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 이야기
개밥그릇 2012. 1. 1. 19:12“라마나 마하리쉬는 깨달은 분 맞지요?”
내면의 공간에서 수련하는 연신, 환허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마음에 공명이 일어나는 책을 읽으면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연신의 경우에는 그런 책들을 읽고서 내면의 공간에 들어가 수련을 하면 내면의 공간이 몸 속으로 쑥~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일어난다. 그럴 때 에고가 사정없이 녹는다. 환허수련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환허는 내면의 공간으로 들어가 에고를 바라보면서 에고를 녹이는 수련이다. 책을 읽고 마음의 울림이 있는 상태에서 에고를 바라보면 에고덩어리가 보다 쉽게 녹게 된다. 특히 에고가 잘 녹지 않고 수련이 정체되어 있을 때 그런 책을 읽고 수련을 하면 막혔던 수련이 풀리는 전기를 마련해 준다.
환허수련을 하고 있는 박도반은 요즘 라마나 마하리쉬의 책을 읽고 있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근세 인도를 대표하는 성자이다. 흔히 침묵의 성자라고도 불리우는데 깊은 깨달음의 경지로 유명하다.
“예. 맞아요.”
“어느 정도인가요?”
“진아의 불길 속에 에고를 완전히 녹인 분이예요.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 분처럼 에고를 완전히 녹이고 진아와 하나된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예요.”
“왜 그런가요?”
“깨달음이 일어나면 진아를 알게 되요. 진아가 곧 ‘참 나’이구나라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의 체험일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라고 볼 수 있어요. ‘거짓 나’에서 ‘참 나’로 거듭나는 거예요. 에고에 구속되어서 육체의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의식이 갑자기 폭발을 일으켜요.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요. 너무나도 쉽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깨달음은 그 곳에 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허탈할 정도이죠. 이 쉬운걸 왜 몰랐을까? 깨달은 이들은 이렇게 너무나도 쉽고, 당연한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안타까와져요.
그런데 깨달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게 있어요. 깨달았다고 해서 자신의 에고를 다 녹인게 아니라는 거예요. 깨달은 이들은 자신의 에고가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을 녹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요. 깨달음은 이미 존재하는 깨달음을 아는 것일 뿐 그 어떠한 수련으로 다가가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예요. 즉, 존재의 문제이지 수련의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의 수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그들은 남아있는 에고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설령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에고를 녹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당연히 깨달음의 의식과 에고의식이 병존하겠죠. 그들은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깨달음에 이르면 에고를 녹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텐데요?”
“예. 그래요. 진아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예요. 진아와 하나된 상태로 머물고 있으면 에고가 알아서 녹아요. 우리 수련으로 말하면 환허나 합도수련이 여기에 해당해요. 대부분의 깨달은 이들은 깨달음 이후에 공부를 멈춰버리죠. 깨달음은 확철대오다, 깨달음은 단박에 일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존재의 문제일 뿐이다. 깨달음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들이 깨달음 이후의 공부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선입관 없이 에고를 다 녹인 사람들이 있어요. 본래 에고가 많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미세한 에고의 습들까지도 다 녹인 경우예요. 뜨거운 불길 속에서 숯이 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듯이 진아의 뜨거운 불길 속에 있으면 에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그렇게 에고를 다 녹이면 이전의 깨달음과는 다른 차원이 열려요.”
“어떠한 차이인가요?”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좋은 법을 사람들에게 전할까를 고민해요. 저절로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하죠. 너무나도 당연하게만 생각되는 이 행위 속에 미세한 함정이 숨어 있어요. 분별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깨달은 이와 중생을 구분하고, 법과 법 아닌 것을 구분하고, 수승한 법과 평범한 법을 구분하고, 삶과 수행을 구분하죠. 법에 따라서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과 좋은 법을 전하는데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분하게 되죠. 이렇게 분별을 해야 법을 전할 수 있거든요. 법을 전한다는 것은 이미 분리를 전제로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분별심이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법을 전할 생각을 안 하는게 더 높은 경지인가요?”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법을 전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법이 전해지도록 해야 되요. 이것은 언뜻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정으로 법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이랍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면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하는 생각조차도 사라져요. 오직 사람만이 보이게 되죠. 에고를 가진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 진아를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중생이고, 번뇌에 쌓여있고, 어리석고, 그래서 법을 전해야 하는 사람에서 나와 똑같이 진아를 품고 있는 사람으로 달리 보이는 거예요.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법을 들이대는게 이상한 얘기죠.
분별심 또한 사라져요. 너와 나도 없고, 좋은 법과 나쁜 법도 없어요. 깨달은 이와 중생도 없어요. 열심히 따라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구분도 없어요. 모든 것은 흘러갈 뿐이죠. 흐름 속에는 분별심이라는게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진아와 온전히 하나가 된 사람은 이 흐름을 잘 알아요. 머리로 아는게 아니라 삶 자체가 그러한 흐름을 표현하게 되요. 그러다보면 자신의 삶 자체가 법을 전하게 되요. 법을 전하려고 해서 전하는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의식과 삶 자체가 법이 되는 거예요. 법을 전하지 않아도 전하게 되고, 전해도 전하지 않는 것처럼 전하는 거예요.”
“알듯 말듯 하군요. 전할려고 하지 않아도 전하게 된다는 것인가요?”
