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의 지도자는 어떤 분인가

증산도는 무엇인가 2011. 12. 11. 16:14

 

내가 본 태사부님은 정감어린 분이셨다.

한 종교의 지도자와 신도 사이에 벽은 전혀 존재치 하지 않았다. 
항상 청렴 결백하시고 구수한 어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이다.  

큰 진리와 체험 속에서의 증산도를 만났지만, 
그분의 성품과 인자하심을 보고 난 더욱 증산도가 참 진리인줄 알았고… 
우리 증산도인들의 순수함과 올바름이 나에겐 큰 가르침을 주었다. (임OO님의 글)

 

안운산 종도사님 교지

“도로써 세상을 밭갈고, 의로써 근본에 보답한다.”

 


80 만 젊은 신도를 이끄는 증산도의 최고 지도자.

신문 광고를 찬찬히 보는 사람 이라면 "이것이 개벽이다" 라는 제목의 큼지막한 광고가 기억 날것이다.

  • 이와 함께 후천개벽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 전 인류의 90% 이상이 왜 멸망 당하는가
  • 남북 통일과 지구의 새시대는 이렇게 다가온다

등의 다소 기이한 광고 문안도 함께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대원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지난 84년 첫 출판 이래 20 판이 발행되는 히트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책 광고만 보면 이 책은 여타의 신비주의물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이 젊은층 특히 80 년대 이후 대학가 에서 스테디 셀러로 기록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은 앞으로 펼쳐질 한민족의 장래 인류와 지상구원의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전개해가는 과정에서 신비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는 요소를 배제하고 우주원리의 과학적인 데이타와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어 흥미를 끌고 있다.

따라서 신비주의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면서도 과학적 근거를 빠뜨리지 않고 있는 점이 대학가 에서 이 책이 잘 팔리고 있는 요소가 되고 있는 듯 하다.

해방과 동시 제2 부흥 시대의 기치를 걸고 다시 증산도 포교의 전면에 나선 인물이 지금까지 증산도를 이끌고 있는 안운산 종도사 이다.

1922년 생인 안 종도사는 상당부분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70만 신도를 거느린 지도자 임에도 불구, 그가 아직 유명인사가 아닌 이유는 지금까지 때가 아니다며 공식적으로 외부에 나서는 것을 꺼려왔기 때문이다. 처음 그를 대하면일반적으로 종교지도자 들이 갖고 있는 권위와 위엄보다는 소탈함을 먼저 느낄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첫 인상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수련을 거친 덕분 이라는 것을 그의 말에서 엿볼수 있다.

    "사람 이라면 천하를 들어 삼키고 누가 죽인다 해도 정의 앞에서 눈 깜짝하지 않는 대담한 기백을 갖고 있어야 하되 마음은 언제든지 소심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여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담은 크고자 하되 마음은 작고자 합니다 또 지혜는 둥글고자 하되 행동은 모질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외유내강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왔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의 작은 마음과 둥근 지혜가 그의 첫 인상을 소탈하게 보이게 하는 핵심인 것 같기도 했다.

충남 서산군 대산면 운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부터 좀 특별한 길을 걷는다. 조부는 보천교 신도였다. 아버지는 친구의 권유로 운산에게 신식학교에 보냈지만 그는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둬 버렸다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색다른 체험을 시도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어느 정도 고통스러울까 생각한 그는 마을의 각시바위 옆 작은 동굴에 들어가 조부가 읽던 태을주를 읽으며 5일간 굶었다. 14세 때였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태을주를 계속 외우자 운산은 3일째 되던 날 눈 앞이 훤히 밝아지는 초통을 경험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를 통했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긴 하지만 그는 초통을 하게 되면 신명계를 출입할 수 있는 단계라는 말로 일단 정리했다.

어쨌든 신비한 체험을 한 그는 14일간 혼자 수련한 후 집을 나가 황해도 함경도를 돌아 다니며 농삿일과 석탄채굴장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동안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증산도의 전신인 보천교는 일제치하에서 탄압으로 거의 활동이 중지되어 있었다. 해방 직전인 44년 집으로 돌아와 결혼한 그는 이 무렵부터 증산도 포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대전을 중심으로 충청남북도 경기도를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하던 그는 6.25 후 대휴게기를 선포하고 20년간 운둔 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포교활동을 일시 중단한 것은 상제님이 미리 정하신 은둔도수에 의거한 결정이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요를 펴지않고 잠을 자는 등 고행을 계속 해왔다고 한다. 훤칠한키 넓은이마 형형한 눈빛이 종교지도자로서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 안운산 종도사..

증산도는 건강한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민족종교 정립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가장 유력한 위치에 서있는 것만은 틀림 없는것 같다.

모 여성잡지 中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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