되면서 그 뿌리인 슈메르 문화의 고향은 동녘으로 설정되어진다.
우리 동방 동이의 한 사상은 신(神)과 인(人)이 분화되지 아니한 신인(神人) 일체주의인 것이다.(안호상, 철학개론, 119쪽) 우리의 한사상(Hanism)에서는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 多卽一)의 포용적 이지 흑백성적(黑白性的)인 대립과 배타성은 아예 존재할수 없다(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의상조사 법성게).
우리의 참전경 총론에 보면, 여화신(女禍神)이 흙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 넣어 7일만에 이루어 마쳤다.(女禍鍊土造成而 往之魂 七日而成焉)는 기록이 있다.
이와 꼭같은 기록이 풍속통의 (風俗通義)나 고사변(古史辨 第六冊)에도 적혀 있다. 이것은 구약의 창세기 2장 1~3절, 7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사략(史略)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4. 21세기의 태평양 시대와 "한" 사상
지중해 시대의 신본주의에서 대서양시대의 인본주의로 옮아온 인간의 가치 추구는 만족할 단계에 들어서지 못하여 새로운 대안을 탐색하야 할 태평양 시대인 21세기의 문턱에 와 있다.
신본주의는 신을 빙자한 인간학대로 허구주의에 빠졌고 인본주의는 초인적인 신성 섭리를 무시한 물량주의를 낳게 되었다. 말하자면 신의 가치를 강조하니까 인간 가치가 떨어지고 인의 가치를 주장하다 보니 신의 좌대가 무너졌다.
우리나라 옛 교과서의 동몽선습에서는 말하기를 "신인(神人)이 있어 태백산 단목하에 내리시거늘 나라사람들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아 요(堯)와 같은 때였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시니 이가 단군(檀君)이니라 (東方에 初無君長하니 與堯로 立하사 國號를 朝鮮이라 하시니 是爲檀君이라)"라고 하였다.
동몽선습에 등장되는 이 신인(神人)은 서구사상에서는 20세기 말인 오늘까지 신(神)과 인(人)이 귀일점을 못 찾아 신본주의와 인본주의가 따로 따로 놀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4천 3백 년전에 이미 신인일체(神人一體)의 신인주의(神人主義)로서 단군이라는 실체의 신인이 나타나서 세상을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대작가, 벽안(碧眼)의 신부(神父) 게오르규는 최근 우리나라를 다녀 가면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 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이야 말로 미래의 세계를 주도할 평화사상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태평양시대의 21세기는 극동에서 세계를 주도할 사상이 나올 것이다" 고 예언하였다.
게오르규는 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러프레스 프랑세스'지를 통해 기고한 글에서(1986.4.18)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단군의 통치이념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법률(法律)이며 가장 완전한 법률이다. … 한국인들은 5대륙의 거대한 공사장에 진출, 단군의 이념 '홍익인간'에 충실하면서 일하고 있다" 라고 설파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동학이 제창한 후천 5만 년 지상천국 전설의 요체는 "천황씨 시대의 뿌리사상으로 되돌아 가야한다."고 절규하였는가 하면 강증산(姜甑山)은 "원시의 군본사상으로 돌이켜야 세계평화의 후천선경(後天仙境)이 건설된다"고 강변하였다.(原始反本 地上天國建設)
동과 서의 거인(巨人)들이 외친 괄목할 이 동방사상은 "홍익인간"이요 홍익인간은 앞에서 실린 바와 같이 서양사상의 산출처인 슈메르 문화가 배출된 원초지요 또 동양의 3대(유, 불, 도)사상의 원산지의 천지개벽 사상이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었다.
어쨌든 인류문화의 동방 기원설과 관련하여 새로운 세기를 맞는 오늘에 인류의 뿌리 문화가 갖는 태평양에 뛰울 자항보도(慈航普渡)의 깃발을 생각해 본다.
(자유발언 1990년 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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