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은 러일전쟁 때부터 거론

민족문화대학/역사 탐구 2011. 1. 27. 17:46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러시아 해군에 항복은 없다. 한방울 피가 남을 때까지 싸우자!”

2003년 8월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새로 취역하는 대잠수함 초계함에 ‘카레이츠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인’또는 ‘고려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이름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초기 인천 인근 서해상에서 일본 해군함정들과 격전을 벌이다 자폭한 함정의 이름을 승계한 것이다. 한 세기 동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이 전투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박종효 전 국립 모스크바대 교수가 그 연구결과를 정리해 ‘신동아’에 보내왔다. 카레이츠함과 바략함의 드라마틱한 전투와 그것이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꼼꼼히 분석한 이 글은,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강대국들의 치열한 외교전과 우리 영해를 앞마당 삼았던 열강 해군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이다(편집자).

제물포해전에서 최후를 맞은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오른쪽 위).

2004년 2월8일이면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해전’ 100주년이 된다. 그 한 세기 동안 진행된 한국 근현대사에 러일전쟁이 남긴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단순히 역사 속의 한 사건, 우리와는 별 상관 없는 외세끼리의 충돌로 생각해온 이 전쟁이 이후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와 남북분단의 과정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제물포해전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극적인 재미뿐 아니라 역사적 의미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본격적인 제물포해전 이야기에 앞서 러일전쟁의 의미부터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이후 러시아는 아관파천 사건과 군사고문단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한제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일본의 침략정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이 잠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개입 덕분이지만, 대신 러일간에는 한층 갈등이 깊어졌다. 게다가 청일전쟁(1894~95)의 결과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던 일본은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러·프·독)에 의해 이를 불가피하게 반환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가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조차하고 태평양 진출을 위한 해군기지로 요새화하는 한편, 동청철도(東淸鐵道·하얼빈과 다롄을 잇는 철도노선) 부설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자 러시아와 일본은 새로운 대결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일본은 러시아의 대한제국 개입과 만주 진출에 불만을 품고 임진왜란의 숙원을 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영일동맹(1902)을 체결해 전쟁준비를 하는가 하면 미국과도 전비차관 약속을 받는다. 한반도 문제와 만주 개방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던 일본은 결국 압록강 용암포 벌목사건 등을 트집잡아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위태롭게 유지해오던 독립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제정러시아에서는 전제정치에 대한 염증과 패전의 실의가 가중되어 공산혁명의 대정변이 일어난다. 시간이 흘러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된 후 패전국 일본 대신 전승국인 미국과 제정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8선 분할안’의 기원

재미있는 것은 이 남북분단 아이디어도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에 따르면, 1896년 일본의 야마가다 원수는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사절로 참석해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에게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해 러일 영향권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한 것이 그 최초의 기원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이때부터 분할문제는 양국간에 잠정적인 논의대상이었다.

이렇듯 미국이 2차대전 종전 직전에 작성해 구소련에 제의한 ‘38선 분할안’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우연이거나 실무자들의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일본으로부터 1945년 8월13일 무조건 항복을 통보받고 이틀 후인 8월15일 스탈린에게 38선 분할점령안에 서명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38선 이남과 이북을 군사 작전지역으로 삼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진행하기로 규정한 최초의 문서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 일반명령 1호’는 제정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38선 분할논의’라는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마련된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은 이미 8월13일부터 청진과 원산 등에 상륙작전을 개시해 남진하고 있는 소련군을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 일반명령 1호’를 작성해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미국 육군성 등 3성 조정위원회에 배속되어 있던 극동지역 전문가들은 앞에서 설명한 러일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제정 러시아 때 일본이 제안해 논의한 바 있어 스탈린이 쉽게 수긍할 것으로 예상되는 38선 분할 아이디어를 상기하고, 북한지역을 넘겨주는 대신 수도 서울과 인천항이 포함되어 있는 남한을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1/29/200401290500036/200401290500036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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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섬멸시킨 원조 벌칸 포

민족문화대학/역사 탐구 2011. 1. 27. 17:26

동학군 섬멸시킨 원조 벌칸 포
- 우금치의 개틀링 기관포

이 글은 신미양요 때 미군들이 썼던 무기에서부터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 역사에 나타났던 총포 화기를 소개하는

시리즈물의 두 번 째 글이다.

5월 18일 포스팅되었던 신미양요에 이은 것이고 이번 글은 개틀링
기관총, 다음은 안중근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과 청산리 전투에서의
38식 기병총과 모시 나강 소총을 소개한다.


