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構造에 대한 考察 (雲月)

종교정신과 道/불교 2015. 6. 29. 20:00
깨달음의 構造에 대한 考察 (雲 月)깨달음의 構造에 대한 考察
雲 月

목 차
머 리 말
Ⅰ.生死輪廻의 因
1.無明
2.愛
3.번뇌의 相
Ⅱ.깨달음의 因
1.菩提心
2.行의 그침
3.念으로 다스림
Ⅲ.깨달음의 緣
1.信
2.三學
3.止觀
Ⅳ.깨달음의 過程
1.수행의 단계
2.현상의 단계
Ⅴ.깨달음의 果


1.四果
2.神通
맺 는 말
머 리 말

한국의 대표적인 종단인 曹溪宗은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禪宗의 전통이 강한 승단 이다. 대부분 처음 發心한 수행자들은 승려의 기초 習儀를 배우면, 바로 禪房에 가서 參禪하는 것을 정석으로 여겼으며, 敎學은 수행하다가 한 경지를 얻었을 때 비로소 經典을 열람하는 것이 常例로 되어 있다. 그 까닭은 看話禪의 오랜 전통 때문으로 미리 경전을 보면 疑團을 수행해 가는데 '알음알이'가 되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禪學은 체계적인 정립이 되지 못하였고, 실제의 參究도 없이 敎學 만 연구하는 것은 '평생 남의 보배만 세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多宗敎 사회로 전환하면서 傳法의 필요성도 간절해지고, 사회가 안정되고 講脈을 이은 講師들이 배출되면서부터 本寺 단위로 전통 講院이 부활하였고, 일반 대중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승려들의 현대교육이 장려되기 시작했다.

菩提達摩가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A.D.6세기 경), 중국에는 이미 다양한 大·小乘의 經典과 禪經등이 들어와 講師와 禪師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有爲法에서 벗어나 無爲法을 수행하여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진정한 목적인 것을 가르칠 수 있었다. 당시 法相에 떨어져 있던 중국인들에게 '眞如自性의 本體가 淸淨함'을 가르치면서 '是心是佛'의 가르침을 주고 '壁觀'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禪은 '頓悟'의 전통을 이어 오면서 나름대로의 禪脈을 전해왔지만, 오늘날에는 제대로 발심 한 수행자나 혹은 수행하다 한 境界가 난 수행자조차도, 눈밝은 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재가불자 중에는 더러 오해하여 한국승가의 폐쇄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실제 상황은 출가 승려조차도 눈밝은 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市中에는 자칭'道人'도 많고, 엉터리 '善知識'도 한몫을 한다.

가장 초기의 가르침인 아함경에도 禪의 根本이 담겨 있고, 올바른 가르침은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래서 經典이 있는 곳은 부처님이 계신다 했는가?

韓國 禪의 새로운 相을 제시하여, 적어도 잘못 흘러가는 오류를 막고, 가능하면 漸次法에서 頓悟法 발생한 過程까지 밝히려는데 이 논문의 목적을 삼고자 한다.

혹시 초기경전이나 논서에는 禪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음이 미흡하지 않을까 하는 先入觀이나 杞憂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敎外別傳'의 三處傳心의 내용도 아함에 모두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敎外別傳'의 의미도 '是心是佛'의 '心佛'사상으로 올바르게 재해석되어야 하며,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韓國禪의 특징도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연구범위는 漢譯 아함경중 僧伽提婆譯 『中阿含經』, 求那跋陀羅譯 『雜阿含經』과 漢譯 僧伽婆羅譯 『解脫道論』등 초기 經論을 중심으로 의거하며, 『六祖壇經』, 『頓悟入道要門論』등 禪語錄도 포함한다.

연구방법은 Ⅰ장에서는 생사에 윤회하는 원인으로 無明, 愛, 다양한 번뇌의 相으로 설정하고, 무명과 애가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며, 도를 장애 하는 다양한 번뇌의 상을 제시하고 그 의미를 알아본다.

Ⅱ장에서는 깨달음의 원인으로 菩提心, 12 緣起 중 行의 그침, 念으로써 다스림으로 나누어 經論에 의거하여 수행의 이론적 根據와 方法의 起源을 살펴보기로 한다.

Ⅲ장에서는 깨달음의 緣으로 信과 三學과 止觀으로 보고, 그 이유를 경논에 의거하여 밝히며, 선어록에는 어떻게 변화하여 자리 매김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Ⅳ장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수행항목의 단계와 수행도중 나타나는 현상의 단계로 나누어 봄으로서, 깨달음의 과정에는 어떠한 항목과 현상이 있는지 조명해 보고, 한국선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고찰해 본다.

Ⅴ장에서는 아함에서 수행의 果位로 언급되고 있는 沙門 四果와 神通에 대해 고찰함으로서, 어떠한 상태가 깨달음의 상태이며, 그 과정에서 神通이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지 살펴보고, 禪宗에서는 왜 이러한 단계를 무시하게 되었는지 선어록을 통해 살펴본다.
이상을 통해 수행은 왜 해야 하는지, 생사윤회의 原因은 무엇인지, 깨달음의 因, 緣, 過程, 果는 무엇인지를 밝혀, 바른 眼目을 갖추고 수행에 임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有爲의 相을 이해하고, 다음에 無爲法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맺는 말을 대신한다.


Ⅰ.生死輪廻의 因
1.無明

아함에는 각 아함 마다 부파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설도 있지만, 같은 아함 안에서도 초기의 단순한 형태의 설법이 있는가 하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일정한 틀을 가진 構造도 보여, 비교적 초기의 내용과 후기의 내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명(Avidy )은 12 緣起에서 생사윤회가 시작되는 첫째 원인으로, 잡아함에는 無明과 생사윤회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비구여, 無常한 것은 苦다. 苦가 있으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매어 집착하여 '나'라고 보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無明에 덮혀 애착(愛)에 그 머리를 묶고, 오래 달리면서 생사에 輪廻하고 생사에 流轉한다.") 『잡아함경』(대정장2, 41하) "如是比丘 若無常者是苦 是苦有故 是事起 繫著見我 令衆生無明所蓋 愛繫其頭 長道驅馳 生死輪廻 生死流轉"

라고 하여 五蘊은 無常한데, 그 無常한 것에 집착하여 '나'라고 보면서, 無明에 덮혀 애착에 머리를 묶고, 생사에 윤회하고 유전한다는 것으로 여기에서 無明은 無常함을 모르고 집착을 일으켜, 苦의 시작인 緣起를 시작하게 하는 原因이 됨을 보이고 있는데, 無明은 無常을 모르는 진리에 대한 無知도 있지만, 그 구체적인 行은 五蘊을 '나'라고 하는 分別을 일으키고 보는 것이 無明의 行으로 나타나 있다.

다음은 無明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無明이 부딪혀 愛着을 낸다. 애착을 緣하여 그 行이 일어난다. 그러한 애착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모으며, 무엇을 생기게 하고, 무엇을 轉하는가? 그 애착은 (感受作用)을 원인으로 하고, 감수작용을 모으며, 감수작용을 생기게 하고, 감수작용을 轉하게 한다.......(부딪힘).......(여섯 감각기관)"

) 『잡아함경』(대정장2, 14상) "無明觸生愛 緣愛起彼行 彼愛何因何集何生何轉 彼愛(受)因受集受生受轉.......(觸).......(六入處)"

이라 하여 無明은 감각기관과 부딪혀 생긴 感受作用의 느낌에 대하여 애착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데, 無明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感覺器官을 잘 거두는 것이 수행의 첫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아함에서 세존은 四念處가운데 身念處수행을 통해 비구가 행동 하나 하나에 스스로 잘 관찰하고, 身體도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면서 수행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나쁜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항상 부지런히 삿됨을 제거하는 精進을 통해, 밝은 생각을 하도록 당부한 것을 볼 수 있다.

