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와 메꽃 그리고 서낭당 - 봉황은 자기부정을 하는 곳엔 날아오지 않는다

민족문화대학/역사 탐구 2015. 4. 22. 22:55



진달래와 메꽃 그리고 서낭당

(봉황은 자기부정을 하는 곳엔 날아오지 않는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 
아름다운 우리의 금수강산은 울긋불긋한 꽃이 피고 
물오른 싱싱한 나무들이 그 생명력을 한껏 뽐을 낸다. 

그 취향에 따라 어떤 이들은 군락을 이루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 구경을 가고 
어떤 이들은 노란 개나리나 유채꽃 또는 복숭아꽃에 매료되어 
짝을 이루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한다. 
이때쯤엔 봄의 정취를 느끼려 들과 산을 찾는 상춘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기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한화(桓花) - 진달래꽃>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봄이 되면 
우리 민족의 정서하고 딱 들어맞는 꽃이 있으니 바로 진달래가 아닌가싶다. 

지역에 따라 참꽃 으로 더 많이 불리며 
만주지역에서는 천지꽃(天指花) 으로 이름하고 
한자어로는 두견화(杜鵑花) 라 하는 진달래는 
온 산하를 붉게 불들이며 천지자연의 생명력을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진달래는 언제부터 우리 민족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누가 특별히 심지도 않았고 돌보지 않았어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밝고 빛나는 아름다운 나라인 진단(震檀, 우리나라를 칭하는 다른 이름)의 산과 들에 
가장 먼저 피는 참꽃이었기에 그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며 

꽃잎을 따먹기도 하고 전을 부쳐 먹기도 하고 술을 담아 먹기도 하는 진달래는 
우리 민족의 유별난 애정만큼이나 가히 민족의 꽃이라 할 만하다. 

우리 민족 치고 진달래가 나오는 ‘고향의 봄’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로 시작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진달래는 언제부터 우리 민족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고려 말 이암(李嵓) 선생이 편찬한 <단군세기>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단군세기>의 13세단군 흘달(屹達) 편을 보면 
“무술 20년(BC 1763)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은 길을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녀서 
사람들은 이를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천지화는 진달래이며 
진달래를 꽂고 다녀 화랑(花郞)이 말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은 신라시대에 있었던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이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정착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책 16세단군 위나(尉那) 편에 
“무술 28년(BC 1583)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三神) 하느님께 제(祭)를 지냈는데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같이 모시고 제를 지냈다. 

닷새 동안 크게 잔치를 베풀어 
백성과 더불어 불을 밝혀 밤을 지새우며 경(經)을 외우고 마당밟기(踏庭)를 하도록 하셨다. 

한 쪽에서는 횃불을 나란히 피우고 
또 한 쪽은 환무(環舞,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추는 춤. 강강술래도 환무 중의 하나다)를 추며 
애한가(愛桓歌)를 부르도록 하셨다.” 라고 하고 

애한(愛桓)이란  곧 옛날 신가(神歌)의 한 종류이며 
선인(先人)들은 한화(桓花)를 가리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어서 애한가(愛桓歌)의 가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不咸山)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하느님(天神)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라고 하여 

나라의 백성들이 애한가를 널리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라고 보고 있지만 
애한가의 가사와 생태환경과 분포지역을 감안해 보면 무궁화라고 할 수 없으며 
한화는 우리 민족이 사는 어느 곳에서나 피는 꽃 중의 꽃인 참꽃 즉 진달래임을 알 수 있다.

군자국의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는 훈화초 - 메꽃

우리 민족의 꽃에 대한 기록은 <산해경(山海經)>에서도 볼 수 있다. 

<산해경. 해외동경>에 보면 

군자국은 저고리를 입고 갓을 쓰며 칼을 차고 짐승을 기르며 
두 마리의 줄무늬 범(또는 큰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 

군자국의 사람들은 겸양을 숭상하여 다투지 
않으며 훈화초(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君子國衣冠帶劔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有薰華草朝生夕死)
.”라고 하여 

앞서 말한 단군조선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훈화는 순(舜)임금이 동이사람이었다는 것과 
훈과 순의 발음이 비슷하여 순화(蕣花 또는 舜花)라고도 쓰고 무궁화로 알고 있다. 

