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과 102년전. 어느 것부터 이야기할까요? 일단 우리와 직접 관련되었던 100년 전 상황으로 가보지요.
1908년 동양척식회사법이 제정됩니다. 이른바 <동척(東拓)>입니다. 조 선에 대한 경제독점과 토지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세워진 일본의 국책회사지요. 처음 세워질 때 자본금 1,000만원 가운데 30%는 조선 정부가 국유지로 출자를 했습니다. 1910년 이후에는 소용이 없어졌지요. 사냥개들이 다 나눠 먹어버렸습니다. '그들끼리' 희희낙락했지요.
1909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동척은 세 가지 분야에서 특기할만한 접근을 합니다.
첫째,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인 이주사업을 중심으로 농업경영, 토지경영, 토지개량과 임업경영 등 조.선의 산하(山河) 요지들을 점거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둘 째, 1920년대와 1930년대까지 금융업을 확장합니다. 이른바 식민지 개척자금인 <척식자금>입니다. 이것은 1920년대 만주, 몽골 지역 진출을 위한 농공업 개발자금의 공급 사업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조선 내의 수탈 구조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산미증식계획이란 걸 추진하면서 식량수탈을 진행하였지요.
셋 째, 1930년대 이후에는 광공업으로 영역을 대폭 확장합니다. 전쟁준비를 했지요. 군수공업에 필요한 조선 내의 광공업이 마구 그들의 손에서 놀아납니다. 대부분이 일본인의 손에서, 그들의 사냥개에 의해 관리됩니다. 수탈의 구도가 정확하게 확정되었던 분야였지요.
1917년 동척은 본점을 도쿄로 옮기면서 조선에는 지부만 두게 됩니다. 그러니까 설립된 지 십 년도 안되어서 알맹이는 모두 일본 내로 옮겨서 관리를 하게 된 겁니다. 일본인으로만 경영진을 꾸미게 되지요. 조선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사냥개로 부립니다. 나중에는 영역을 만주에서 1938년 이후에는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 등까지 확장을 합니다. 당시 9개 지점, 831명의 직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극히 소수의 인원으로 조.선의 산업, 토지, 물자, 금융 등을 모두 장악했던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오늘 다시 생각해보면 <뭔가> 떠오르는 바가 있지 않으십니까? 역사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어제로부터 오늘을, 다시 오늘로부터 내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여러 내용과 함께 이어가며 상세하게 설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년전으로 가봅니다.
여기서는 <만철(滿鐵)>이 등장합니다. '남만주 철도주식회사'라는 조직입니다. 1906년 세워졌지요. 동척보다 두 해가 빠릅니다. '만철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이들은 중국 동북부 지역, 그러니까 만주지역의 절대 지위를 구축합니다. 회사이긴 했지만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 내의 또 하나의 국가로까지 평가를 받았습니다. 만철이 세워지고 동척이 나온 것은 일본이 당시 만주와 몽골을 자신들의 생존 마지노선으로 보았고, 한반도는 이미 흡수된 것으로 보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조약)으로 '게임'은 끝나 있었지요.
이들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만주사변과 함께 만철이 가진 매우 강력한 '싱크탱크'의 기능에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른바 만철경제조사회, 만철조사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들의 기가막힌 경제개발 계획과 기획, 그리고 실행능력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회사가 아닌 식.민.지.를 다스린 직접적 브레인들이 거기 있다보니 자연 파워가 더 붙게 됩니다. 전성기 인원은 40만명, 철도뿐만 아니라 인접지역의 석탄, 철강 등 중요 산업전반을 모두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군.림.자였습니다.
1945년 일본의 전쟁 패망이후, 오히려 이들은 더 주목받고 중용됩니다. 여기에 일본의 오늘의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들은 식민을 해본 경험도 있지만 이를 <경제>라는 각도에서, 그리고 격렬한 전쟁과 현지와의 갈등, 그리고 수렴과 조합 등 <사냥개기르기>, 압박, 탄압, 수탈의 모든 경험을 가진 두뇌들입니다. 오죽하면 당시 모든 걸 두루 경험한 일본 최고의 두뇌집단이라고 이름 붙였겠습니까. 이들은 그냥 죽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패전 후 만주경영에서 바로 일본의 재건으로 돌아와서도 자신들의 경험과 기획에 바탕한 역량을 발휘합니다.
일 본 신칸센 건설의 주역으로 재등장했는가 하면, 일본 경제의 현 시스템 자체가 사실상 이들의 손에서 지금의 '원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속에 경제만 있는 건 아니지요.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뿌리가 만철의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들은 팽창주의의 당위와 접근방식, 그리고 포획에 대해서는 '선수'입니다. 프로페셔널인 셈이지요. 그렇고 그런 아마추어가 아닌. 이들이 패전 이후 지금까지 일본의 뿌리깊은 요소 요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미치고, 그 시스템과 노하우를 전합니다. 바로 식..민..의 경험입니다. 직접 개입도 했지요.
이들이 누구일까요? 이들은 지금 일본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이들은 100년 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들을 찾아보려고 해보신 적은 있나요? 그들은 정말 평화를 원하고 , 제.국.주.의와 팽.창.주.의를 완전히 버렸다고 믿으시나요?