禪宗에서는 行·住·坐·臥·語·默·動·靜으로 話頭를 놓지 말고 간절히 수행할 것을 권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보인다.

行이 생기는 것은 無明과 愛著으로 생겨남을 보았는데, 行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물질(色)에 대하여 이것은 '나'라고 보거나, '나'라고 본 것을 行이라고 한다"

) 『잡아함경』(대정장2, 14상) "於色見是我 若見我者 是名爲行"
이와 같이 行을 통해 12 緣起가 시작되는데, 禪宗에도 이것과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 祖室스님이 首座에게 물었다.
' 내 말이 들리는가?'
首座가 대답하기를 ' 네, 들립니다.'
祖室스님이 다시 수좌에게 이르기를,
'그럼, 듣는 이것이 무엇인가? 일러보거라'
首座듣고는, '......................................???'"

이상은 논자가 祖室 스님으로부터 '是 甚 ' 話頭를 받은 인연을 설한 것으로, 禪師는 수행자의 병통을 치료하면서 의단을 이끌어 내고 있다. 經典을 안 보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경전을 미리 보았더라면 과연 스스로 깊은 의단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이 전통적인 수행법에는 나름대로의 처방과 방편이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보조국사의 '解悟'와 성철스님의 '頓悟'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간화선을 참구하는 길에는 경전을 통한 '解悟'는 스스로 의단이 깊게 자리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 看話禪 전통에는 처음부터 經典을 보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마음에 한 권의 經典이 있어, 스스로 經句를 채워 나가는 것이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 놓아야, 한 권의 經典을 스스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敎外別傳'이라고 한 것이라 생각이 된다.

2. 愛
愛(Ta h )는 無明과 함께 行(Sa sk ra)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이미 보았다. 중아함에는 愛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定義하고 있다.

"태어남은 有를 因하고, 有를 緣하고, 有를 쫑아 나니 有가 근본이 된다...有는 受(取)를 因하고, 受를 緣하며, 受를 쫑아 나니 受가 근본이 된다...受(取)는 愛를 因하고, 愛를 緣하며, 愛를 쫑아 나니 愛가 근본이 된다... 무엇을 愛라 하는가? 3覺(受)인 樂覺·苦覺·不苦不樂가운데 즐거이 집착하려고 하는 것을 愛라 한다.") 『중아함경』(대정장1, 451중-하) "生者 因有緣有從有而生 以有爲本...有者 因受緣受從受而生 以受爲本...受者 因愛緣愛從愛而生 以愛爲本 云何爲愛...有三覺 樂覺 苦覺 不苦不樂覺 於中樂欲著者 是謂爲愛"

고 하여 감수작용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려는 본능적인 性向을 愛라 하고 있다. 愛를 인하여 取하는 행이 일어나며, 取함이 있으면 有와 태어남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본능적인 집착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무엇이 愛의 習을 있게 하는가? 답하기를(無明)이 習이 된다... 무엇을 無明의 習이라 하는가? (五蓋)가 習이 된다. 무엇을 오개의 습이라 하는가? (三惡行)이 習이 된다...무엇을 삼악행의 습이라 하는가? (모든 감각기관을 보호하지 않는 것)이 習이 된다......(不正念 不正智)......(不正思惟) ......(不信)......(聞 惡法).......(親近 惡知識)......(惡人)") 『중아함경』(대정장1, 487중) "何謂有愛習答曰無明爲習...五蓋...三惡行...不護諸根...不正念不正智.......不正思惟......不信......聞惡法......親近惡知識......惡人"

이라 하여 愛가 생기는 것은 無明이 習이 되어 생겨남을 보이고 있으며, 無明은 끝까지 원인을 추적해 보면 惡人이 최초의 因이 됨을 알 수 있다.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지 언정 어리석은 이와 벗하지 말라'는 법구경의 가르침은, 수행하는 道伴 이나 善知識에 따라서 우리는 生死의 흐름을 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생사에 流轉할 수 도 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무명의 習이 되는 五蓋는 마음의 淸淨함을 덮는 貪欲蓋·瞋 蓋·睡眠蓋·掉悔蓋·疑蓋로서, 禪宗에서는 掉擧와 沈 은 수행도중에 나타나는 번뇌로 계승되며, 나머지 3蓋는 話頭에 대한 疑情으로 통합해 녹여 버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거가 일어나면 마음의 寂寂한 自性의 빛으로 다스리고, 혼침이 오면 마음의 惺惺한 自性의 빛으로 다스리도록 했으니, 그래서 "마음이 부처"이며 "聖人이나 범부가 모두 동일한 眞性이 있다"는 보리달마의 理入論이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五蓋는 해결되었고, 즐거이 집착하려는 본능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雲門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무엇을 부처라 합니까?"
운문이 이르기를,
"마른 똥막대기니라(乾屎 )"
) 이희익 『무문관』, 서울:경서원,1985, p.245.
洞山화상에게 어떤 스님이 묻기를,
"무엇을 부처라 합니까?"
동산이 이르기를,
"마 세근이니라.(麻三斤)"
) 上 同. p.212.

이와 같이 어떠한 感受作用의 결과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病痛을 제거시키는 것이 禪師의 話頭이다. 비록 부처님이라도 예외는 없다. 無明과 執着을 緣하여 生死의 緣起인 行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과연 緣起法을 배우고도 話頭의 疑情이 일어날 수 있을까?..........

話頭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적어도 經典에는 無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解脫道論』에는 善知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세존은 難陀에게 가르치시기를, 일체의 梵行은 이른바 善知識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수승하고 착한 사람을 찾아 좋은 벗으로 삼아라. 어떤 것이 수승한 善知識인가? 이르기를 修多羅, 毘曇, 毘尼를 밝게 요달하여 성취한 것을 얻을 바를 성취한 것이라고 하고, 業種을 밝게 요달한다는 것은 잘 神通을 얻고 四諦를 본 것을 말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사람은 공덕이 성취된 것이라 한다.") 『해탈도론』(대정장32, 408중) "是故 世尊敎於難陀 一切梵行 所謂善知識 是故當覓勝善之人爲朋友 云何是勝善知識 謂有所成就明了修多羅毘曇毘尼 是謂所得成就 明了業種 得善神通得見四諦 此二種人 功德成就"

이라 하여 善知識의 요건으로 三藏을 알고, 修行을 통해 神通과 四諦를 직접 體得한 사람을 들고 있다.

한국불교계는 역사의 흐름 때문인지,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帶妻僧化한 일본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梵行이 선지식'이라고 했듯이, 우리를 거룩한 행으로 이끄는 사람이 선지식이며, 이론과 아울러 실제수행의 얻음이 있는 善知識을 스승으로 찾아야 됨을 보이고 있다.

禪宗의 전통에도 見性한 후에 經典을 열람하여, 다양한 根機를 제접할 수 있는 틀을 갖추는 단계가 있다. 首座는 無知해도 된다는 생각은 자신의 해탈만 추구하는 小乘의 견해로 한국 禪院의 수행자들은 大乘佛敎를 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머물렀을 때, 티벳, 따시종의 成就者 암틴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을 눈 먼 범부들이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습니까?"
암틴(라)는 말씀하기를,
"깨달은 사람은 남을 위해 살고, 범부들은 자신을 위해 산다."

