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

종교정신과 道/선천종교의 모습들 2015. 1. 26. 11:28

>>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 


- 숭산선사 


오늘날의 인간 세상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답게 행동하여야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순간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옳은 길이란 무엇인가? 순간순간 당신의 옳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옳은 길을 찾는가?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왜 우리는 이 세상에 나왔는가? 이 몸은 빈 것이다. 무엇이 이 몸을 움직이는가? 어디에서 왔는가?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이 그것을 찾고 싶다면 자신에게 물어라. "나"는 무엇인가? 항상 이 큰 의문을 품어라. 생각은 사라져야 한다. 모든 생각을 버리고 끊어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와 마음이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수행을 원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지 않고 오로지 그들의 욕망과 화, 무명을 따른다. 죽을 때 우리는 몸을 가져갈 수 없다. 

몸이 사라질 때 무엇을 가져 갈 수 있을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알지 못하지 않은가? 


이 모른다가 분명해지면 너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는 곳이 분명해 진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 당신의 진정한 자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여기까지 당신의 몸을 여기에 가져다 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입니까? 마음은 무엇입니까? 어디에 있으며 형태는 어떠합니까? 마음은 마음이 아닙니다. 산은 “나는 산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 또한 “나는 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이름과 형체는 생각으로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마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이름과 형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빈 것입니다. 그래서 형체가 공이고, 공이 곧 형체입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 당신의 마음과 나의 마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다릅니다. 만일 모든 생각이 사라지면 모두의 마음은 같아집니다. 모든 생각에서 벗어 난 마음이 진정으로 공한 마음입니다. 진실로 공한 마음은 생각전의 마음입니다. 당신의 실체는 생각하기 전의 완전한 실체입니다. 생각하기 전에는 어떤 말이나 언어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신도, 부처도 없고, 산과 강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형체도 없고, 공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 이전은 진정 이와 같습니다. 형체도 없고, 공함도 없는 것은 공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안과 밖이 사라집니다. 당신은 완전한 것을 얻게 됩니다. 당신이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모든 것이 진실입니다. 신은 신이고 부처는 부처입니다. 산은 산이며 강은 강입니다. 진실은 이와 같습니다. 형체는 형체고 공함은 공한 것입니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당신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생각은 욕망이고, 욕망은 고통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질 때 삶도 죽음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막힘 없는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됩니다.


당신의 몸은 삶과 죽음을 겪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는 삶과 죽음을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존재합니까?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대답 모두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탁자를 치며) 할!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으십시오! 최상의 해답은 이 문 앞에 있습니다.




>> 올바른 참선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의사에게 심장을 검진 받았습니다. 처음 검진했을 때 심장박동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버드대학 교수가 심장 질환과 당뇨 등을 앓고 있는 사람 검진한 연구에 관한 자료를 읽었습니다. 그는 명상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검진했습니다. 명상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약을 먹어야만 괜찮아 졌지만 집중해서 명상을 한 사람들은 약 없이도 빠르게 치유되었습니다.


초월적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의사들은 명상을 좋아합니다. 내 담당의사도 “선사님, 당신은 선사이니 명상을 하세요!” 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고치는 명상을 시도했습니다. 


3일 만에 나의 심장은 많이 치유되었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명상 때문이라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일주일 후 보다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담당의들은 “놀랍습니다! 이 문제를 치료하는 데는 보통 2~3개월이 걸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빨리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몸을 고치는 명상이지 옳은 명상은 아닙니다.”고 말했습니다.


“왜 이것이 옳은 명상이 아닙니까?” 그들은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몸과 심장과 당뇨를 고칠 수 있습니다. 한국, 중국, 인도에서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산에 가서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으며 참선을 합니다. 그들은 500년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병도 없습니다. 그들의 몸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심지어 나는 일도 가능합니다. 


이런 종류의 요가명상은 어떤 것이든 가능케 합니다. 몸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차를 많이 사용하면 3년 정도 지나면 고장이 납니다. 차고에만 차를 둔다면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500년 후엔 요가명상을 하던 사람도 죽습니다. 그런 후엔 어떻게 될까요? 오래 살았든 짧게 살았든,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올바른 명상이란 무엇입니까?” 의사들이 이해하며 물었습니다.


"나는 항상 참선을 합니다. 참선이란 것은 움직이지 않은 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오직 집중하는 마음과 몸을 지키는 것이 참선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참선이란 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해해야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요? 죽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마음을 유지하면 거기에는 삶도 죽음도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내일 죽든 5분 후에 죽든 상관없습니다. “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물었습니다.


“몸을 치유하는 명상만을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몸이 죽어버릴 때 이런 종류의 명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런 종류의 명상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명상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명상이란 순간순간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직 할 뿐! 그러면 모든 행동은 완벽하고 그걸로 충분한 것입니다. 생각이 없이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아플 땐, 그냥 아프고, 운전할 땐 오직 운전할 뿐입니다. 오직 바르게 가십시오. 그러면 모든 상황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의사들은 참선에 대해 좀더 배울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내 방에 와서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의사가 물었습니다. “저는 일과 가정이 있기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어떻게 해야 청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청정한 마음이란 순간순간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자와 함께 할 때는 100% 의사의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이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갈 땐 오직 100% 운전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부인을 만났을 땐 100% 남편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을 무엇을 할 땐 오직 할 뿐인 것입니다. ‘나-나의-나를’이란 생각을 만들지 마십시오. 이것을 만들면 당신의 의견과 상태, 상황이 나타나게 되고 곧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환자와 함께 있을 때 부인생각을 하게 되면 환자는 당신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부인과 이야기 할 때 병원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올바른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일’, 즉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수술을 할 때, 당신과 수술용 칼은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또 당신이 운전을 할 땐 당신과 차는 하나가 됩니다. 조약돌길 위를 운전할 때 오직 운전만 하게 되면 당신은 조약돌 위의 타이어 같이 느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당신과 당신의 행동이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과 우주는 완전히 하나가 됩니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직 할 뿐” 또는 “내려놓다”,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라” 라고 말합니다.