“예. 아무것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하는 것과 같아요. 마하리쉬의 삶이 그와 같아요. 마하리쉬는 깨달음 이후에 평생 아루나찰라 산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요. 의도적으로 가르침을 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하리쉬처럼 깨달음에 관한 진리를 전세계적으로 잘 전한 사람이 없거든요. 세상이 깨달음을 찾아 마하리쉬를 찾아온 거지 마하리쉬가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간게 아니라는 거지요. 전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큰 가르침을 펼친 하나의 예예요.”
“조금 이해가 되는군요.”
“진아의 품 속에서 온전히 하나되어 본 사람은 진아의 흐름을 알아요. 진아의 흐름과 온전히 하나된 삶은 그 무엇도 걸림이 없고, 그래서 그 무엇도 행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는 거예요. 삶 자체도 그런 식으로 구현이 되구요. 자신의 법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면 본래의 ‘참 나’를 깨닫도록 하는가가 보다 더 중요해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들에게 맞게 법을 전하게 되요. 소위 말해서 눈높이를 하는거죠.”
“어떤 눈높이를 말하나요?”
“마하리쉬는 침묵의 성자로 알려져 있죠. 마하리쉬가 보기에 침묵이야말로 깨달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예요. 이것은 전하고자 하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거예요. 언뜻 보면 그저 침묵을 지키고 앉아서 수련만 하는 것 같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진아와 온전히 하나된 상태로 같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 사람들의 에고가 굉장히 잘 녹게 되요. 의식이 동화되어서 진아의 세계로 잘 넘어가기도 하구요. 이것은 깨달음의 체험이거든요. 그렇게 가르침을 전하는 거예요. 이것처럼 직접적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방법은 없어요. 이것은 그야말로 직접적인 가르침이예요. 진아가 직접 다가와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의 의미를 알지 못해요. 그들은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는데에 익숙하지 않아요. 불편한거죠. 가르침을 들으러 왔는데 가르침을 줄 생각은 안 하고 침묵만 지키고, 수련만 하고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르침을 달라고 조르게 되죠. 마하리쉬는 충분히 가르침(준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완전한 가르침을)을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가르침을 달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마하리쉬는 사람들에게 맞게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한거예요. 그것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들이죠.”
“책에 보면 마하리쉬가 권한 깨달음의 방법으로 자아탐구와, 헌신의 길이 나와 있어요. 근기가 좋은 사람들, 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자아탐구 방법을 권했구요, 자아탐구 방법이 어려운 사람, 감성적인 사람들에게는 헌신의 길을 권했어요. 사람들에게 맞게 눈높이를 한 것이군요?”
“예. 맞아요. 마하리쉬는 나름대로 그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다고 본 거예요.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것은 왜 그런가요?”
“마하리쉬는 에고가 거의 없는 상태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17세에 임사체험을 하면서 깨달았던 거예요. 아루나찰라 산에서 두달여간의 깊은 삼매동안 진아의 불길 속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에고를 마저 다 녹이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거구요. 그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어요. 마하리쉬가 태어날 때의 에고를 보건데, 마라리쉬는 태어나지 않아도 되었어요. 마하리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추가로 더 수련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깨달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였을 거예요. 깨달음의 진리가 수없이 많이 돌아다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나 많은 주석이 달리고 방대해져버렸거든요. 깨달음 그 자체의 진리를 접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져 버렸어요. 마하리쉬는 쉽고 직접적으로 깨달음의 진리를 전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마하리쉬는 정신문명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근대에 깨달음의 진리를 인간세상에 전하는 소임을 갖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러다보니 마하리쉬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에고가 얼마나 단단하고 질긴 놈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에고를 녹이면서 겪는 그 수많은 고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거예요. 삶이라고 하는게 사실 에고를 녹이는 과정이거든요. 삶이 고통스럽고 온갖 번민에 휩싸여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에고가 복잡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말해요. 이러한 에고를 녹이는 것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쉽겠어요? 마하리쉬는 이처럼 복잡하고 교묘하며, 단단하고 질긴 에고를 녹인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마하리쉬 나름대로 눈높이를 했지만 다소 현실과 맞지 않는 형식적인 내용이 되었던 거예요.“
“사람들의 에고를 잘 알아야만 깨달음도 눈높이에 맞게 전할 수 있는 거군요?”
“예. 그래요. 바나나를 쥐고 놓지 못하는 원숭이에게 ‘너를 붙들고 있는 것은 네 의식일 뿐이야. 그것은 허상인데 왜 버리지 못하느냐’라고 아무리 외쳐 봐도 그 말이 원숭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것보다는 원숭이의 의식에 맞게 체계적으로 교육을 시켜야지요. 깨닫지 못한 사람을 원숭이에게 비유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 비유처럼 에고와 깨달음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사례가 없어서 제가 자주 드네요. 에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게 전개되어야 해요. 그 사람들의 에고에 맞게 눈높이를 맞춰서 에고를 하나씩 하나씩 녹이도록 체계적인 과정을 정립해야 하는 겁니다.”
http://www.naturesundo.com/korean/viewtopic.php?t=2950&sid=8726cdb4adc11c29411bc14599de85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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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우주론에 밝아지면, 마음의 기작에 대해서도 밝아진다.
선천 종교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실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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