아주 쉽게 우리는 범부와 聖人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다.

한국 불교계가 菩薩行이 적고 利權다툼이 지속되는 것은, 善知識의 不在가 원인으로 보인다. 臺灣의 노스님들께서 달라이라마14세를 親見하기 위해, 노구를 마다 않고 먼길을 떠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善知識의 힘은 주변을 맑히고, 능히 淨化한다. 티벳 스님들은 戒行을 破하면 스스로 옷을 벗는다고 한다. 우선 모두 因果를 믿으며, 알아보는 눈밝은 스승들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을 수 있는 것은 世間의 理致이다. 한국불교는 頓法의 自性淸淨을 믿는 수행자들이므로, 윗물이 탁해도 더 이상 물들지 말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戒行을 철저히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불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位相과 影響力은 그다지 높지 못한 상태이며, 승가의 法力도 시대의 흐름을 主導할 정도는 되지 못하고 있다.

淨化를 통해 法力을 키우든지, 아니면 善知識을 모셔 와서라도 다시 거듭나지 못하면, 한국 불교는 이름만 존재하는 빈 껍데기가 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東南亞나 티벳처럼 어릴 때부터 출가하여 수준 있는 교육을 시키고, 특수한 수행을 시키는 早期 출가제도의 도입도 생각해 보았으면 하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 僧伽도 元曉의 破戒만 흉내내지 말고, 원효의 博識함이나 菩薩行이나 居士로 돌아간 良心을 배웠으면 한다.

3.번뇌의 相
번뇌는 Kle a를 번역한 것으로 惑이라고도 한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밖에 있는 부처에 대한 집착도 버리도록 話頭를 주는 것을 보았다.

지난 해 조계사에서 불교신문이 주최한 '간화선 대토론회'에서 어느 발표자는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면서, "대혜의 간화선은 주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의 공안은 1700종류가 있다고 하지만, 조주의 무자 공안이 기본이 되고 있으며, 대혜의 간화선은 이 공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평론』,봄호. 서울: 불교시대사, 2001 ,p.201

라는 주장을 하여 참가자들을 혼란하게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오류는 실참을 해 보지 못한 禪學者들 사이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西山大師로 알려진 休靜(1520∼1604)은 『禪家龜鑑』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만약 사람이 입에서 잃으면 염화미소가 다 이 敎迹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간의 言細語가 다 이 敎外別傳의 禪旨니라") 西山大師著, 『禪家龜鑑』 서울: 용화선원, 1988. p.34.

라고 하여 화두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에서' 活句'로 받아들이느냐, 즉 疑團이 생겨나느냐에 있지, 어떤 경계나 어떤 말에 話頭의 價値가 매겨지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양산 내원사에는 공양주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 까닭은 근래 선지식이던 香谷 禪師가 그곳에서 공양주를 살다가 見性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물론 수행풍토의 영향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時節因緣이 到來하여 깨달았지 장소에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趙州無字'는 어느 스님이 "개에게도 佛性이 있느냐"는 질문에, 趙州(778∼897)선사가 그 스님의 有無에 대한 分別을 없애주기 위해 無라고 대답한 것으로, 臨濟宗 계통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 話頭이다. 잡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見解를 제시하고 있다.

"일체의 물질(色) 가운데에 과거·미래·현재나, 안·밖이나, 거칠거나·세밀하거나, 모양이 좋은 것이나·추한 것이나, 먼 것이나·가까운 것이나 일체는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서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을 진리대로 아는 것을 正觀이라 한다.") 『잡아함경』(대정장2, 48중) "諸所有色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 若 若細 若好若醜若遠若近 彼一切非我 非異我 不相在 如實知 受想行識 亦復如是"

라고 하여 五蘊에 대하여 '나도 아니고, 나와 다른 것도 아니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여기에서 有無의 分別과 같은 兩邊의 분별을 끊는 話頭의 起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조주무자'는 經典을 읽어 알음알이가 생긴 납자에게 주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아함에는 생각(念)과 欲은 나쁜 것이라는 표현이 보이며, 다양한 번뇌를 끊고, 貪과 집착하는 것도 끊는 것을 中道라고 하는 것이 보이는데, "제현 들이여, 念과 欲은 나쁜 것이며, 나쁜 念과 欲 또한 나쁜 것이다. 그대들이 念과 欲을 끊고, 또한 나쁜 念과 欲도 끊어서, 이와 같이 성냄, 원망, 맺힘, 인색함, 시새움, 허위, 속임, 아첨, 알랑거림, 부끄러움이 없거나, 수치스러움이 없거나, 자신을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깨달았다고 착각하거나, 우쭐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멋대로 하거나, 굳세거나, 존중을 바라거나, 혐오하거나, 다투거나하는 것을 끊고, 제현 들이여, 貪도 나쁘고 집착도 나쁘니 그대들이 탐도 끊고 집착도 끊는 것을 일러 中道라 한다."
)『중아함경』(대정장1, 571상-중)"諸賢念欲 惡 惡念欲 亦惡 彼斷念欲 亦斷惡念欲 如是 怨 結 嫉 欺 諛 諂 無慙 無愧 慢 最上慢 貢高 放逸 豪貴 憎 諍 諸賢 貪亦惡 著亦惡 彼斷貪 亦斷著 諸賢 是謂 中道"
라고 하여 생각(念)이나 欲도 나쁘며 , 일체 번뇌와 貪과 집착도 나쁜 것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無念, 無欲, 번뇌가 없는 것, 無貪, 無執着은 좋은 것이 될 것이다.

해탈도론에는 道에 장애가 되는 34가지 法을 보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忿·惱·覆·熱· ·嫉·幻·諂·恨·競·慢·增上慢·傲慢·放逸·懶惰·貪欲·不知足·不從智·不正念·惡口·惡友·惡智·惡見·不忍·不信·無 ·無愧·營身口味·狎俗·親近女人·不敬師學·不攝諸根·於食不節·初夜後夜墮不禪誦") 『해탈도론』(대정장32, 401중)

여기에서 忿은 분노, 惱는 마음이 번거롭고 소란한 것, 覆는 자신의 잘못을 덮어 감추고 고백해서 뉘우치지 않는 것, 熱은 멸시로 번뇌하는 것, 은 인색한 것, 嫉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새움하는 것, 幻은 미혹한 것, 諂은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순종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 恨은 敵意를 계속 품는 것, 競은 경쟁하며 다투는 것, 慢은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 增上慢은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 傲慢은 교만한 것, 放逸은 욕망을 다스리지 않고 멋대로 하는 것, 懶惰는 게으르고 느린 것, 貪欲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 내어 집착하는 것, 不知足은 음식, 의약과 행·주·좌·와에 만족한 줄 모르는 것, 不從智는 事象·道理에 대해 분명하게 是·非·邪·正을 모르고 번뇌를 끊지 못하는 것, 不正念은 四念處가 없는 것, 惡口는 거친 말, 惡友는 緣起를 일으키게 하는 벗, 惡智는 善하지 않은智, 惡見은 無常·苦·無我을 모르는 견해, 不忍은 行의 전개를 일으키는 것, 不信은 三寶와 自性을 믿지 않는 것, 無 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 無愧는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 것, 營身口味는 몸과 입의 맛에 맡기는 것, 狎俗은 세속과 가까이 하는 것, 親近女人은 여인과 가까이 하는 것, 不敬師學은 스승의 가르침을 존경하지 않는 것, 不攝諸根은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지 않는 것, 於食不節은 먹는데 節度가 없는 것, 初夜後夜墮不禪誦은 초저녁과 늦은 밤에 禪誦을 하지 않는 것이다.