<노예>로 살았던 그 시대를 요즘 누군가 자꾸만 왜곡하며 <당시도 나름 행복했노라!>는 듣기에 보기에도 불편하기 그지 없는 궤변과 억측을 늘어 놓습니다. 식민의 시대가 그리운가 봅니다. 새로운 형태의 <친일>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더욱 우습게도 <보수>라고 하고, 거기에 한 걸음 더 나가서 <애국>을 운운하는 모습에서 나는100여년 전의 앞서 설명한 두 회사(동척과 만철)와 그에 빌붙었던 사냥개들을 떠올립니다.
그 렇게 보면, 지금 <친일을 해도 잘살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은 사람들이지요. 사냥개로 살고 싶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전례는 항상 되풀이 되는 경향이 아주 강하지요. 특히 수탈(收奪)은 매우 교묘한 듯 하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어리석은자, 몰지각한 국민이 당하게 되어 있지요. 여기 이 과정에서는 많은 사냥개들이 곳곳에서 움직인다는 걸 역사는 이야기 해줍니다.
나 는 이제부터 그 사냥개와 사냥꾼의 역학, 그리고 이의 진행전례와 현재 진행 메커니즘과 현상, 그리고 대책에 대해 44회에 걸쳐 연재를 해볼까 합니다. 더 필요하다면 횟수를 늘려서 해야겠지요. 그 중간 중간, 어떠한 새로운 상황이 드러난다면 그도 감안해서 잘 담아보겠습니다.
수탈경제. 반복하려는 사악한 시도가 계속되면. 그것은 바로 이 시점의 <시대전쟁>이 되는 셈이지요. 처절하게 오늘의 한 시대를 다 걸어버린, 그래야 할 것 같은 전쟁의 냄새가 지금도 아주 찐하게 나는 듯 합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93699
시대전쟁 02화
: 1997년 전후한 일본의 대한 '침탈' 루트를 대략본다. (2008.11.20)
"기회주의란 기만이나 사기 등의 계산된 이기주의를 의미한다."
- '조직이론' 중에서
100여년 전 이야기는 지금 와서는 그냥 기억이나 혹은 나쁜 추억의 한 장면일 수 있습니다만, 확 당겨서 '0'을 하나 떼고, 지난 10여년 전으로 가보도록 하지요.
1997 년 외환위기로 받아들여진 IMF자금은 IMF사태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한일 관계에 있어서는 이 사건으로 1965년 한일협정 체결된 이후 20여 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른바 자본시장이 개방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지요. 그 이전까지 일본은 자본보다는 기술과 산업, 제조 등의 영역에서 한국과의 경제역학 관계가 형성된 상태의 경협을 했습니다. 이렇다 할 침탈의 완전한 계기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술, 경제협력은 있었지요. 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기술종속, 산업종속도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으로 침탈 자체를 완전 구축하기란 어려웠지요. 미국 눈치도 봤을 겁니다.
90년대 일본은 사사까와 재단의 연세대 일본 장학금 사건 등, 우익의 선봉들이 한국 내에서 어떻게든 친일파 내지 친일관련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일 본의 A급 전범이자 선박왕이었던 사사싸와 료이치는 60년대 이후 한센병 환자 지원 명목으로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들어더니 자신이 가진 막대한 돈으로 세워진 우익자본인 일본재단(현 사사까와 평화재단)을 이용해 연세대에 아시아 연구기금을 주며, 이른바 아시아 연구라는 명목으로 한국에서의 입지(친일연구 등을 포함한)를 재구축하려고 하였지요. 그러다 사건이 발생합니다. 연대 교수협의화가 반대하고 시사저널(당시 남문희 기자)의 보도가 이어집니다. 아주 심각했던 사건이었지요.
대체로 이런 행위는 90년대만 해도 한국의 사회안전망에서(그러니까 식자층에서) 강하게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그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더욱 은밀해졌지요. 도요다 재단이 슬그머니 등장해서 친일학자들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다른 쪽에서도 은밀한 포섭행위는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IMF는 이 반발의 벽, 사회안전망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허물어 버리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80 년대말, 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의 학자, 연구자, 그리고 정치적인 단기 일본연수자 들이 정지갛고 강직하지 못하게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됩니다. 돈의 위력이고, 다른 변수들도 있긴 하겠지요. 개인의 욕망, 사적 이익이라는 관점도 무시하기는 어려우니까요. 학자, 정치인, 학생, 그리고 다수 지식인들 상당수가 일본의 자금을 직간접 통하며 부정직한 <학술과 정치>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친일의 재구성은 본격적으로 전혀 다른 양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상 본격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금융은 정작 IMF 이후부터 작업이 시작되었지요. 마치 1920년대처럼 그랬습니다. 일본발 종교가 먼저 2000년 공식 활동승인을 받게 됩니다. 그 때부터 밀려들어온 <금융>은 가히 '물밀듯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지금 현재의 내용을 한 번 대략 훓어보지요.