개틀링 기관총 위의 둥근 탄창이 보이고 총신  후면에
조작 핸들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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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1월 9일,

정읍 황토 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상경 길에 오른 전봉준의 동학군은

10월 23일 금강을 넘어 이인, 판치에서 관군을 패배 시키고 그 전날

공주 우금치에서 도착하여 관군과 대치하다가 드디어
총공격을  단행했다.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체포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져 가마를 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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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겨울은 지척에 있었다.

조선의 엄동은 대군을 움직이기에 너무 추웠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빨리 한양을 점령해서 봉기의 결판을 내야 했다.

다음날 동학군의 전투 대오는 우금치 앞 남쪽 계곡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에 대비한 관군 일본군 연합군은 고개 왼쪽 산에는

호리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 군이, 건너편 견준봉에는
백낙완의 부대가, 그리고 우금치 고갯길에는 성하영이 지휘하는
관군이 배치 되어있었다.

공격하는 동학군은 약 일만의 군세, 방어하는 관군은 2,500명,

그리고 지원하는 일본군이 200명이었다.

동학군 자루 입구 같은 야산 고비를 돌아 자루 같은 우금치의

계곡 속에 넓게 산개했다.

전개가 끝나자 부대는 천천히 전진하여 경사가 심하지 않은
계곡을 아래 쯤에서 정렬을 끝내고 기세를 올렸다.

거의 추수를 끝낸 계곡의 논밭은 동학 병들을 거칠 것이 없이

기동 할 수가 있었다.

이 곳이 공격 개시선이 되는 것인데 일단 공격전 사기를 올리는
전열 정비가 있었다.

한바탕의 기세를 올리는 함성이 있는 뒤 부대는 진격을 시작했다.

수없이 치켜든 깃발은 하늘을 가렸고  부대를 몰아치는 지휘관들의

고함 소리는 계곡 양 언덕을 뒤흔들었다.

선두는 신식총기를 가진 부대가 앞장을 서고 뒤이어
화승총 부대와 활 부대.그 뒤를 창 부대가 따랐다.

전투는 관군 측의 포병 발사로 동학군들이 쓰러지면서

가열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우금치- 오른쪽이 혈전장이었던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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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와 양쪽 산 아래까지 다가간 동학군 신식 총 부대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관군들로부터 노획한 사정거리가 긴 양총들이 주력이었다.

고개 위의 관군도 일제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양쪽 산언덕에 붙은 관군들은 열을 이루어 능선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고 후퇴하고 장전하고 사격하고 후퇴하는 과정을 4-50번을

되풀이하며 공격하는 동학군을 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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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관군들은 근대 보병처럼 능선을 따라 참호를 파고

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과거 화승 총 시대의 전투 사격 대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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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의 사격전이 교환되고 동학군 중 수 십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동학군 전위 부대의 대장의 호령이 떨어졌다.

“나가라 -!”

최후 돌격이 시작된 것이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요란한 징소리 가을 하늘을 울리는
기세를 타고 동학군은 고갯마루를 향하여 우르르 밀려 올라갔다.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 시천주 조화청!”

자기들이 외우는 주문에 자가 최면이 된 동학군은 겁 없이
고개 마루와 양쪽 산자락으로 쇄도했다.

돌격은 계곡의 달리는 동학 병들을 논과 밭 사이의 오르기
좋은 곳으로 집중하게 해서 인간 무리들이 여러 곳 생기게 했다.

“ 시천주 조화정! ” “시천주 조화정! “

그 때까지 소총 사격으로 대응하던 관군은 동학군의 대 부대가 몇 개의

덩어리가 되어 압박 해 들어오자 양쪽 산 능선과 고개에 짚과
나뭇가지로 덮어 둔 수레가 일제히 위장을 거두어 냈다.

동학군도 그것을 보았다.

“대포다! 방포를 조심해라”

그러나 그 것들은 대포의 격렬한 포성이 아닌 연속적인 폭음을
토해냈다.

“ 두두두! 두두둣-! ”

대포와 같이 바퀴가 달린 수레에 실린 기관총들이었다.

동시에 목화송이 같은 작은 연기가 연달아 토해져 하늘로 올라가며

요란한 연발 음이 산간을 빗방울 소리처럼 휘둘러 퍼졌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같이 무연 화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연 화약을

사용하던 이 기관총은 오늘날 기관총이 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아니라 둔탁하고 부드러운 폭발음을 계속 토해냈다.

선두에서 거대한 인간 파도의 앞머리를 담당했던 수 백 명의

동학군 장정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 회전포[回轉包]구나!”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관총의 첫 세대 격인 개틀링 기관총이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이 아시아의 산 능선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첨언 하지만 수레에 싣고 다니던 기관총은 일차 세계 대전 전까지
포와 같은 종류로 분류되어 기관포라고 불렸다.