大乘불교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煩惱하는 相도 모르면서, 空을 말하고 無碍法界를 말하는 것은 단계적인 敎學體系가 결여되어 생긴 병통으로 보인다.

육조단경에는 '無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무엇을 無念이라 하는가? 일체 法을 보더라도 마음이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무념이라 한다. 작용하면 일체 처에 두루 하되, 일체 처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하여, 六識으로 하여금 여섯 문을 나가게 하지만, 六塵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가는 것에 자재하며, 통용하는데 막힘이 없는 것, 곧 이것이 般若三昧이며 自在解脫이니 無念行이라 한다.") 정병조 역해 『六祖壇經』 서울:한국불교연구원 1996, p.66

이상과 같이 다양한 번뇌는 禪宗에서 마음이 물듦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요약되며, 이것은 본래의 마음을 깨끗한 상태로 두면서 六根이 작용은 하지만, 더 이상 行의 전개는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無記空에 빠져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돈오입도요문론에는 "마음이 다만 일체처에 머물지 않는 것(不住)을 부처님의 마음") 법성 연의, 『돈오입도요문론』. 서울: 큰수레 총서4, 1993, p.108.

이라 하고 있는데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看話禪에서 모든 번뇌를 話頭 一念으로 녹이고, 도중에 일어나는 번뇌는 自性의 智慧인 惺惺과 寂寂으로 다스리다가, 一念마저 나지 않음을 本來의 淸淨한 自性을 본다고 하며 見性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Ⅱ.깨달음의 因

1.菩提心
보리심(Bodhi-citta)은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후에 그 뜻이 확장되어 깨달은 마음이라는 결과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게 되지만, 원래의 의미는 깨달음을 성취하여 해탈하려는 원인의 마음이다.

인도인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네 가지 가운데 재산, 욕망, 의무, 해탈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인생 자체가 그들에겐 수행이며, 날마다 일상의 생활 속에 종교가 하나가 되어, 삶이 영위 되고 있다.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삶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비록 산업화가 안되어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가지만, 고요하고 思惟的이며 경건한 모습은 현대화에 급급한 나머지 생태계까지 파괴하며 각박하게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말없는 설법을 주고 있다.

한국 불교에는 과연 얼마나 解脫을 추구하는 佛子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出家자들은 資本主義에 물들어 살림집을 차리고 한 명씩 살고 있고, 在家자들은 부처님과 함께 事業을 벌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 僧伽라는 개념조차도 희미해질 위기에 있다.

당연한 결과로 승가는 求心點을 상실했고, 재가는 歸依하는 자세를 잃어 버렸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불교의 存廢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벌써 자신들의 자리를 상실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준비가 안된 자들에게 어떻게 해탈이 찾아오겠는가. 중아함에는 願을 발하는 것이 묘사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村의 가난한 자는 촌의 부자가 되길 바라고, 촌의 부자는 邑의 가장부자가 되길 바라며,읍의 부자는 城의 가장 부자가 되길 바라며, 성의 부자는 城의 宗正이 되길 바라고, 성의 종정은 國相이 되길 바라고, 국상은 小王이 되길 바라고, 소왕은 轉輪王이 되길 바라고, 전륜왕은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리고 집 없이 도를 배운다.") 『중아함경』(대정장1, 482상)

고 하여 물질적인 욕망과 세속의 지위와 권력을 성취하여, 더 이상 世俗에서 추구하는 것이 없을 때 출가하여 도를 배운다는 것으로, 21세기에 서양인 佛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한국 佛子들은 욕망의 展開過程에 있는지, 모두 버리고 해탈을 구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가귀감에는, "어떤 도적이 나의 의복으로 僞裝하고, 如來를 팔아 가지가지 業을 짓느냐?") 앞의 책, p.139.

한국 불교의 再生을 위해서는 소규모로 벌려진 절 살림을 統合하고, 중앙에서 모든 제도를 관리하여, 출가자들은 수행과 傳法에 전념하게 하고, 三寶財産은 중앙으로 모아져 관리하여, 학교나 포교사찰을 대규모로 짓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多宗敎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승가의 나눔의 精神과 傳法과 位相과 規模가 수준 높게 再生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行의 그침
生死의 展開는 12緣起가운데 行이 발생하는데 있다. 반대로 생사 해탈하려면 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보리심이 수행의 씨앗이라면, 수행의 시작은 行이 그치도록 하는데 있다. 앞에서 이미 行은 無明이 愛를 내고, 愛를 緣하여 생겨남을 보았다. 또한 色蘊을 나라고 보거나 나라고 본 것을 行이라는 표현도 보았다. 결국 매 순간마다 우리가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진리대로 보고 생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눈뜨고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에는 色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에 걸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니며(非我),나의 대상도 아니라고(非我所) 보는 것을 바르게 보는 것) 『잡아함경』(대정장2, 15상)

이라고 하고 있다. 중아함에는 모든 行은 無常하며, 興衰하는 법이며, 無欲해야 하며, 버리고 떠나야하며, 멸해야 하며, 끊어야 한다고 觀할 것) 『중아함경』(대정장1, 621하)

을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에는 시간과 공간에 걸쳐 五蘊에 대하여 일체는 내가 아니며,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서로 있는 것도 아니라고 아는 것을 正慧라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여, 기억을 일으켜 구하고 覺을 따르고 觀을 따르는 일체도 내가 아니고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서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라 아는 것을 正慧) 『잡아함경』(대정장2, pp.42하-43상)

라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行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아함에서는 '나'라는 생각을 일으켜 물들이지 말며, 無常하고 멸하는 법이라 생각하여,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無常한 것 가운데 나라고 보는 것은, 실제로 모두 과거의 相이다. 따라서 내가 아니며 나의 대상도 아니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매 순간마다 착각을 일으키고 살아도, 그 바탕은 비고 청정하므로 모든 相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을 自性淸淨이라고 한 것이라고 보인다. 無常한 것에 대하여 내는 일체의 念은 모두 과거의 찌꺼기이다. 그래서 念을 내지 말고, 本體의 淸淨함으로 다만 비추기만 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아함에서는 수행해야 할 다양한 相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보였는데,) 앞의 책, p.60."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 無着 不起 妄 用自眞如性 以智慧 觀照 於一切法 不取 不捨 卽是見性 成佛道" 

지엽적이고 결과적인 것을 보였다면, 禪宗에서는 本體의 無邊함과 淸淨함을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육조단경에는 自性을 본 것에 대해 설해지고 있는데, "이 법을 깨달은 자는 바로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어서, 속거나 망념됨도 일으키지 않고, 스스로 眞如의 自性을 사용하여, 智慧로써 觀照하여 일체 법에 取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아서, 바로 自性을 보아 佛道를 이룬다."
) 앞의 책, p.60." 

自性을 보았다는 것은 無常한 일체에 대해 더 이상 속지 않고, 어떠한 行의 緣起도 발생시키지 않으며, 다만 自性의 지혜로써 비추기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無常한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行이며, 行을 그치면 見性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수행하는 것일까? 禪要에는, "다만 일체 처에 놓아서 하여금 얼음처럼 차게 하며, 마음을 평탄하게 하며, 티 한점 없게 하며, 일념이 영원히 지속하게 하여, 시체를 지키는 귀신과 같이 하여, 지켜오고 지켜감에 의심덩어리가 별안간 탁하고 터지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게 하리니, 힘쓰고 힘쓸지니라.")통광 역주,『高峰和尙禪要·語錄』, 서울:불광출판부, 1993. p.56. "但只要一切處에 放敎冷氷氷地去하며 平妥妥地去하며 純淸絶點去하며 一念萬年去하야 如箇守屍鬼子하야 守來守去에 疑團子 然 爆地一聲하면 管取驚天動地하리니 勉之勉之어다."