부 동산의 프로젝트 파이넨셜 펀드(PF), 사채시장에서 운용되는 일본발 사채, 금융기관 등을 통해 공식 유입된 엔케리 자금, 주식시장 및 채권시장에 몰린 자금, 공식적인 일본발 민간 및 관급 지원 기금, 지방정부 관급 프로젝트 참여 자금, 기업 참여자금, 일본의 파트너 기업을 통한 시장 내 자금 유입, 그리고 불법성 혹은 이면성 자금(대리인을 통하거나 혹은 관리되는) 등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정확히 얼마인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확실히 경제분야에서 일본은 지난 십 년, 한국에서 강력한 텃밭을 구축한 게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건 아니건 그렇다는 이야깁니다. (이 점에서는 주변을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1999년 이후 현재까지 일본이 구축한 다른 한 가지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세력>입니다. 2005~2007 년까지 이들은 한국의 정권 창출에 기여하는 정치세력으로 강하게 기능하게 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철저하게 보수 우익을 내세웠지만, 그 가운데서는 <친일>의 절대요소가 포함됩니다. 즉, <일본을 따라 배우자!>는 구호입니다. 선진국이라는 것이지요. 경제를 잣대로 해서 세워진 이 기준은 급속하게 전파되고 세력화 되었습니다. 역사성은 아예 무시된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상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만철과 동척의 역사>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들고자 시도도 있었지요.국민들이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이들이 정치권, 사회, 종교, 그리고 단체와 학교 등으로 파고들었던 것이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그 결과 정치와 경제, 정치세력이 이제는 <교육과 역사>라는 곳으로까지 물밀듯이 밀려 듭니다.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와 역사연구가 아닌 정치와 경제로만 출발된 역사가 횡행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각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친일의 재구성>, <친일의 고착화>, <친일의 완성>이라는 단계로써 여러분은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엑스레이 찍어보기>이고 한편으로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기>입니다. 그래야만 할 시기입니다.
여 기에 유관순 열사가 깡패로, 안중근 의시가 비열한 폭력주의자로, 김구 선생이 테러리스트의 괴수라는 <도무지 납득이 불가능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다시 <일본을 배우자!>, <친일이 잘못된 게 뭔가!>라는 <우기기>가 등장합니다. 이것도 이어지는 중입니다.
바로 정치가 경제라는 잣대를 앞세워 역사와 교육을 포획하는 과정입니다.
좌 편향을 앞세우고 내세운 이러한 시도는 이제 중고등학생들에게까지 시도되는 중입니다. 이른바 우편향으로 좌로 간 것을 중간으로까지는 세우자는 논리지만...이 명목을 가만히 보면... 이게 바로 친일교육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셈입니다. 얕은 여러 장학금등의 논리도 나오는 걸보면, 이건 뉴라이트 대학생 계열을 보는 것 같고, 그리 만들고자 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관건은 위의 <경제>와 <교육>이라는 두 갈래입니다.
이 두 가지에서 친일이 뿌리를 내린다면.......이것이 침탈과 수탈이라는 강한 목적성을 띠면서 과거 100여년 전 그랬듯이 그러한 기획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며...정치 세력의 뒷받침 하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이라면.......그리고 이것이 지난 십 년 이상의 준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면......그렇다면, 그런 잣대를 가지지 못한다면 오늘의 현실, 경제이건 정치 혹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벌어지는 이 양상을 보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 점에 대해 하나씩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시대전쟁 03화
: 수탈경제학 ABC, 방관하기의 썩은 미학 (2008.11.20)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 볼까
존경하는 주인 아저씨,
벌써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 받는 줄
조금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 생각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리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 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쓰는 날개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게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하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재미"
- 1998년 신춘문예 당선작 이종수 님의 <장닭 공화국> 중에서
이런 <메트릭스>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잘 속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경제는 사실 경제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경제정책 자체가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와 엇비슷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두 개의 길>을 동시에 가본 적이 없으니 <우기기>가 가능한 것처럼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은 90%의 국민에 대한 수탈 조짐이 정치와 경제, 역사성, 그리고 강하게 들어온 지난 백 년의 그림자가 있다는 점에서 봐야 합니다.
경제가 어렵다?
어 려우면 공동으로 어려움을 감당할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친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공동>의 관심사항이 아닌 <각자>의 관심 속에서 따로 노는 결과가 나옵니다. 경제의 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소수와 다수>, 어느 쪽을 선택하고 가는 정책인가에 대한 불신이 싹튼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 속에서 <이쪽을 빼앗아 일부는 산다. 형평성이 무너졌다>라는 생각이 싹틉니다. 거기에 난데없이 일본이란 괴물하나가 보이고, 다시 수탈경제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미네르바님의 <천민경제학>은 사실상 이 <수탈경제학>에 대한 지독스러운 경계경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세력들은 날뛴다고 봐야 합니다.
지난 10월 10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어떤 이들에게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미네르바님을 통칭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수탈경제학>이 10월에 이어 11월에 흔들기 현상으로, 12월에는 고착화까지 이르면서 내년 초 완성으로 가고 있다는 강한 의심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분의 마음 아프심에 더욱 공감이 갑니다. 이야기하지 못하는 절필의 고통에 대해서...
글을 옮깁니다.
" 미네르바 노친네여! 자본주의 게임을 가르치려 말고 수탈경제론을 지금은 제대로 이야기 해줄 시점이 아닌가!