동학군의 지휘관들에게 회전포라 불렸던 이 신무기는

낯선 무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1차 봉기 때 전라도 장성 황룡 촌에서 이 신무기로

무장한 관군을 격멸하고 이 신무기도 빼앗았던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관군들의 신무기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동학군 간부들은 고갯길에서 만난 기관총에 대해서

별다른 공포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이라는 미래의 무기를 충분히 숙지하고서도  그 신무기가

가진 가공할 위력을 간파하지 못한 동학군의 지휘부는

사상자가 속출하는 데에도 계속 부하들을 독려하며
고개 능선으로  몰고 나갔다.

그러나 개틀링 기관총은 밀집대형의 동학군에게 섬뜩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돌격하던 밀집대형의 전위 공세를 꺾자 기관총의 사격은 후속하는

총포 대에게 퍼부어 댔고 더해서 더 후방의 활이나 창 부대에까지

탄망을 덮어 씌었다.

때로는 먼 후방에서 말을 타고 지휘하는 동학군 지휘부
간부들에게까지 원거리 사격을 서슴지 않았다

기관총과 관군들 그리고 동학군들이 토해낸 유연화약의 연기는

이 우금치의 고개와 능선을 마치 하얀 연막탄으로 덮어버리듯

자욱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지척을 구별하기 힘든 유연화약의 흰 연기 속에서 토해낸

개틀링 기관총의 수 없는 묵직한 납탄들은 방심하던 동학병을

단숨에 수 천 명을 우금치 산야에 쓰러진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동학군의  처절한 비명이 이 가을의 계곡을 뒤덮고 사상자가

수 천여 명에 가깝게 발생하자 기세 좋게 시작되었던

공격은 돈좌(頓挫)되었다.

동학군들의 질서 없는 패퇴가 시작되었다.

기세가 오른 관군들은 능선에서 뛰어 내려와 고개 아래로 패주하는

동학군들에게 계속 총격을 가하며 땅에 쓰러진 중상자들을
총검으로 찔러서 숨을 끊어 놓았다.

기관총 덕분에 사기가 오른 관군의 전투력은 지금까지 동학군들이

대적했던 오합지졸의 잡병들이 아니었다.

이날 첫 공격은 예상치 못한 신무기로 인하여 상승 동학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11월 9일의 첫 전투에서 동학군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전봉준은 이렇게 회고 했다.

“ 첫 전투가 끝나고 남은 인원을 점검해보니 일 만 명의

  장정 중에 남은 사람이 겨우 3,500명이었고 두 번째 전투가
  끝나고 보니 남은 사람이 단 500명이었습니다.“

동학군은 그러나 첫 날 대패를 하고도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달 11일까지 6회에 걸쳐 정면 공격을 되풀이

했지만 모두 첫 날과 같이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본 우금치 반대편 - 공주시의 일부 금학동이 보인다.
이 공주 함락 문턱에서 동학군은 궤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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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동학군의 와해였다.

무엇보다도 기관포의 뜨거운 맛을 알게 된 동학군의

전투 의지가 급격히 약화되어서 진격을 명령 받더라도
조금의 사상자라도 생기면 눈사태처럼 우르르 패주하기가 일 수였다.

게다가 탈주병까지 집단으로 속출 했었고 이를 간파한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동학군의 주력은  이 우금치에서 눈 녹아
버리듯이 붕괴하고 말았다.

그 뒤 동학군 잔존 부대는 논산 황화대에서 추격해오는 관군들과
일본 군에게  다시 한 번의 대패를 당하고 패퇴를 계속, 23일에는

근거지 전주까지 내주었다.

11월 25일 전라도 태인 전투에서 동학군은 완전 소멸되었다.

전봉준의 순창의 피노리에 김 경천의 집에 피난처를 구하려다 그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서 처형당했다.


전봉준 생가 - 그의 사후 가족은 폐문 되다시피해서 작은 아들은
남의 집 머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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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도 높게 거병했던 이들 백성들의 혁명이

이렇게 맥없이 좌절 된 것은 역시 동학군이 철저히 훈련받은 정규군이

아니라 급조된 난군 수준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이차 봉기를 한 동학군은 군사훈련을 충분히 실시할
여유도 없었다.

국방을 위하여 도입한 신무기라면 당연히  외적을 향하여 사용되어야

할텐데 유감스럽게도 한민족이 국방역사에서 최초로 도입한
이 신무기는 폭정에 시달리다가 봉기했던 내국의 동포에게 사용 된 것은 유감스럽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동학군이 대망의 상경 길에서 궤멸 당했던 것은 무지의 소산이 컸다.