라고 하여 話頭 一念으로 動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맑게 하여 혼침이 없게 하며, 꾸준히 하며, 묵묵히 하여, 놓지 않으면 견성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결국 行을 그친다는 것은 不動의 마음을 써서, 바로 견성 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3. 念으로 다스림
수행의 목표는 無念이 되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누구나 쉽게 無念이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수행은 엄밀히 말하면 念으로 다스리는 행위이다. 아무리 本體를 몰록 본다고 해도 그것은 눈밝은 선지식의 가르침이 있어야 가능하고, 時節인연이 到來하거나 수행자의 根機가 성숙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왜 모든 수행은 念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까? 중아함에는,
"제현 들이여, 눈(眼이) 대상(色)을 緣하여 眼識을 낸다. 세 가지가 함께 만나면 문득 更觸이 있게된다. 更觸을 緣하여 문득 느끼는(覺<受>) 바가 있다. 느끼는 바가 있으면 곧 이 表象(想)이 있고, 表象 하는 바가 있으면 곧 意志(思<行>)가 있으며, 意志하는 바가 있으면 문득 憶念(念)이 있으며, 憶念하는 바가 있으면 곧 分別이 있다. 비구는 이러한 憶念을 因하여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意志(思<行>)와 表象(想)을 수습한다.") 『중아함경』(대정장1,604중) "諸賢 緣眼及色 生眼識 三事共會 便有更觸 緣更觸 便有所覺 若所覺 便想 若所想 便思 若所思 便念 若所念 便分別 比丘者 因是念 出家學道 思想修習"

고 하여 비구가 출가하여 수행하는 목적은 念을 인하여 思<行>와 想을 수습하는데 있을 보이고 있다. 즉 憶念하여 잊지 않고 思<行>와 想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고 있다. 念과 思<行>의 관계를 중아함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念은 思<行>를 因하고, 思를 緣하며, 思를 따라 난다. 思를 말미암아 존재하고, 思가 없으면 念이 존재하지 않는다. 念을 말미암아 欲이 있게 되고, 欲을 말미암아 愛와 不愛가 있게 되고, 愛와 不愛를 말미암아 인색함과 시기( 嫉)가 있고, 인색함과 시기를 말미암아 칼과 막대기로 투쟁하며 미워하고 질투함이 있고,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질이 있어 마음에 무량한 惡과 善하지 않은 法이 생겨, 이와 같이 여기에 큰 고통의 덩어리가 난다. 만약 念이 없으면 欲이 없고, 欲이 없으면 愛와 不愛가 없고,........") 『중아함경』(대정장1, 635중-하) "念者 因思 緣思 從思 而生 由思故有 若無思則 無有念 有念故有欲 有欲故有愛不愛 有愛不愛故有 嫉 有 嫉故有刀杖鬪爭憎嫉...若無思者則 無有念 若無念者則 無有欲........"

라고 하여 思→念→欲→愛·不愛→ 嫉→싸움 등 모든 惡行이 생겨남의 차례를 보이고 있다.
念을 다스리면 思<行>가 전개됨을 막을 수 있고, 欲으로 因하여 생기는 모든 惡行이 그칠 수 있기 때문에 수행하는데는 念이 가장 근본이 됨을 알 수 있다.

아함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행은 四念處 수행이다. 四念處 수행이 나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念으로써 삿된 業을 끊고 바른業을 성취하는 것 이것을 正念이라 한다"
) 『중아함경』(대정장1, 736상) "以念 斷於邪業 成就正業 是謂正念"
2) "무엇을 正念이라 하는가? 비구가 안의 몸을 몸과 같이 觀하고, 내지 覺<受>·心·法 도 法과 같이 觀하는 것을 正念이라 한다."
) 『중아함경』(대정장1, 736중) "云何正念 比丘者 觀內身如身 觀至覺心法如法 是爲正念"
3) "만약 잘 마음이 하나 됨을 얻으면 이것을 定이라 한다. 四念處 이것을 定相이라 한다 ."
) 『중아함경』(대정장1, 788하) "若 善 心得一者 是謂定也 四念處 是謂定相也"
라고 하여 正念은 삿된 業을 끊고 바른 業을 成就하는 것이며, 四念處는 正念이며 定相에
속함을 보이고 있다.

이상과 같이 念은 欲과 愛着을 다스려 惡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12緣起의 行(思)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수행에 있어 念이 가장 근본이 되며, 正念은 四念處이며, 四念處는 定相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話頭의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잊지 않고, 잘못된 業을 다스리느냐 못 다스리느냐에 따라 성취가 있지, 수행 法에 優劣이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高峰화상의 禪要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곧바로 모름지기 正念을 굳게 뭉쳐, 깨달음으로서 법칙을 삼을 지니라."
) 앞의 책. p.59."直須堅凝正念하야 以悟爲則이어다."


Ⅲ.깨달음의 緣

1.信
불교에서의 믿음은 무조건적 믿음이 아니다. 아함경에서 세존은 상대방의 마음이 유연해지고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상대방이 法을 請함에 應해서 說法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청법자는 법을 듣기 전에 三歸依와 五戒 지킬 것을 스스로 誓願하고 법을 듣는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이 재가불자 들에게 三歸依를 반복하여 念誦시키는 것도 중요한 수행가운데 하나이다. 수행자와 불자가 함께 삼귀의를 念誦하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誓願을 다짐하는 것도 수행이다. 남방불교는 굳이 금생에 깨닫기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출가 수행자는 검소하고 욕심이 없으며 순수해 보이고, 비록 頓法을 모르지만 재가불자는 自性이 청정해 보이며, 지극한 信心을 가지고 佛事와 善行에 全力하고, 三寶를 恭敬하며 겸손하다. 남방에 있다가 한국에 오면 위기의식을 가질 때가 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이 땅은 여전히 승가의 位相이 땅에 떨어져 있음을 體感하는 것이다. 모든 책임은 우선 승가에 있겠지만, 재가자 들도 너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三寶淨財를 재가자 들이 맡아 관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동남아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승려들에게 한국인처럼 대하는 태도를 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이 땅에서 승려들은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현상은 재가불자에게나 출가수행자에게나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三寶에 대한 不信으로는 자신도 향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아함에는 戒를 지킬 수 있는 원인이 三寶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됨을 보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듣지 못한 것을 문득 듣고, 듣고 나서는 이롭다는 생각을 냄→善知識을 받들어 모심→친견하러감→좋은 법을 들음→귀의 界가 형성됨→法의 뜻을 觀함→法을 받아 지님→法의 진리(忍)를 觀함→믿음이 생김→바르게 思惟함→바른 念과 智가 생김→感覺器官을 보호함→戒를 보호함"
) 『중아함경』(대정장1, 490중)