가 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의 어제 기자간담회 발언이 나오고 난 이후, 바로 그 시점 10월 9일로부터 이제는 정치, 경제가 동시에 하나의 패턴에 감겨드는 것이 바로 한반도의 모습이 되었다. 여기에는 수탈과 수탈에 동조하여 봉화를 올린 자, 그리고 그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만 구분되는 하나의 틀이 존재한다.
항상 지식, 상식은 어느사이 난데없는 <인지부조화>를 동반한다. 이것은 정신병이다. 내가 많이 안다는 착각, 나는 절대 당할리 없다는 자신감, 그리고 나는 상관없다는 무관심, 내가 무슨 힘이 있느냐는 소시민주의가 이런 수탈구조를 만드는 절대적인 원천이요, 힘이다.
수탈경제의 핵심은 흔들기로부터 출발한다.
흔 들리는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고자 하는, 포획하고자 하는 정해진 대상에의 접근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하나의 출발점이지 목표는 아니기 때문에 강하고, 약하게 여러 차례의 템포를 가미한다. 그러므로 경제는 일단 출렁임을 맞는다.
그 가운데 정치가 개입한다. 기획된 정치는 반대되는 세력을 포획하는 것으로부터 출발되는 듯 하지만 여기는 강도가 주어진다. 강하게 아주 강하게, 더욱강하게 라는 공식이 적용된다.
수탈 경제의 다음 핵심은 바로 뿌리박기다.
거기서는 모든 요소 요소가 장악된다. 그냥 장악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레칫 조항보다 무서운 구조화를 동반하려고 한다. 거기서 출발이 된다. 여기서도 피해나갈 수 없다면, 일단 팽창주의는 이미 이 단계에서 완성된다고 봐야 한다. 여기 이 지점은 사회가 지탱하기에는 절대 불가능한 교육과 계몽, 강압이 동시에 벌어진다. 지난 십 년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다시 앞으로 십년은 이것을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수탈 경제의 그 다음 핵심은 바로 구조화로 간다.
일 단 이 상태가 되면, 우리는 이미 노예가 된다. 과거 식민시대의 악몽은 정확하게 1921년 이후부터였다. 그 이후 우리는 정신적으로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은 과거의 경험, 과거의 수탈경험으로부터 출발되고 강화되며 안착된다. 위정자는 여기에 새로운 오적이 오십적으로 확장되어 등장한다. 그들은 왜 오적이 오적으로 불리는지를 안다.
그러므로 피해나갈 방법도 안다.
노친네여! 제발 이제는 수탈경제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달라. 지금은 그것을 알지 못하면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정신적으로 이미 죽어가는 모습이다. 이래도 급하지 않다고 이야기 할 것인가! 가짜 골든벨이 세 번 울리면 끝장이다."
패배주의에 대한 정의!!!
1) 알아도 모른 척 한다.
2)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행동한다. 아무것도 못한다.
3) 알고 당하는 것보다 모르고 당하는 게 낫다고 자위한다.
4) 이러한 자기합리화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시대전쟁 20화
: 아직도 일본의 존재를 모르는 서울? (2008.11.22)
직관이란 바로 전일적 체계의 자기-기억이다. 그것은 과정들 안에서 이력현상(hysteresis), 바꾸어 말하면 어느 체계의 진화와 (강제적) 퇴행을 가름하는 통로에 나타나는 작은 차이의 형태로 표시된다. 직관은 신경작용 과정과 아울러 대사과정을 가리킬 수도 있다.
- 에리히 얀치, <자기 조직하는 우주 새로운 진화 패러다임의 과학적 근거와 인간적 함축> 중에서
신 동아에 실린 미네르바님의 기고문을 읽었습니다. "<노란토끼>= 환투기세력" (일본이 뒷배로 했을 가능성이 큰)이라는 정의가 부각되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 대한 문제지요. 1997년 IMF를 전후한 시기 외환투기세력은 거세게 한국을 공격했습니다. 그 전후의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김인호는 법정에까지 나가게 되고, 그에 대한 반박문을 기고하다가 중단한 것으로 압니다.(끝내지는 못했지요?) 일련의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가 강하게 결합되었던 그 구도가 바로 <노란토끼>의 실체적인 정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반복 가운데 있는 <공통점 찾기>와 <차이점 분석하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아래 역시 아니나 다를까 '고베 Toshiko'는 일본이 7월부터 이런 사태를 경고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군요.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지적이 무슨 목적인가 궁금할 뿐이지요. 솔직히 지적은 항상 감사히 받습니다. 그러나 서로 예의로운 글쓰기는 해줄 필요가 있지요. 지난 7월로 돌아가볼까요.
독도문제로 한차례 한일간의 감정 싸움이 극대화되었을 때였지요. 미국이 부시 대통령 지시에 의해 독도표기가 원상복귀 되었을 때, 7.31 일본 네티즌 중에는 "한국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에 화염병이라도 던져라"는 극우성 발언도 튀어나왔습니다. 거기에 묘하게 경제위기를 예상하는 발언이 하나 등장합니다.
다케사다 히데시. 1949년생.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주임연구관. 게이오대학 정치학과 졸업. 나름대로 알려진 한반도 문제 전문가...그가 우익 신문인 산케이 전문가 의견란에 기고한 제목이 <한국은 대가가 크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대가? 그리고는 이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한국의 대외채무가 늘어나고 외환보유고는 줄어들고 있다. 장래 다시 금융위기에 빠져들 것이라는 공포도 나오고 있다. 그 때, 일본이 긴급 융자를 해줄 필요성도 나올 것이다. 일본 국민들이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할 지 의문이다."