동학군은 이미 한 해전 전남 장성 황룡 촌에서 관군들을 기습해서

회전포라 부르는 개틀링 기관총을 한 번 노획한 바 있었다.

기관총이 사용되었었던 현대적인 전투를 경험했던 지휘관이었다면

자신들의 군대가 당면할  위험성을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교육 훈련과 작전의 대비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군은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전에 무지했었다.

환상의 미신이 냉철한 현실감각을 마비시킨 전투 행태로

현대적 무기를 상대 했던 것이다.  

동학군의 오합지졸 같은 전투력을 나타내는 한 사례를 여기서
소개한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한 때 동학에 입도하야 해주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지휘관 노릇을 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범 김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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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김창수라 불리던 김구선생은 놀랍게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일 만 명이 넘는 동학군의 지휘관이 되어 해주 성을 습격했다.

십대에서부터 주위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범상치 않은 그릇이

있었던 것 같다.

김구 부대는 요란한 함성과 구호를 외치며 해주성의 외곽에
도착해서 일본군이 있는 성문을 공격했다.

해주 성문 누각에 오륙 명의 일본군이 올라와 기세를 올리는
대군에게 총격을 가하고 사격의 결과 댓 명이 쓰러지자 그
많던 동학군들은 무기를 집어 던지고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무질서 하게 도주하고 말았다.

이런 소수의 인간들에게 이렇게 다수의 대군이 어이 없이
패퇴한 것은 역사에서 찾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동학군의 실수도 실수였지만 이 우금치의 지형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관군의 신병기인 개틀링 기관총이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이 우금치 고개를 찾아가 보았다.

내가 본 우금치 고개는 거치된 기관총이 발군의 능력을 발휘할

모든 요소를 골고루 갖춘 지형이었다.

우선 보면 우금치의 남쪽 사면은 적당히 넓다.

이것은 정면 돌파에 필요한 대병력 집중이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계곡 양쪽 사면이 급하고 계곡이 좁았다면 대병력의 투입이
없었을 것이고 대량의 인명 손실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르막 고갯길의 경사가 그닥 심하지가 않았다.

이것 역시 대병력이 집중해서 돌격을 감행 하게하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했다.
게다가 얕은 경사는 사격의 명중도를 높여준다.
경사가 급하면 기총탄이 목표의 위로 지나가는 확률을 높인다.

위의 요소들은  기관총의 집중 사격으로 대량의 살육이 가능케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실전에서 기관총 사수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 우금치 고개야 말로

아주 이상적인 기관총 사격의 적지임은  인정 할 것이다.

계곡의 양쪽 사면이 다 기관총의 사거리 안에 있었다.

그리고 경사가 완만하여 대(隊)와 오(伍)의 전방과 후방이 전부

사수(射手)의 시야에 들어온다.

폭이 좁은 정밀한 횡사가 가능하고 깊은 종사도 가능한 곳이

이 우금치 고개였으니 우금치 고개 남쪽 사면에 붙은  동학군은
이 기관총의 어느 사격에서도 안전 하지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루와 같은 사지에 동학군은 앞뒤를 모르고 스스로 뛰어 들어

난타를 당하고 전멸의 패배를 당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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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냉정한 분석 글을 쓰면서 우금치에서 희생된 동학 병들에게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백성들을 그토록 괄시하고 천대했던 조선 500년의 비인간적인
정치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곪아 터진 것이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다.
인간의  기본 값어치 조차 무시했던 그의 탐욕한 횡포는 결국 동학
혁명을 불러오게 했다.


우금치의 동학 혁명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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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에서 대패 해버린 동학군처럼 비록 소수의 근대식 소총이나

화승총을 장비했지만 무장의 대부분이 활이나 칼 창 등의 원시 무기를

장비한 전투 부대였다.

이런 전근대적인 부대에게  기관총의 맹사가 어떤 파괴력을

발휘하는지는 이 비슷한 시기인 1893년 10월 25일 지구 저 먼 곳,

지금 로디지아의 봉코에서 그 지역 마타베 부족과
영국인 이주민 사이에 있었던 전투가 입증해준다.


마타베 지역으로 대량의 백인 이주자를 보내 로디지어를 만든
세실 로데스 - 지금도 최대 다이어몬드 회사인 드 비어사의
창업자이고 자선가였지만 식민주의의 예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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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 영역에 무단으로 이주해 들어오는 영국민들을 호위하던
부대와 지역의 원 부족이고 극히 호전적인 마타베 부족들은 
마찰을 계속하다가 결국 전투로 치달려 이 작은 지역에서
격돌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타베 족은 3,500명의 강한 전투 부대를 동원했지만
이주민을 호위하던 호위 부대는 불과 300명의 열세였다.

