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대한제국

민족문화대학/역사 탐구 2011. 1. 22. 22:19

1. 강화도 조약
1875년 8월 20일 일본군함 운요 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초지진 포대에서 사정거리 600미터의 구식대포로 운요 호를 공격했지만 포탄은 바닷물에 떨어질 뿐이었다. 잠시 후 운요 호는 신식대포로 초지진을 박살냈다.
이듬 해 1월 10일 일본군함 8척이 해군 800명과 함께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우리 측이 운요 호에 선제공격을 했으니 피해보상을 받겠다는 것이다. 피해는 초지진이 입었지만 군사적 우위를 가진 일본은 막무가내였다.
1876년 2월 2일 마침내 우리는 일본에서 작성한 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최초의 근대조약이지만, 불평등 조약이다. 부산 외에 두 곳을 개항하고 일본인의 왕래와 통상을 허가하고, 일본인이 자유로이 조선 해안을 측량하며,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면 인본 관헌이 심판하겠다는 등 어이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대원군이 실권하면서 쇄국파의 힘이 약해지고 개화파가 득세했으므로 근대국가를 꿈꾸며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 국내산업을 보호할 일은 아득해졌다. 일본을 위시한 외세가 다 먹겠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2. 임오군란
일본이 조선 정부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유생들이 외세를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일본은 정부에 압력을 넣어 5군영 체제를 허물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구식군인은 2영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별기군과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이었다. 구식군인에게는 월급도 제때 주지 않아 1년도 넘게 밀렸는데, 어렵게 월급으로 지급된 쌀이 상하거나 모래가 섞였다. 구식군인들은 분개하여 뛰쳐나갔다. 군인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일본공사관을 습격했고, 일부는 경복궁을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청군과 일군이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왔고, 폭동으로 시작된 군인들의 저항은 하루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계획도 포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일본에 50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군의 서울 주둔을 허락해야 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3.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정부는 친청 사대파 세력과 친일 개화파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사대파에는 민비 중심의 민씨 일족이, 개화파에는 고종 중심의 신진 그룹이 포진했다. 개화파는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발전상에 깜짝 놀랐다. 하루빨리 청국을 몰아내고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지원도 약속받았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은 사대파를 암살하고 왕을 볼모로 입헌군주제 형태의 새 정부를 선언했다.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민비와 청국의 밀접하고도 신속한 대응으로 새 정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일본은 자기들이 갑신정변의 배후임에도 12만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한성조약을 강요, 우리 정부의 도장을 받고 말았다. 일본은 또 청국과의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졌음을 확인했다. 청과 일본 자기들끼리 조선 땅에서 철군하자는 약속이고, 만약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주둔한다면 다른 한 나라도 자동적으로 조선에 출병하겠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빌어먹을 조약인 것이다. 조선 땅에 대한 조약인데 우리 정부는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4. 동학혁명
1860년 유학자이던 최제우가 동학을 창교했다. 천주고 즉 서학의 반대 의미로 동학이란 이름을 가진 이 신흥종교는 만민평등 사상을 내걸고 신분사회를 타파하자고 주장했다. 교세는 삼남을 중심으로 급격히 늘었는데, 정부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집단이라고 여기고 탄압하여 1864년 교주 최제우를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의 조직 정비에 힘입어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위정척사운동과 연계해 종교로서 힘을 갖게 되었다. 급기야 최제우, 손병희 등은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탐관오리들의 농민 수탈은 도를 넘어섰다. 동학은 포접제 조직으로 농민세력을 규합하여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1894년 전형적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불필요한 저수지를 쌓고 백성들에게 물 값을 받겠다고 하자, 동학의 고부 접주이던 전봉건이 앞장서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은 관아를 접수, 관리들을 내쫓고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준 다음 10일 만에 해산했다. 정부 측 관리가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곧이어 파견된 진상조사단이 모든 죄를 농민군에 뒤집어씌웠다. 일본의 내정간섭 결과였다.
이렇게 되자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아예 혁명가로 나섰다. 그러나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군은 1년여 만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 반침략 민족운동이며,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였고, 전통사회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항일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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