이 발언의 한국 내 파장이 오히려 없었던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평소 열심히 한국을 까대던 산케이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가 오히려 이 발언을 '좀 멀리 나갔다'고 진화를 시도했습니다. 당시 외환보유고가 문제없다고 강만수 장관은 도시락 폭탄을 거의 세일할 때였지요. 과연 당시 다케사다의 발언은 개인적인 것이었던가? 그의 지난 발언들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게 합니다.
일본은 한국의 대외채무 증가와 외환보유고 감소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쉽게 개선되지 않을 흐름을 가졌다고 알고 있었다는 거지요. 당연히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질 것이며, 그것이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으로 작용하고, 마침내는 일본의 <긴급 융자>라는 형식-이것이 스왑이건 정말 융자이건-을 가질 것을 예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황에서 한국이 실질적인 가용 가능한 외환을 빌릴 곳이 일본 뿐이라는 확신도 있었겠지요. 그런 차에 일본은 기다립니다. 일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지원규모가 적다면 모를까 점점 많아지는 상태로 가면, 한국은 일본에 무엇을 내밀면서 약속을 해야 하는가? 그에 초점을 맞추면 지난 7월이 얼마나 무서운 때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직전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아소 다로에게 자리를 내줍니다. 아소 탄광으로 한국민에게는 징용의 한을 준 자의 집안이고, 태안반도 일대에 아소 가문의 영지를 만들고자 일제시대 산림을 훼손했던 것이 두고 두고 말이 되는 사람입니다. 물론 '대동아 전쟁'이라고 그냥 툭 말할 만큼 극우에 가깝지요. 그가 알고 등장하듯 그 시기를 맞추어 올라옵니다. 일본에서 '친한파'는 '일본 제국주의를 당연히 사며 한국과는 (말을 잘 들으면)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사람이지만, 아소 다로는 그 친한파조차도 아닌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존재감에 대한 직관(直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겠지요. 일 본을 바라 보는 관점에서는 '좋은 일본인'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본'이 우리에게 보인 적은 별로 없지요. 지난 백 년여 역사에서 일본은 분명 변하지 않은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한반도는 여전히 그들이 식민지배했던 곳이며, 여전히 다루기 좋거나 편한 측면이 많다고 본다는 겁니다.
IMF이후의 10여년...그것은 1945년 이후에는 처음 나타난 <현장>이었습니다. 금융이 개방된 한국은 어떤 형태로건 외부로부터 취약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고...그것이 미완성일 경우에는 반드시 어떤 특정한 부분과 형태에서...그를 침식당한다는 사실을 너무 간과했던 듯합니다.
2008년 오늘, 이것은 하나의 구체적인 사실들로 드러납니다. 다케사다 히데시의 발언은 그 말 한 마디로 사실상은 <협박>이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그걸 감추기 급급했던 이유를 가진 사람의 <진짜 이유>가 듣고 싶다는 소망은 큰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감추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한 번 더 묻습니다. "지금 내미는 조건과 족쇄는 어떤 것입니까?"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읽기 [제 3 부]
*출처:http://coreannight.springnote.com
* 1,2,4,5부는 위 사이트 참고 바람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행장(行狀)을 꾸리다.
= 목 차 =
들어가면서
1. 제국주의와 <친일의 재구성>
2. 일본 극우(極右)의 탄생과 확산 친일기획자의 태동(胎動)
3. ‘다시 백 년’(又100)의 출발점과 집중 테제
4. DJ연대기를 통한 친일의 학습효과
5. DJ-일본 커넥션, 그가 죽어야 터진다?
6. 안병직, 친일의 사냥개(Hound)를 양산하다.
7. 뉴라이트 화(化)? ‘일제지배 찬양파’를 양성하다.
8. Cult Japanophilism
9. 친일기획자의 괴수 일왕(日王)
10. ‘친일 이해의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했던 이유
11. ‘개별적 이익’이 겨레를 슬프게 한다.
12. 잡설(雜說)
13. ‘고시치노 기리’ 아래 고개 숙이다.
14. 1차 마무리를 하며
들어가면서
어쩌다 보니 다시 비망록을 쓰게 되었다. 아니 이렇게 글을 쓰는 상황 자체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니 사실 마음이 참혹할 지경이다.
한 사회 국가가 처해진 가장 나쁜 경우의 수를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본다면, 오늘 ‘대한민국’이란 주체는 확실히 정체성과 함께 정통성마저 상실하기 일보직전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친일매국세력을 끌어 들인 죄값이다.
1910년 경술국치는 한 시대가 처할 수 있는 국체(國體)가 어떻게 침략당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그래서 이러한 일은 세계에서도 보편화된 현상이라고 봐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확실히 끈질기다. 그들에게는 2010년이 적어도 자기네끼리 특별하게 기념할 날이 되는 모양이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집요하게 서울을 공략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의 한국의 모습이다.