마타베 족은 우금치의 동학군처럼 소소의 영국제 마티니나
헨리 단발총등을 가졌으나 대부분은 활과 창의 원시적 무기로
무장했었다.

영국군은 소수였으나 토민들에게 가공할
타격을 줄 비밀 병기를 장비했었다.

네 정의 기관총이 그것이었다.

두 정은 당시 최신식인 맥심이었고 한 정은 이미 구식이 되어가고
있는 개틀링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수만 생산 되어서 총기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노르덴펠트라는 기관총이었다.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마타베의 용사들은 일차적인 총격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격을 개시했다.

네 정의 기관총은 이를 맞 받아서 불벼락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전장터는 콩 볶는 듯한 기관총의 연사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마타베 용사들의 공격대는  목표 거리의 불과 반의 반도 가기 전에

돌아 서고 말았다.
낙엽 떨어지듯 무수히 땅에 쓰러지던 부하들을 보지 못한 추장이
후퇴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전투는 마타베는 영국인들과 접전도 못해보고 패퇴 해버림으로서

초반에 끝나 버렸다.

마타베 부족은 소위 첫 합에서 6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우금치의 동학군처럼 계속되는 돌격을 시도했다면 마타베의 용사들은

기관총의 맹사에 전멸해 버렸을 것이다.

우금치의 동학군 참패을 그 원인으로 일본군의 참전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다.

허나 일본군이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았다 해도 단지 200여 몀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전투력이 그들이 가진 무라타 소총을 통해서 발휘 되었을텐데

일본군이 아무리 사격을 잘 했다 해도 수학적으로 보아서 단 200정의

소총이 단 한번의 접전에 7,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할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집중 화력을 퍼부은 개틀링 기관총에서 찾아야 한다.
이 정도의 대량 살상은 자동화기가 아니면 만들어 낼수가 없다. 
위의 동학군 살상 전과는 적어도 4-6정 의 개틀링이  동원
되었을 때만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군의 우금치 전투 참전 자체를 부정한다.

일본군 예비 부대로서 우금치 후방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 동학  잔존 부대 소탕 작전에만 참여 했다고 주장한다. )

20세기 초 수천 년의 역사를 두고 면면히 내려온 기병대의 존재에

소멸의 결정타를 안겨준 기관총은 이미 19세기말 이 동아시아의

작은 언덕에서 부패한 정부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민중의 의지를
여지없이 말살하여 향후 보병 전투에서 기관총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미리 예고했던 것이다.

이날 우금치의 고개에서 동학군에게 패배의 쓰라림을 안겨준
개틀링 기관총은 미국의 의학박사 리차드 조단 개틀링이
‘미국 남북 전쟁의 참화를 목격하고 이를 빨리 끝내는 방법을 찾다가
발명했다’ 라는 그럴듯한 대의명분과 함께 1862년 남북전쟁의
중간에 세상에 처음 선뵈었다.


개틀링 기관총 발명자 개틀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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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사격의 연속 발사라는 인류의 오랜 숙원과 노력의

연장상에서 나타난 여러 노력의 한 시리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수백년동안 여러 나라의 수없는 사람들이 노력했지만 성공적인
연발 총기는 19세기 들어와 연달아 선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 점에서 유럽보다 빠른 선수를 쳤다.

사무엘 콜트가 강을 오고가는 증기선의 수차(水車)를 보고 콜트 식

연발 권총을 발명해서 큰 성공을 했고 그 뒤에 남북전쟁에서는
스펜서 카빈이라는 짧고 가벼운 연발 장총이 선보였다.

(이 소총은 신미양요 편에 자세히 설명 되어있다)

그런 연발무기들이 먼저 나오고 개틀링 기관포가 출현했던 것이다.

개틀링 기관포는 자동 발사 공용화기로서는 실제적 기능을 가진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었다.
( 그 전에 프랑스 군이 채용해서 쓰던 벨기에 제 mitrailleuse
기관총이 있었으나 우리나라 임진란때 쓰던 화차와 비슷한
기능 구조를 가져서 진정한 기관총이라 할수가 없다.
단 200정만 생산 되었을 따름이다.)

그 개틀링 기관총은 전장의 오랜 숙원이었던 화력의 대량 타격의
꿈을 이루게 만든 혁신적인 성능을 가진 것이기도 했다.

그 자동 사격을 가능케 한 개틀링 기관총의 구조는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불필요하게 복잡한 것이었다.