그런데 무궁화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군자국 사람들이 먹었다는 훈화는 무궁화가 아님이 분명하고 
후대에 무궁화로 대체된 것이다. 

식용으로 쓸 수 있으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 바로 메꽃이다. 

메꽃은 고구마처럼 땅속줄기와 잎을 먹을 수 있으며 
또한 고구마꽃, 나팔꽃과 같은 종으로서 꽃의 모양과 색깔이 거의 흡사하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훈화초는 바로 이 메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훈화(薰華)로 추정되는 메꽃 1>



<훈화(薰華)로 추정되는 메꽃 2>



단군조선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는 서적으로 <산해경>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을 주해한 청나라 때의 오임신(吳任臣)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에서 위의 군자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천로(天老)와 경방(京房)을 인용하여 

오색의 봉황이 동방의 군자국에서 나며 
높이가 2장(丈)

”이라고 하고 

또한 노능라(廬陵羅)의 말을 인용하여 

북방에는 녹지 않는 얼음이 있고 
남방에는 시들지 않는 풀이 있으며 
동방에는 군자의 나라가 있으며 
서방에는 잔혹한 형벌을 당한 주검이 있다

.”라고 하였으며 

도찬(圖贊)을 인용하여 

“동방에 기운이 어진 나라에 군자가 있는데 
훈화를 먹으며 독수리와 범을 부리며 
규범을 잘 지키며 예절과 겸양을 숭상하고 
순리에 맞는 이치를 논한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산해경. 해내경>편에서 

 <산해경>의 <해내경>과 <대황경>은 본래 빠져있었으며 
라필(羅泌)이 편찬한 <로사(路史)>에서 
이를 인용하여 주를 달고 있으며 <해내경>과 <대황경>은 
<조선기(朝鮮記)>라는 말과 통한다

.”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산해경>의 <해내경>과 <대황경>은 
단군조선의 인문과 지리를 다룬 서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며 
원래 <조선기>라고 되어있었음

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강한총담(江漢叢談) 
명(明)나라 이지(李지)가 편찬한 의요(疑耀), 
청나라 장기(蔣驥)가 편찬한 산대각주초사(山帶閣註楚辭), 
송(宋) 라벽(羅璧)의 식유(識遺) 
그리고 명(明) 고기원(顧起元)의 설략(說畧) 등의 서적에서도 
<해내조선기> 또는 <조선기>라고 인용한 구절이 보이는 것은 
그 신뢰감을 더해준다. 

또한 명(明)나라 때 
동사장(董斯張)이 편찬을 하여 간행이 된 <광박물지(廣博物志)>  

<조선기>를 인용하여 
“순(舜)에게는 8명의 자식이 있었고 
이때에 비로소 노래와 춤이 시작되었다.”라고 하여 

단군조선에 이미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화가 있었고 
그 것을 화하족에게 전해주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조선기>에 있었음에도 왜곡 첨삭되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단군조선시대의 풍속을 알 수 있는 것이 웅상(雄常)이다. 
웅상의 기록 또한 <산해경>에 보인다. 

<산해경>의 <해외서경>에 
“숙신(肅愼)의 나라는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고, 
나무가 있는데 웅상이라 한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를 주해한 오임신은 <회남자>를 인용하여 
해외에 36국이 있는데 숙신의 백성이다.”라고 하여 
단군조선의 강역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웅상에 대하여 주해를 한 진(晉)나라의 곽박(郭璞)은 
숙신에는 의복이 없으며 
중국에 성스러운 임금이 즉위를 하면 
웅상에 가죽이 생겨 백성들이 옷을 해 입는다고 
엉터리 주해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와 풍속을 모르고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솟대와 장승 그리고 서낭당과 갚은 관계가 있는 웅상(雄常)과 산상(山像)

웅상이란 무엇일까? 

조선시대 이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와 <삼한관경본기.마한세가>에 웅상에 관하여 기록이 되어 있다. 