MB 정권이 2008.2.25 공식적으로 출범하기 전, 작년12월 대선이 끝난 직후 나는 그들 집권하려는 세력들과 접촉을 개시했다. 그들에게 오늘의 시대를 어찌 보는 지, 봐야 하는 지 나의 의견을 알려주려 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 수용하는 척 했지만 결국 거부했다. 그나마 집권을 하게 되면 올바른 정책을 펼 것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일본이란 요소를 선거 국면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팽개치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일부 여지나 근성이라도 MB에게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도 그가 추구한 것이 박정희 식 변형된 우파 민족주의의 끄트머리라도 있으면 말이다. 그러나 없었다.
뉴라이트는 이제 전면에서 한국 사회 국가 전반을 농단(壟斷)하고 있다. 바야흐로 ‘친일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지난 14년 간 나는 이 무거운 짐을 안고, 일본의 한반도 재침기획자들과의 머리싸움을 벌여왔다. 그 말이 옳았다. 이런 ‘개싸움’, ‘막싸움’에는 논리보다는 행동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 그들은 나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고 그래서 MB 정권을 탄생시켰다. 일개 처사(處士)가 이들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단지 그들의 행적을 지금까지 쫓아온 기록은 남았다.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그나마 선후를 정리할 수 있는 경험도 있다.
그래서 일단 2008.6.30~7.14까지 제1부를 그리고 7.27 제2부로 나누어 서울이 당면하고 있는 친일매국세력의 공격 상황과 현황을 정리했다. 설명코자 한 것 가운데 ‘친일의 재구성’이 정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일제 강점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解放) 되었는가? 지금 우리가 시대와 역사 속에서 독립(獨立)을 누리는가? 이 질문으로부터 이 작업은 시작되었다.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기획자에 의해 서울이 강하게 포획(捕獲) 되었다. 친일매국세력은 한국 사회 국가를 완전히 장악했고, 그들의 촉수는 건전한 한국 내부의 정신마저 파괴하기 시작했다.
촛불민심이 간들간들하다.
수동적 지식인이나 우매한 지식인이 넘쳐난다. 일본기획자의 철저함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더군다나 정권을 탄생시킨 친위세력입네 하면서 뉴라이트는 이제 드러내 놓고 친일의 행각을 펼친다.
그래서 제3부의 기록을 남긴다. 이 기록은 순서가 없다.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굳이 형식에 메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앞선 제1부, 제2부로 충분하다. 그래서 이 기록은 ‘날 것’(生物)이다.
내용이 무겁다고 이 일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친구에게 전언을 했지만 사실 무서운 일이라는 건 틀림없다. 광복 이후 63년간 아무리 서울이 친일을 묵인하면서 경제성장과 사회변혁을 해왔다고 하더라도 이런 현상마저 묵인하고 공인될 수는 없다.
제1부, 제2부를 통해 못다한 내용의 배경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시간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은 이달(7월) 말까지다. 나는 이번 8월 15일을 ‘건국60주년’으로 맞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온 행장을 스스로 이제 꾸리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기록은 정확하게 7월 31일 이전 끝날 것이다. 더는 이어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이 글에 앞서 반드시 다섯 차례의 시간대별로 앞서 작성된 제1부와 제2부를 정독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이 기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제국주의와 <친일의 재구성>
일본에게 한반도는 어떤 의미일까? 역지사지. 이 이야기로부터 출발을 해보자. 일본이란 나라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본 지도층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사상과 사고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서 일본이 가진 한반도(조선반도)는 대륙과 통하는 단순한 통로 개념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한반도는 사실상 ‘명(命) 줄’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문화젖줄이었고, 그들의 정체성을 아시아에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할 대상이었다는 의미다.
제국주의는 1870년부터 20세기 초반,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지되는 개념에 속한다. 즉, 독점자본주의에 대응하는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총칭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다른 지역에서 정치적 경제적 통치력을 얻어 세력이나 지배권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는 모두 ‘제국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일본은 1867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찌감치 제국주의의 선봉에 설 준비를 마쳤다. ‘제국주의’(imperialism)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70년 6월 8일자 영국신문 <데일리 뉴스>에서였다. 당시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하면서 프랑스 제2제정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과거의 낡은 주제가 아니라 오늘날도 거부감 없이 그대로 사용된다. 영국 켄터베리 르완 윌리엄스 대주교가 미국을 ‘최악의 제국주의 국가’로, 영국의 과거와 비교해서도 더 심각한 폭력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영국 무슬림 잡지 ‘에멜’, 2007.11.25)
직접적 영토확장은 이제 보편적인 제국주의 성향이 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정치 경제적인 장애물 제거를 위한 방식으로 군사력이 선택되어 국제사회에 개입하는 것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지만 오늘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왜 일본은 한반도를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보고 있고 봐야 한다고 믿는가?
그들이 맛본 19세기 말 제국주의 연대기는 제국주의의 본질에 잇닿아 있다. 즉, 문화제국주의(Culture Imperialism)다. 자신들의 문화를 우성(優性)으로 전파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마치 히틀러의 게르만민족 본위 정책처럼 일본의 파시즘적 제국주의도 항상 종국적으로 이를 직접, 현장을 만들어 내어 그들과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게 또한 강렬하게 그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코자 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왔다.