여섯 개의 총신 다발을 원통형으로 배치된 총신들이 바퀴처럼

회전해가면서 위에 설치한 탄창에서 자유 낙하로 떨어지는 탄환을

배급받아 삽탄과 장전, 발사, 그리고 방출이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 회전하는 총신 뭉치의 회전 기능은 사수가 기관총 후면 우측에
장치된 둥근 모양의 핸들을 자전거 패달을 돌리듯 돌려서
얻어지기 때문에 이 기관포는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자동 화기가
아니라 수동화기인 셈이다.

방아쇠만 당기면 삽탄과 장전 발사 방출이 자동으로 되는
근대 기관총에 비해서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개틀링은 한 단계
낡은 기관총인 셈이다.

초기의 개틀링 기관총은 58구경이어서 구경이 매우 컸다.


1876형 개틀링 기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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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조가 너무 복잡하고 고장이 심해서 미국 정부는 이런

자동화기가 절실한 남북 전쟁 중이었는데도 채택을 거부했었다.

단지 신무기에 관심을 가진 북군의 벤자민 버틀러 장군이 12문을

독자적으로 구입해서 그중 두 문을 1864년 피터스버그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발명자 개틀링은 남북 전쟁 후 계속 연구를 해서 성능을 크게 개선했다.

구경도 45,50등 여러 구경으로 만들어서 제품 다변화를 꾀했다.

기계적 결함도 많이 제거했고 탄창도 두 개를

끼어 탄창 교환으로 연발 사격의 중단이 없도록 했다.

마침내 미국 정부가 개틀링을 구입 했을 뿐더러 나아가서 외국에
수출도 하게 되었다.

개틀링 기관총는 프랑스에 수출되어 보불 전쟁에서 제한적이었으나

프랑스 편을 위하여 실력을 발휘했다.

독일군이 소총에서 훨씬 우수한 니들 건을 썼지만 기관총은
아직 없었다.

유명한 제임스 커스터 중령의 7 기병대 238명이 전멸해버린

리틀 빅 혼 전투에 개틀링에 관한 일화가 있었다.


제임스 커스터  - 용감했지만 난폭하고 사려 깊지
못한 그의 성격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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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는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야만스러운 인디언들이

순찰 활동을 하던 미 기병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킨 비극적인
학살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을 이와 정반대다.

용감했지만 거칠고 무모했던 커스터 중령이 초원에서

평화롭게 야영을 하던 노인과 아녀자들까지 포함된 인디언 부족을

기습했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고 전멸당한 사건이었다.

커스터는 단지 이 백 여명의 기병 대원을 인솔하고 인디언 척후가

하루 전에 전해 준 정보를 무시하고 대 부족의 집결지를 공격했다가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시팅 불이 지휘하는 2,000명의 대부대의 반격을 당해 리틀 빅 혼이라는 낮은 언덕으로 내몰려서 전멸 당했다.

인디언을 얕보고 공격했었던 무모한 만용이 대단했지만 이
비극적인 전사에 ‘만약’ 이라는 한 가정을 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커스터 중령의 본대에 이 개틀링 기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 운명의 출동 일, 커스터는 이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고

동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커스터가 이 개틀링 기관포를 장비하고 인디언 토벌에
나섰더라면 커스터는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극동에서 개틀링 기관포의 등장은 상당히 빨랐다.

일본에서 개틀링 기관포가 선을 보인 것은 동학혁명 시기의
조선보다 삼십년이나 훨씬 앞선 1868년이었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톰 크루즈가 주연한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이를 본분들이 많으리라고 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톰 크루즈와 가쓰모도가 지휘하는
기병대를 타격해서 전멸시키는 개틀링 기관총이 등장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무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내전에서 개틀링 기관총이
사용 되었엇다.

개틀링 기관포가 세상에 나온지 불과 수 년 만에 아직 세계의
변방이었던 극동의 한 나라의 내전에 까지 선을 보인 것이니
무기 상인들의 극성은 예나 지금이나 유별났다고 할 만하겠다.

당신 일본은 삼백년이나 계속된 도쿠가와 막부가 쇠잔해지고
긴 역사동안 내밀히 이 막부에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쓰마와
조슈의 두 번이 주축이 되어 그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서
허수아비 취급을 당하던 천황을 받들고 왕정복고의 반기를 들었다.

일본은 관군이라 칭하는 이 천황 옹호파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가 붙어서 일대 내전에 휩싸였다.

그때 막부 편에 섰던 나가오카 번의 중신 가와이 쓰꾸노스케
[河井 繼之助 =1827-1868]는 에도에 있던 번의 소유 고가 미술품들을
팔아 이 개틀링 기관총 2 문을 사들였다

그는 이 기관총들을  나가오카 성 공방전에서 쇄도하는 조오슈 군을
상대로 사용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

성을 공격했던 조오슈 군의 대장은 나중에 일본의 육군 대신까지 된

야마가다 아리도모[山縣 有朋]라는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는데

이 가와이가 직접 나서서 핸들을 돌리며 사격을 해댄 신무기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고 한다.