이와 같이 불교에서의 믿음은 본인이 직접 法을 듣고, 法에 대해 뜻과 진리를 觀하고 나서 스스로 생겨나는 믿음이며, 믿음의 因은 善知識에게 있고. 믿음의 緣은 法을 듣는 데 있고, 믿음의 果는 자신의 선택에 있다. 선지식과 법을 선택한 사람은 바르게 思惟하게 되고, 바른 念과 智가 생겨나 감각기관을 보호하게 되고, 戒를 지키게 됨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三寶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佛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논자도 한때 僧寶에 대한 믿음에 대해 懷疑를 한 적이 있는 데, 달라이라마14세의 법문을 듣고 다시는 僧寶에 대한 비난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법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三寶 가운데 佛寶와 法寶는 믿을 수 있지만, 僧寶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부처님을 비방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 在世時에는 부처님도 僧伽의 一員이었기 때문이다."
해탈도론에는 믿음과 戒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계는 몇 가지가 있는가? 이르기를 2·3·4 種이 있다. 어떤 것이 2종인가? 이르기를 性戒와 制戒이다. 몸과 입으로 행하는 바를 부처님이 끊고 행하지 말라고 한 것을 性戒라 한다. 몸과 입으로 행해도 되는 것을 부처님이 끊고 행하지 말라고 한 것을 制戒라 한다. 性戒는 信精進으로 능히 하여금 具足하게 하고, 制戒는 信念持로서 능히 하여금 具足하게 한다.") 『해탈도론』(대정장32, 401중) "戒 有幾種者 謂有二種 三種 四種 云何二種 謂性戒 制戒 以身口所行 佛斷不行 是名性戒 身口可行 佛斷不行 是名制戒 性戒 以信精進 能令具足 制戒 以信念持 能令具足"

이와 같이 殺生戒나 偸盜戒처럼 性向이 罪惡인 것을 性戒라하고, 이것은 信精進으로 다스려 악행을 끊고, 飮酒戒 같이 行해도 되는 것은 信念持로써 다스려 六齋日등에 잊지 않고 실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禪宗에서는 善知識과 自性淸淨을 믿어야 하는 데, 설사 한때 오염되었더라도 우리의 眞如自性은 부처님과 同一한 참다운 性品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의 지나간 行을 기억해서 스스로 緣起를 일으키지 말고, 사람들의 본래 淸淨한 自性을 보고 그 自性만을 믿으면, 만나는 인연마다 모두 선지식이며 모두 청정한 본래 부처님이 될 것이다.

2.三學
戒·定·慧學의 三學은 처음부터 정비되어 있던 것은 아니고, 뒤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아함에서 계학은 五戒를 받아 지니는 것, 정학은 四禪定까지 수행하는 것, 혜학은 四聖諦를 觀하는 정도로 단순한 모습을 보이다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무엇을 增上戒學이라 하는가? 비구가 波羅提木叉, 律儀, 威儀를 行處에 住하여 具足하게 하고, 작은 죄를 보면 두려움을 내는 것을, 戒를 받아 지니고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增上意學(定學)이라 하는가? 비구가 欲惡不善法을 여의고 내지 四禪에 具足하게 住하는 것이다. 무엇을 增上慧學이라 하는가? 苦聖諦를 여실하게 알고 集·滅·道聖諦를 여실하게 아는 것을 增上慧學이라 한다.") 『잡아함경』(대정장2, 210상-중)

라고 하여 戒學에 律儀까지 포함시켜 보다 더 확장된 면을 보인다. 바라제목차는 Pr timok a를 음역한 것으로 戒本이라고도 하며, 보름마다 布薩할 때 出家者들이 교단의 禁止條令을 읽으면서, 잘못된 점은 發露懺悔하여 身과 口의 허물을 막고, 점차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가자는 六齋日(8·14·15·23·29·30)에 八齋戒를 받는 것을 포살 이라고 한다.

종교를 가지는 사람들은 戒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 계를 얼마나 지켜 나가느냐에 그종교의 생명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도 戒行을 통해 재가자들은 출가자를 존중해 주고 佛事를 기꺼이 해왔고, 출가자들은 修行에 전념하여 자신들의 깨달음으로 지도하여, 재가자 들에게 정신적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불교는 주로 禪房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布薩제도를 모든 사찰로 부활시켜야 한다.
四禪은 수행법이 아니고, 수행의 단계이다. 제4선에서는 不動心을 얻어 호흡도 끊어지는 경지를 말한다.

慧學은 엄밀히 말해서 학이 아니고 닦아 가는 과정이다. 아함에서 慧學은 定學다음에 수행되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데, 참다운 慧는 定에 들어 마음이 한 경계가 된 三昧의 상태가 되었을 때, 業識이 녹아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는 如實知見이 생겨난다. 그러나 여실지견이 났다고 수행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자신이 잠깐동안 보았던 그 知見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는 것이 혜학 이다. 혜학을 통해 미세한 번뇌를 제거하면서 나머지 번뇌를 모두 제거시키는 과정이다.

아함에는 3學과 4果를 배대한 것이 보이는데, 증상계학을 수행하면 身見·戒取·疑結의 三結을 끊고 須陀洹을 얻고, 惡趣에 떨어지지 않고, 결정코 바르게 깨달음에 나아가며, 증상정학을 수행하면 五下分結(3結+貪欲,瞋 )을 끊고, 生般涅槃과 阿那含을 얻어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고, 증상혜학을 수행하면 欲有漏心解脫, 有有漏心解脫, 無明有漏心解脫을 얻어, 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 『잡아함경』(대정장2, 211상)

해탈도론에는 8正道를 三學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戒陰에는 正語, 正業, 正命을, 定陰에는 正精進, 正念, 正定을, 慧陰에는 正見, 正思惟을 넣어 분류하기도 한다.) 『해탈도론』(대정장32, 400상)

해탈도론에도 戒로서 惡趣를 除하고, 定으로 欲界를 除하고, 慧로서 一切有를 除하며, 戒를 많이 수행하고 定과 慧를 적게(少) 수행하면 阿那含을 이루고,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하게(滿) 수행하면 阿羅漢의 無上解脫을 이룬다) 『해탈도론』(대정장32, 400중)

고 하여, 阿那含의 위치는 아직 定·慧가 一體가 되지 않은 지위임을 보이고 있다.

돈오입도요문론에는 三學을 고르게 쓴다는 표현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청정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戒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아서 대상을 대해도 고요한 것이 定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줄 알 때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고, 마음이 청정할 때 청정하다는 생각도 내지 않아, 善·惡을 다 능히 분별함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 물들지 않고 自在함을 얻은 것을 慧라 한다. 만약 계·정·혜를 알고 體를 함께 가히 얻을 수 없을 때, 곧 분별이 없는 것이, 곧 一體와 같은 이것을 三學을 고루 쓴다고 하는 것이다") 앞의 책,p.105. "淸淨無染是戒 知心不動 對境寂然 是定 知心不動時 不生不動想 知心淸淨時 不生淸淨想 乃至善惡皆能分別 於中無染 得自在者 是名爲慧也 若知戒定慧 體俱不可得時 卽無分別者 卽同一體 是名三學等用"

라고 하여 慧學이 성취되어 분별이 없어졌을 때, 한 몸이 되어 三學을 고루 쓸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육조단경에는 心地三學이 설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바탕에 그릇됨(非)이 없는 것이 自性戒이고,
마음바탕에 어리석음(痴)이 없는 것이 自性慧이며,
마음바탕에 어지러움(亂)이 없는 것이 自性定이다.") 앞의 책, p.141.

또한 육조단경에는 定을 體, 慧를 用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定慧는 一體이며 같다(等)고 하여, 다르다거나 무엇이 먼저라는 견해를 내지 말라) 앞의 책, p.81.
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해석은 달라져도, 분명한 것은 慧學까지 성취되어야 定·慧가 一體가 되며, 禪宗에서는 완성된 상태의 가르침을 곧 바로 주어 漸次法을 취하고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3.止觀
요즈음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류 가운데 하나가 止觀에 대한 해석이다. 止觀은 三學 가운데 定慧와 일치하는 말이다. 定慧에도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定慧도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수행 법으로서의 定慧가 있고, 수행해서 얻어진 상태로서의 定慧가 있다.