그 점에서 한반도는 그들이 형성한 문화의 기초를 제공 받은 통로이자 전달자였던 셈이고, 이를 흡수하여 우수성을 증명하고 재가공하는 단계를 필요로 했다. 그런 심리적 저변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에서도 별반 변한 것이 없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정책의 단계별 변화에서 너무도 잘 나타났다. 즉, 정치 경제적 통제력을 확보한 이후의 행보에서는 반드시 완전한 장악을 위한 또 다른 절차가 필요했던 셈이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는 철저히 무력적 지배를 정책수단으로 내걸었다. 강한 물리적 압박을 통해 새로운 내부적 저항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후 1920년대를 통해 선무정책, 즉, 문화정치라는 이름의 유화(柔和) 시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확장심리는 1930년대 이후 군사적 파쇼체제로 돌입하게 되고 한반도는 전쟁의 병참(兵站) 기지화 하는 데 활용되었다. 1937년 루이꼬우차오(蘆溝橋) 사건 이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일본 제국주의는 그 성세(盛世)를 잃었다.
그들에게 강력한 패배의식이 찾아왔지만 일왕을 비롯한 제국주의를 이끌었던 세력은 전혀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이들에게 전쟁과 시도는 비록 패배였지만 ‘실패한 경험’은 축적되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떠난 이후, 20세기의 냉전은 남과 북의 소련-미국에 의한 신탁통치 기간을 거치면서 서로 각기 다른 정부, 전혀 다른 일본 그림자 떨쳐내기가 진행되었다.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한마디로 한반도 남부에서는 일본이란 세(勢)가 그대로 남은 채, 보다 정확하게는 일본이 심어둔 문화 제국주의의 영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어졌다. 사람도 시스템도, 심지어는 식민지의 근성(根性)까지도 버려지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실패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친일(親日)은 한국에서 살아남았고 세력을 더 키워나갔다. 매번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들에게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하여 직접적 영토 영역에서는 물러 갔지만 그래도 수혜자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6.25전쟁을 통해 빠르게 회복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재 접근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공공연한 제국주의적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변수보다는 승전국 미국이 가진 헤게모니 때문이었다. 한국에 대한 우선권을 미국이 일본에 부여해준 바는 없었다.
1960년 일본은 미일안보조약 개정의 와중에 극심한 보수와 혁신 진영 간 대립을 맛보게 된다. 그들 내부를 정리하기조차 어려웠을 때였다. 그러나 일본은 잰 걸음을 디디며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한다. 모호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졌고 일본이 다시 한반도에 발걸음을 내딛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경제개발 연대기에 일본은 한국에 경제젖줄을 제공했다. 이미 강점기를 통해 물리력과 문화정책, 수탈을 모두 진행시켜본 경험은 여기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친일세력은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1965년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에 대해 드러난 접근을 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이란 존재는 늘 걸림돌이었고, 일본의 자체적 역량도 과거 제국주의 시대만큼 사용할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력 확장에 매달리게 된다.
70년대 베트남에서 막대한 기력소진을 한 미국은 80년대를 거치면서 미일 간에는 일정한 역할분담을 가지게 된다. 즉, 아시아에 있어 일본이란 존재에 미국이 일정한 재량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시아에서의 ‘이스라엘’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그 내용물에서 핵심은 미국의 통제 하에 있었다. 즉, 군사적인 조절력을 일본에 맡기지 않는 제한된 정치 경제적 연합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수용하였다. 그들로써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새롭게 얻은 기회였다.
90년대 한반도는 80년대 말 냉전의 종식 분위기와 함께 남북한 간에도 평화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남북 연합은 일본이 상대하기에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일본 우익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대상이며, 그들의 장기적 생존과 국익을 위해서는 명시적 지배는 아니라 하더라도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는 군국주의와는 다른 일면이다. 즉, 지배적 관점에서, 그리고 옛 영광의 재현을 위한 국가주의 차원에서 봐야 했던 셈이다.
일본은 다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일본의 극우는 1945년 한반도를 떠난 이후에도 이 땅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친일의 잔재가 남아있는 서울이 이른바 새로운 친일, 친일의 재구성을 하기에 적절한 땅이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북한은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일제청산을 무자비하게 시행해버린 북한정권 초기, 일본은 그곳에서 친일의 ‘끈’을 확보하지 못했다. 역시 첫 걸음은 ‘서울로부터’가 온당한 방법이라 판단을 내리게 된다.
2.