이 가와이 쓰쿠노쓰게는  막부 말에 출현한 출중한 인재중의 하나였다.

그의 전기가 몇 년 전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51대 49라는제목이었다.]

가와이는 개틀링 기관포가 활약한 전투가 있은 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인 파상풍으로  곧 죽고 말았다.

개틀링 기관포가 어떻게 해서 한국에 들어 왔는지는
내가 아는 한 아직 불투명하다.

그러나 20여 문이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890년대에 조선에도 러시아와 미국 이태리제등 다양한
서양식 화기가 많이 도입 되었었다.

짐작컨대 샹하이나 요코하마에서 활발하게 영업하던 서양의

무기상들이 중개해서 들어오지 않았나하는 추측이 든다.

전장의 주력 화기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같이 보이던 개틀링
기관총는 20년 뒤에 나온 현대적인 맥심 기관총의 출현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기관총은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 활약을 했다.)

같은 미국인이 하이람 맥심[Hiram Maxim]이 발명한 반동 식
기관총은 현대 기관총의 모태가 된다.
발사되는 총탄의 반동을 이용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디자인 된 이 기관총은 개틀링과 달리 방아쇠만 누르면
발사되는 진짜 기관총다운 기관총이었다.

수레가 끌어야하는 대형인 개틀링에 비해서 보병이 들고 운영할
정도로 가벼운 맥심은 구조도 단순하고 기계적 성능도 월등해서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이 맥심을 앞 다투어 도입하였다.


맥심 기관총 -영국, 독일, 러시아에서 생산되었다.
윗 사진은 청산리에서 독립군들이 사용해서 일본군에게
대 타격을 준 러시아제 맥심 기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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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심의 등장은  전근대적인 개틀링 기관총의 일생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개틀링 회사는 그래도 손으로 돌리며 발사하던 구조를
전동기로 대체 해 보는 등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마지막 순간까지
쳐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래서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하고 박물관으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19세기 중반에 발명 되었던 개틀링이 다시 살아나서 21세기의
최첨단 무기로 다시 역사의 디딤돌을 받고 있으니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시 개틀링의 후손이 다시 한반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도 동학 혁명을 보는 우리의 눈에 이채롭게 보인다.

1945년,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 공군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제트화 되기 시작하는 전투기들이 속도도 빨라졌지만 덩치도
커져서 전투기 기관포의 화력 강화가 시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중전에서 필요한 화기는 단시간에 대량의 파괴력을 적기에
퍼붓는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기관포의 구경도 커져야겠지만 기관총의

숫자도 많아야 했다.

기총 숫자를 늘리는 것도 그 무게와 전투기 설계 구도로 보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GE의 무기 개발팀의 엔지니어는 이미
전설 속에 사라진 개틀링에 생각이 미쳤다.

그 기본 디자인은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훌륭히 풀어 줄
컨셉을 담고 있었다.

팀은 기존의 개틀링 기관총을 분석해보고 1949년 현대적인
기술이  반영된 전투기용 기관포를 개발해냈다.


M-61 20미리 벌칸 포- 사람의 힘을 전동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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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20밀리 기관포 포신이 개틀링 기관포처럼 함께 묶여

회전하면서 발사하는 이 신형 기관포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벌컨[VULCAN}포이다. 이 벌칸포는 F-104기에 최초로
장비가 되었었다.

벌칸 포는 성능이 크게 입증되어 7.62미리에서

30미리 형까지 생산되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채택이 되었다

벌칸 포는 특히 명전투기 팬텀에 부착되어 중동과 월남에서

맹위를 떨쳤다.

후속기인 F-16에 이어 F-15기에 더 이어서 최신예기인
F-22와 F-35에도 부착이 되었다.

벌칸은 우리나라도 수입은 물론 자주 국방 정책이 시작된 70년대
초부터 국산화가 시도된 최초의 방산무기중 하나이다.

한국 해군은 특히 이 20 미리 벌칸 포를 새로 건조하기 시작한

소형 해군 함정에 장치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겠지만 두 번에 걸쳐  북한 해군의

도발해온 연평 해전에서의  참수리 고속정에

장비된 이 벌칸 포의 활약이 대단했다.