먼저 <삼신오제본기>를 보면 
삼한(三韓)의 옛 풍속은 모두 10월 상날이 되면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하늘과 땅과 조상에 제를 지냈는데 
산상(山像)과 웅상은 모두 그러한 풍속이 남겨진 것이다
.”라고 하고 

또한 “큰 나무를 봉하여 한웅신상(桓雄神像)으로 삼고 경배를 하였는데 
신수(神樹)를 세속에서는 웅상이라 부른다. 
상(常)은 항상 있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즉 크고 웅장한 나무를 골라 한웅천왕을 모시는 신상으로 삼고 
한웅천왕께 제를 올렸기 때문에 웅상이라 하였다는 기록이다. 

산상(山像)과 웅상은 솟대와 장승 그리고 서낭당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러한 풍속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서낭당의 모습>


서낭당에 대하여 
보통은 성황당(城隍堂)이 변하여 서낭당으로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한웅의 ‘웅(雄)’자의 훈인 ‘숫’과 
나무의 고어인 ‘남ㄱ’이 합하여 
‘숫남ㄱ’이던 것이 변음이 되어 ‘서낭’으로 되었을 가능성과 

산에 있는 큰 나무라는 뜻의 ‘산남ㄱ’이 변하여 
‘서낭’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모두 웅상의 뜻과 통하며 서낭당에 항상 큰 나무가 있었고
“산상(山像)과 웅상(雄常)이 모두 산꼭대기에 있었다.는 
<마한세가>의 기록을 충족하며 서낭당의 풍속이 세계 여러 곳으로 퍼졌다가 
문자로 기록이 되면서 성황당으로 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러한 서낭당과 솟대의 풍속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와 몽골의 ‘오보’와 그 맥이 같으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는 물론 

멀리 미대륙 인디언들에까지 그 풍속이 보이는데 
그 원천이 바로 우리의 웅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없지만 
보통 서낭당에는 다섯 색깔의 천이 둘러 쳐져있고 
돌무더기가 있어 발복을 기원하였는데 

그 오색의 천을 진나라의 곽박은 
옷을 해 입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한화(桓花)와 훈화(薰華) 그리고 웅상(雄常)의 실체와 의미를 통하여 
단군조선의 실재를 살펴보았다. 

<마한세가>에는 이러한 단군조선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둥글게 모여 마을과 부락을 이루고 
네 집이 우물을 하나로 사용하였고 
1/20의 세(稅)를 냈으며 

세상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처럼 노적(露積)이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이를 기쁘고 편안하게 여겨 
태백환무의 노래(太白環舞之歌)를 지어 만드니 이로써 전한다
.”고 하여 
단군조선의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용했던 사자성어인 
세상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의 
시화년풍(時和年豊)이라는 구절도 여기에 보인다.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했던 공자. 
공자가 살던 당시에 봉황이 날아오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꿈꾸었던 유교의 이상세계라는 대동세계(大同世界)도 실상은 
우리의 단군조선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자기탄식적 고백이며 구두선에 불과한 것이다.

단군조선은 봉황이 날아오고 홍익이념이 실현된 광명의 나라

진달래가 피는 지역과 솟대와 서낭당이 있었던 그 곳을
메꽃의 줄기처럼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고리지었던 곳이 
바로 단군조선이었고 

봉황이 날아오며 홍익이념이 실현된 광명의 나라 그 곳이 
순방(淳厖)이 이룩된 이상향의 단군조선이었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선진문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태평성대에만 나타나는 
봉황과 삼족오 그리고 구미호가 등장했던 단군조선은 
실로 위대한 나라였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봉황은 남이 만들어 놓은 상상속의 동물이며 
권위적인 것이라고 자기부정을 하는 곳엔
시화년풍(時和年豊)은 오지 않는다. 

오늘도 피어있는 우리 강산의 진달래는 
서럽게 우는 소쩍새 소리만큼이나 
스스로 하늘꽃이라고 말없이 웃고 있다. 

왜 나를 좋아하면서 나를 닮지 않느냐고 말이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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