止觀도 마찬가지로 止觀을 수행하는 법의 종류로서의 止觀이 있고, 止가 성취되어 觀이 이루어진 상태로서의 止觀이 있다. 예를 들면, 四聖諦를 觀할 때 아직 체득하지는 못했지만 諸行은 苦라고 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觀의 수행이 되고, 만약 수행을 통하여 業識으로 살아온 자신의 고단한 모습이 직접 體得되면 觀의 狀態가 된다.

따라서 止觀이 一體가 되는 상태는 定慧가 一體가 되는 상태와 같다. 아함에는 다양한 수행이 나열되어 있는 것 같지만, 四禪의 狀態를 얻기 전의 수행 법은 四念處와 七覺支가 기본이 되고, 四禪의 단계를 얻은 이후에는, 마음을 平靜한 상태로 지속시키기 위하여, 四無量心과 四聖諦觀 수행이 전부라고도 볼 수 있다. 더러 四無色定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사무색정도 마음의 상태이지, 수행 法은 아니다.

잡아함에는 無常의불(無常火)을 끄게 하기 위하여 제시된 수행항목 가운데 매우 단계적인 行法이 보이는 데 그 차례는 다음과 같다. 大師를 求함―身念處를 內外로 觀함―四正勤―欲定―信根―信力―念覺分―正見―苦習盡道 ―無貪法句―止―觀―止觀) 『잡아함경』(대정장2, pp.46상-48하)

이라 하여 止→觀→止觀의 차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처음에 스승을 구하고, 惡을 제거하고 善을 증장시키고, 四禪定을 닦고, 三寶와 四聖諦를 믿고, 障碍를 신심으로 없애고, 定과 慧를 한결같이 하고, 四聖諦등 眞理에 대해 是認하고, 四聖諦가 자기 것이 되고, 강을 건넜으므로 배도 버리고, 마음이 거울같이 고요하고, 거울에 사물이 제대로 비치며, 항상 밝게 비춘다고 보면, 지관은 매우 높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탈도론에서는 37行處를 毘婆舍那(觀)의 緣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0 一切入―地·水·火·풍·靑·黃·赤·白·空處·識處 의 一切入.
10 不淨想
10 念―佛·法·僧·戒·施·天·死·身·數息·寂寂의 念.
四 無量心(慈悲喜捨), 觀 四大, 食 不淨想, 無所有處
) 『해탈도론』(대정장32, 411상-중).

이라 하여 非想非非想處를 제외하고는 모두 觀의 緣으로 보고 있는데, 非想非非想處는 想受滅定을 일으키는 緣으로 보아, 止의 緣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잡아함에는 止觀 二法을 닦으면, 種種界를 알고 滅盡定까지 얻을 수 있음을 보이는 곳) 『잡아함경』(대정장2, 247중)

도 있다. 또한 지관을 함께 닦는다는 표현도 보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止를 수습하면 마침내 觀이 이루어집니다. 觀을 수습하고 나면 또한 止를 이룹니다. 성스러운 제자여, 止觀을 함께 수습하면, 모든 解脫界를 얻습니다....어떤 것이 모든 해탈계입니까?...斷界·無欲界·滅界를 모든 해탈계라 합니다.") 『잡아함경』(대정장2, 118중)"修習於止 終成於觀 修習觀已 亦成於止 謂聖弟子 止觀俱修 得諸解脫界...斷界, 無欲界, 滅界"

이라 하여 止를 통해 觀이 성립하고, 觀이 수행되면 止가 저절로 갖추어져, 止觀이 동시에 일어남을 설하고 있고, 界에서 해탈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그 밖에 滅正受에 들어 갈 때, 두 法에서 止를 써 觀한다는 표현도 보이고 있다.) 『잡아함경』(대정장2, 150하)"比丘 入滅正受者 作於二法 止以觀"

해탈도론에는 五蓋 가운데 疑蓋는 奢摩他難, 毘婆舍那難이라) 『해탈도론』(대정장32, 416중)

는 표현도 보이고, 마음에 奢摩他相을 얻으므로 장애하는 마음이 달아난다) 『해탈도론』(대정장32, 417상)

는 묘사도 보이고 있다.

이상을 통해 보면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말도 있듯이, 대부분의 修行 法은 觀法에 속하고, 오로지 非想非非想處만 止法이 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성취되는 相은 觀의 相이 먼저 일어나며, 觀相이 성취되면 止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止觀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고, 수행도중의 狀態도 止와 觀으로 자유롭게 언급됨을 알 수 있다.

滅盡定에서 止觀은 一體가 되는 것도 알 수 있다.

선어록에는 止는 寂으로 보이고, 觀은 照로 표기되어 나타나는데,

"等覺의 地位에 있어서는 照寂慧라 이름하나니, 生滅動相을 離脫하지 못한 緣故요, 妙覺의 佛地에 이르러서야 寂照慧라 이름하나니 벌써 제 9識에 돌아가서 究竟으로 寂靜한 연고니라."
) 退翁 性徹著, 『禪門正路』 해인총림, 1981, p.151

이라 하여 금강삼매경론을 인용해서 설해져 있는데, 寂照慧라는 것은 止→觀(照寂의 相)→觀止(寂照의 相)에서 후자임을 알 수 있는데, 觀이 성취된 후 止도 이루어져서, 그곳에서 나오는 止觀의 빛이라고 생각된다.

Ⅳ.깨달음의 과정

1.수행의 단계

수행의 첫 단계는 선지식을 만나 믿음이 생기고, 감각기관을 거두어 들여 戒를 지킬 因이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됨을 보았다.

아함을 보다 보면 四念處와 같이 구체적인 수행 법이 제시된 것이 있는가 하면, 四禪定이나 四無色定, 定慧, 止觀, 解脫, 神通과 같이 수행의 성취단계를 나타내는 용어도 있다.
四禪 다음에는 不動心이 되고, 神通이 따르며, 진리에 대해 觀을 수행한 뒤, 解脫하는 단계를 보인다.) 『중아함경』(대정장1, 730상-하)

四禪 다음에 四無量心이 오고, 다음에 四無色定이 오는 경우) 上同. p.703상-하.

도 보이고, 四念處 다음에 四無量心이 오거나) 上同, p.544상.

, 四念處 다음에 七覺意가 오는 경우) 上同, p.724중.

도 있다.

이것은 四禪가운데 제 4禪에서 평등하고 고요한 捨(Upek )念을 성취하고도 지속적으로 四無量心의 捨無量心을 수행하거나, 七覺意의 捨覺意수행을 통해 捨念을 지속적으로 强化하는 수행으로 보인다.또한 신통을 얻은 후에도 四諦를 觀하는 것) 上同, p.724, 중.

이 설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無意識의 미세한 번뇌를 완전히 제거해야 해탈에 이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禪宗에도 見性한 後에 保任을 하는 단계가 있는데,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아함에는 니사단을 깔고 結跏趺坐하여 좌선에 들어가기 전에, 三業과 命行이 청정해야 할 ) 『중아함경』(대정장1, 724중)

이 보이며, 四念處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五蓋를 끊는 것
) 上同, p.724 중.이 설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처음 發心하면 10萬 拜의 절 수행을 시키지만, 외국에서도 20萬 拜의 절을 마쳐야 수행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가 보편화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수행은 愧부터 시작하여 지난날 자신이 살아온 것에 대한 反省과 是認에서 시작한다.