개틀링 후신 벌칸 포가 장비된 한국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함정 후방을 지향한  두 문의 20미리 벌칸 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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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의 동학군 참변을 부른  개틀링 기관총는 현재
독립 기념관에  한 문이 전시되어 있고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도
복제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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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개틀링 기관총,그리고 개틀링의 시대를 닫은 맥심 기관총
그리고 미니 벌칸인 미니건의 화력 시범 동영상을 올린다. 
아래 줄을 click!
http://kr.blog.yahoo.com/juneki82/MYBLOG/yblog.html?pc=1

:

구한말 대한제국

민족문화대학/역사 탐구 2011. 1. 22. 22:19

1. 강화도 조약
1875년 8월 20일 일본군함 운요 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초지진 포대에서 사정거리 600미터의 구식대포로 운요 호를 공격했지만 포탄은 바닷물에 떨어질 뿐이었다. 잠시 후 운요 호는 신식대포로 초지진을 박살냈다.
이듬 해 1월 10일 일본군함 8척이 해군 800명과 함께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우리 측이 운요 호에 선제공격을 했으니 피해보상을 받겠다는 것이다. 피해는 초지진이 입었지만 군사적 우위를 가진 일본은 막무가내였다.
1876년 2월 2일 마침내 우리는 일본에서 작성한 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최초의 근대조약이지만, 불평등 조약이다. 부산 외에 두 곳을 개항하고 일본인의 왕래와 통상을 허가하고, 일본인이 자유로이 조선 해안을 측량하며,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면 인본 관헌이 심판하겠다는 등 어이없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대원군이 실권하면서 쇄국파의 힘이 약해지고 개화파가 득세했으므로 근대국가를 꿈꾸며 도장을 찍었을 것이다. 이 조약으로 국내산업을 보호할 일은 아득해졌다. 일본을 위시한 외세가 다 먹겠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2. 임오군란
일본이 조선 정부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유생들이 외세를 배척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일본은 정부에 압력을 넣어 5군영 체제를 허물어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구식군인은 2영으로 통합했다.
그러나 별기군과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이었다. 구식군인에게는 월급도 제때 주지 않아 1년도 넘게 밀렸는데, 어렵게 월급으로 지급된 쌀이 상하거나 모래가 섞였다. 구식군인들은 분개하여 뛰쳐나갔다. 군인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일본공사관을 습격했고, 일부는 경복궁을 도모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청군과 일군이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왔고, 폭동으로 시작된 군인들의 저항은 하루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계획도 포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일본에 50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군의 서울 주둔을 허락해야 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3.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정부는 친청 사대파 세력과 친일 개화파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사대파에는 민비 중심의 민씨 일족이, 개화파에는 고종 중심의 신진 그룹이 포진했다. 개화파는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일본의 발전상에 깜짝 놀랐다. 하루빨리 청국을 몰아내고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지원도 약속받았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은 사대파를 암살하고 왕을 볼모로 입헌군주제 형태의 새 정부를 선언했다.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민비와 청국의 밀접하고도 신속한 대응으로 새 정부는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일본은 자기들이 갑신정변의 배후임에도 12만원의 배상을 요구하는 한성조약을 강요, 우리 정부의 도장을 받고 말았다. 일본은 또 청국과의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졌음을 확인했다. 청과 일본 자기들끼리 조선 땅에서 철군하자는 약속이고, 만약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주둔한다면 다른 한 나라도 자동적으로 조선에 출병하겠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빌어먹을 조약인 것이다. 조선 땅에 대한 조약인데 우리 정부는 조약 내용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4. 동학혁명
1860년 유학자이던 최제우가 동학을 창교했다. 천주고 즉 서학의 반대 의미로 동학이란 이름을 가진 이 신흥종교는 만민평등 사상을 내걸고 신분사회를 타파하자고 주장했다. 교세는 삼남을 중심으로 급격히 늘었는데, 정부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집단이라고 여기고 탄압하여 1864년 교주 최제우를 사형에 처했다.
그러나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의 조직 정비에 힘입어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위정척사운동과 연계해 종교로서 힘을 갖게 되었다. 급기야 최제우, 손병희 등은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탐관오리들의 농민 수탈은 도를 넘어섰다. 동학은 포접제 조직으로 농민세력을 규합하여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1894년 전형적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이 불필요한 저수지를 쌓고 백성들에게 물 값을 받겠다고 하자, 동학의 고부 접주이던 전봉건이 앞장서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은 관아를 접수, 관리들을 내쫓고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준 다음 10일 만에 해산했다. 정부 측 관리가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곧이어 파견된 진상조사단이 모든 죄를 농민군에 뒤집어씌웠다. 일본의 내정간섭 결과였다.
이렇게 되자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아예 혁명가로 나섰다. 그러나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군은 1년여 만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 반침략 민족운동이며,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였고, 전통사회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항일 의병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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