“만일 오직 현재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미래를 계획하고 방향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저는 환자들과 나 자신, 그리고 가족을 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한 의사가 물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이것은 ‘삶에서 무엇을 얻었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병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물었던 것인데 대부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직업과 가족들, 훌륭한 아내 또는 남편을 가졌을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을 돕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없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만으론 그들을 돕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선이란 이 없는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순간순간 청정한 마음을 유지하면 당신은 어디서든 행복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은 이 없는 마음을 얻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없는 마음을 큰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없는 마음은 나란 것이 없고 장애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자대비한 마음을 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가능합니다. 없는 마음은 나타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순간순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당신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져서 당신이 환자와 함께 있을 땐 환자와 하나가 되어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족과 함께 있을 땐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푸른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하얀 구름이 떠다닐 뿐입니다.





>> 염불은 왜 하는가? 


어느 일요일 저녁, 뉴욕 국제선원에서 법문이 있은 후에 한 제자가 숭산 스님께 질문 했습니다.

“염불은 왜 하는 겁니까? 좌선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가 않습니까?”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함께 절하고, 함께 염불하고, 함께 공양하고, 함께 좌선하고 그 밖에도 선원에서 모든 일을 함께 한다.? 우리는 왜 함께 수행을 해야 하느냐?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업을 지녔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상황이 각기 다르고 조건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스님이고 어떤 사람은 학생이고 어떤 사람은 공원이듯 말이다. 항상 깨끗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도 있고, 가끔 불안하고 불만을 느끼는 사람도 있으며, 여권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내 생각이 옳다!’ 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선사들까지 그러하다. 열 사람의 선사마다 제 각기 다른 지도방법을 갖고 있으며, 그들은 자기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은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졌고, 동양인은 동양식 사고방식을 가졌다. 다른 견해에서 다른 행동이 나오고 다른 업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네가 너의 생각을 고집하면 너의 업을 다스리기가 매우 힘이 들게 되고 너의 삶이 고통으로 남는 것이다.


너의 틀린 견해가 계속되는 한 너의 나쁜 업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원에서는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수행하며, 모두가 선원 청규대로 따라 한다. 남달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별하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오면 점차 그런 것을 떨쳐 버린다.


새벽 5시 30분에 전원 모두가 백팔배를 ‘함께’ 하고 ‘함께’ 공양하고 ‘함께’ 일을 한다. 어떤 때는 절을 하기가 싫을 때도 있겠지만, 이것이 선원청규이기 때문에 따라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때 너는 피곤해서 자고 싶지만, 좌선하러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양을 할 때는 절 방식대로 네 개의 발우에다 먹고, 공양이 끝난 뒤에는 차를 부어 검지손가락으로 씻게 되어 있다. 처음 몇 번은 이런 방식대로 차를 마시는 것을 모두 싫어했었다. 캠브릿지 선원에서 온 젊은이 하나가 내게 와서 화를 냈다.


“이런 식으로 먹는 게 싫습니다! 그 차 속에는 찌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건 도저히 마실 수 없어요!” 


내가 그에게 말했다. 


“[반야심경]을 아느냐?” 

“네.” 

“경에서 이르기를,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하지 않더냐?” 

“네.” 

“그런데 왜 그 차를 못 마시겠다는 거지?” 

“왜냐하면 더럽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의 웃음소리)


“왜 그게 불결하다는 거냐? 그 찌꺼기들은 이미 네가 먹은 음식물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네가 그 차를 더럽다고 생각하면 더러운 것이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한 것이다.” 

그 젊은이가 말했다.


“선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 차를 마시겠습니다.” 

(웃음소리)


그래서 우린 함께 살고 함께 행동하는 거다.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각자의 사견과 개인적인 조건,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 모두 끊어 내는 것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우린 빈 마음이 되는 것이다. 본래의 백지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진정한 생각과 진정한 조건, 진정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함께 절하고, 함께 염불하고, 함께 공양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바다의 수면과 똑같다. 바람이 일면 수많은 파도가 일어난다. 바람이 잦아들면 그 파도는 작아진다. 이윽고 바람이 멈출 때 그 물은 거울과 같이 되어 모든 사물을 반사한다.


산, 나무, 구름 등을. 우리의 마음도 이와 똑같다. 우리가 욕심을 많이 내고, 사견을 많이 가지면 거기에는 거센 파도가 일게 된다. 그러나 가끔씩 좌선을 하며 함께 행동을 하면 우리의 사견과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물결은 점점 작아져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한 거울같이 될 때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 모두가 진리가 된다. 그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너무 쉽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내 마음에 비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불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처음에 너는 이해하기가 힘들겠지만, 규칙적으로 염불을 하다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 염불은 아주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라고. 이것은 백팔배와도 같은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했다. 왜 절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부처님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작은 내(小我)가 큰 나(大我)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나는 없어지고 큰 나가 된다. 이것이 진짜 절이다. 그러니 와서 함께 실행해 보자. 너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제사는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