요즈음 일부 불교학자들이나 불교계에 종사하는 불자가운데에서, 三寶비방을 대수롭지 않게 하거나, 거짓말을 태연하게 얼굴빛 하나 動하지 않고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남의 앞에서 불교를 대표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知性이나 道德的으로 뛰어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5 戒라도 지켜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된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더욱 혼란스럽고, 獅子몸 안에서 생긴 벌레가 獅子를 파먹듯이, 불자들이 三寶를 비방하면 불교는 自滅하게 된다.

아함에서 구체적인 수행단계는 대부분 일치하여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 愧 愛恭敬 信 正思惟 正念正智 護根 護戒 不悔 歡悅 喜 止 樂 定 見如實知如眞 厭 無欲 解脫 涅槃"
) 『중아함경』(대정장1, 486상)

여기에서 定은 마음이 한 경계로 되는 三昧의 상태이고, 수행 법을 나타내는 定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삼매에 들면 知見이 생겨 實相을 잠깐 보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아서, 세간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낸 것이 厭이고, 싫어하면 더 이상 욕심이 없게 된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해탈하고 열반에 들게 됨을 보이고 있다.

佛子가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는 것은 아직 삼매에도 들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보이는 일이다. 삼계에서 해탈한 사람이면 이 세간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또한 아함에는 四念處 안에 四禪이 포함되고 있는 것도 보이고 있는데, 身念處 가운데 呼吸觀, 四禪, 光明想, 不淨觀, 6界(地·水·火·風· 空·識)에 대한 觀) 『중아함경』(대정장1, 582상-하)
이 나타나기도 한다.

해탈도론에는 光明想으로 睡眠을 끊는다) 『해탈도론』(대정장32, 400하)

는 표현도 보이고 있는데, 졸음이 올 때 대치하는 수행법으로 생각된다. 이함에서 가장 대표적인 수행은 呼吸觀으로 나타나는데 身念處의 수행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있다.
禪宗에서는 깊게 호흡을 하면서, 話頭를 가지고 疑團을 통해 一念을 만들어 간다.

2. 현상의 단계
아함에서는 四禪의 수행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시길 初禪을 바로 받을 때에 言語가 寂滅해진다.
제 2禪을 바로 받을 때에 覺·觀이 적멸해진다.
제 3禪을 바로 받을 때에 喜心이 적멸해진다.
제 4禪을 바로 받을 때에 出·入息이 적멸해진다."
) 『잡아함경』(대정장2, 121상-중)

라고 하여 제 4禪에 들면 憂·喜, 苦·樂, 尋(覺)·伺(觀), 出息·入息의 선정을 방해하는 八災患이 소멸함을 보이고 있다. 또한 四禪이 성취되면 不動心을 얻는 것이 아함에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초선을 離生 喜·樂地, 제 2선을 定生 喜·樂地, 제 3선을 離喜 妙樂地, 제 4선을 捨念 淸淨地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이상을 보면 覺(尋), 觀(伺), 喜, 樂, 捨의 표현이 보이는데, 먼저 覺·觀의 의미를 살펴보면,
"有覺有觀故 則口語 是故 有覺有觀 是口行") 『잡아함경』(대정장2, 150중-하)

이라 하여 覺觀은 口語라하고, 口行이라하는데 그러면 言語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成唯識論에는 마음이 意言의 경계에 의해 거칠게 轉해 가는 것을 尋이라 하고, 伺는 意言의 경계에 의하여 미세하게 轉해 가는 것을 性으로 삼는다는 표현도 보이고 있다) 『성유식론』(대정장31, 35하-36상)

곧 모든 부처님과 한 가지로 같아지네.
우리 祖師는 오직 이러한 頓法을 전했으니, 널리 원하건대 自性을 보아 一體가 되도록 하라."
) 『육조단경』 앞의책, pp.102-103.

2.神通
아함에는 세존뿐만 아니라 가섭과 아나율등 제자들까지도 모두 신통을 보이고 있다. 신통과 깨달음은 모두 방일하지 않는데서 나올 수 있다) 『잡아함경』(대정장2, 151하)

고 경전에는 보이고 있다.

韓國禪에는 禪宗이 발달해서 自性의 神通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神通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지만, 수행 중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아함에서 神通은 대개 아나함을 얻은 후에 열거) 『잡아함경」(대정장2, 247중)

되고 있는데, 중아함에서는 3明인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이 아나함 이후 不動心을 얻은 다음에 차례대로 얻어지는 것) 『중아함경』(대정장1, 747하)

으로 보이고 있다.

아함에서 阿那含은 四禪이나 四念處, 四無量心 또는 四無色定과 四如意足다음에 얻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결같이 마음이 平靜해져서 그러한 平靜된 마음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얻어지는 것을 보이고 있다.

法界는 차별이 없어서 모두 털어 버린 자에게만 모든 능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잡아함에서 漏盡智는 四聖諦를 진리대로 알고 보아, 欲有漏, 有有漏, 無明漏心에서 해탈하여, 해탈한 줄 알고 나의 生이 다하고, 梵行이 이미 서고 할 바를 이미 지어 後有받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는 것을 漏盡智를 證得하는 것이라고 하여, 神通가운데 가장 늦게 얻어짐을 보이고 있다.


한 독일 여성이 인도에서 요가를 배웠는데, 그 스승은 神通이 있어서 처음에 무척 존경하고 가르침대로 잘 따라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스승은 여인을 끊지 못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후 이 여성은 한국에 와서 禪院 이곳 저곳을 다녀 보았는데, 한국의 禪師들은 신통은 보지 못했지만 더 존경이 간다고 하며, 인사동에서 발우를 사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현상을 자재하는 신통은 禪定을 성취하면 얻을 수 있지만,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는 漏盡通은 不動心 이상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佛子는 生死解脫이 목적이므로 神通에 惑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不動心에서 얻어 지는 신통은 三明이다. 三明 가운데 宿命通은 사람들의 과거의 삶을 모두 기억하는 신통이며, 天眼通은 미래의 일이 미리 보이는 신통이며, 漏盡通는 天眼通 다음에 얻어 지며 一切 煩惱가 다한 것) 『중아함경』(대정장1, 748상-중)

을 말한다.

돈오입도요문론에는 마음이라는 집착도 버릴 것을 보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면 언제 해탈 할 수 있습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은 마치 미끄러운 진흙 물로 때를 씻는 것 과 같다. 반야는 현묘하여 본래 스스로 생 함이 없으니, 큰 작용이 나타남에 시절을 논하 지 않는다.''범부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성품을 본 사람은 곧 범부가 아니다. 上乘을 깨달으면 범부도 초월하고 성인도 초월한다......어리석은 사람은 먼 겁을 기다려 증득하지 만, 깨달은 사람은 몰록 본다.'") 『돈오입도요문론』,앞의책, p.241.

선어록에는 마음이라는 집착도 破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맺 는 말
이미 증득한 사람에게는 무거운 배을 지고 가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아직 미숙한 이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래로 허공에 누각을 지어보았다. 허공만 본 사람은 누각이 있었는지를 알 것이고, 허공을 보려는 사람에게는 모래로 지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함에서는 相을 보였고, 大乘에서는 相을 파했고, 禪宗에서는 本體를 보였다.

禪宗의 법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마땅한 스승이 없어 다시 相을 보여 體을 알고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많은 번뇌를 쌓았다.

강을 건너는 모래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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