일본 극우(極右)의 탄생과 확산 친일 기획자의 태동(胎動)
한일관계는 해방 직후 닫혔던 문이 박정희 연대기인 1965년부터 사실상 공식적으로 재개된 상태였다. 표면적인 협력관계와는 다르게 이른바 일본 내 ‘친한파’를 중심으로 박정희와의 개별적 인연을 바탕 해서 서울과의 재 교류에 나선 셈이다. ‘친한파’. 이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친한’(親韓)이 가진 뜻을 잘 파악해야 한다. 즉,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지배가 정당한 것이었고 또한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일본의 우위에서 이끌고 가야 한다는 기본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열성(劣性)이기에 우성(優性)인 쪽에서 잘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당연히 극우(極右)에 가깝다.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일본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대륙낭인 시대를 이끌었던 자들이 바로 도야마 미쯔루, 우치다 료헤이, 사이고 다까모리 등이다.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다양한 개발과 물류이동이 항만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이들 노동자 집단은 경찰과 충돌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집단을 보호하는 낭인(浪人, 로오닝) 조직과 정치인들간 담합이 이루어진다. 국가충성을 담보로 한 폭력집단과 정치의 결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후쿠오카 사무라이 출신인 도야마 미쯔루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본 극우단체의 시초격인 ‘도시샤’를 결성하고 세력이 확대되자 대동아공영과 국수주의를 공포한 전국적 공식 극우단체인 ‘현양사’를 결성한다. 그의 심복이었던 우치다 료헤이는 ‘흑룡회’를 결성하고 만주국 설립을 위한 스파이 단체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현양사는 일본 내에서 군국주의 정당의 반대파 요인 암살을 비롯해서 중국, 한국으로 독립단체 요인암살을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일본 극우단체의 오늘날 모태라고 불리는 ‘대일본 국수회’가 1919년 도야마 미쯔루에 의해 설립된 이후, 이 조직은 일본 전역의 야쿠자 세력을 통합하고 정치적 결탁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1920년 야와따 제철소 파업 노동자 테러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도 대일본 국수회는 동양척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토지조사 업무로부터 종군위안부 색출 모집 등까지 하부조직으로 기능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후 일본에서 새로운 조직인 ‘쿠렌타이’가 등장, 항만을 중심으로 한 야마구치 파벌이 최대 야쿠자로 등장했고 요코하마에서 이나가와 가쿠지 파벌, 도쿄를 중심으로 스미요시렌꼬가 결성되었다.
제1세대 이른바 대륙낭인 시절 이후 등장한 제2세대는 이러한 변화를 이어갔던 중간에 걸쳐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고다마 요시오, 사사까와 료이찌, 기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만주국 관료로부터 일본군 특무기관원, 그리고 대일본 국수회, 흑룡회 등을 거친 인물들로 전쟁 시기 마약과 밀수, 매춘, 금광, 도박 등에 관여하면서 전후 일본의 야쿠자 조직들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보스 위의 보스’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1955년 이후 정권을 내어준 적이 없는 자민당과 깊게 결속되어 있고, 실제 공식적이라 불러도 좋을 정치산하조직으로 편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야쿠자는 공안청의 비호 또는 언터처벌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야쿠자의 총보스는 누구일까?
1960년대일본을 방문, 사사까와 료이치와 수 차 만났던 작고한 서북청년단 출신 대한민국 건국회의 인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왜 야쿠자의 성향이 극우인가, 왜 충성맹세가 필요하고, 그들 내부의 강령에서 ‘국익이 제1번’이 되었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해준 말이었다.
"일본 야쿠자의 대장이 누구냐? 일본 야쿠자는 드러난 사람은 다 똘마니들이야. 진짜 대장들은 얼굴을 안 비치지. 그 위에 또 본부가 있고, 그 위에도 있어. 이들이 진짜 야쿠자지. 이 사람들은 매년 누구한테 새배를 가는 줄 아나? 바로 일왕이야. 그러니까 야쿠자 보스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일왕이 최고 보스라는거야."
사사까와 료이치의 케이스는 드러난 극우조직의 변신 행각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 국수회에 소속되었던 사사까와는 1931년 국수대중당이란 초(超)극우 정당총재로 조선, 만주, 중국 등지의 대동아공영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가미가제 특공대의 전신 조직을 창설하는 데 참여했고, 만주 항일 유격대 토벌에도 깊숙하게 관여했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3국 동맹 외교에까지 개입했었다. 전후 A급 전범으로 3년 형기 중 미국에 대한 충성서약을 쓰고 나와서 일본 내 각종 도박사업에 간여하게 된다. 경정(競艇) 사업이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사사까와는 일본선박진흥회를 이끄는 일본 최대의 선박왕으로 군림했다. 아울러 야쿠자 조직의 대보스로써 전후 사회주의자 탄압을 비롯, 일본교원노조 분쇄 등에 직접 개입했다. 전형적인 정치 야쿠자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 그가 슬그머니 서울을 향해 공개적으로 움직인 것은 1970년대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대체로 일본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건국회 등으로부터 한국의 반공극우단체들도 사사까와의 초청에 의해 일본을 방문한 전례가 있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 끝에 그는 서울에 등장한다.
70년대 후반 그는 일본보건재단 회장 명함으로 한센병(나병) 환자들을 위한 나병연구원을 안양에 신축, 정부 기증하였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참석했으며, 그는 이 일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기도 하였다. 한센병과 관련된 일은 지금도 그 아들 사사까와 요체이(사사까와 재단 현 이사장)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무료약품 지원이나 한센병 환자의 사회활동 지원 명목으로 매년 복지금이 기탁되고 소록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80년대 서울의 혼란기에 그는 가급적 대외활동을 자제하다가 80년대 중반 ‘사사까와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고려대를 비롯한 몇 개 대학에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 활동은 1995년 일본선박진흥회가 사사까와 재단에 출연하여 연세대에 한일협력연구기금을 100억원 규모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연세대 교수협의회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칭을 ‘일본기금’에서 ‘아시아연구기금’으로 바꾸어 그 후 10여 년간 사용되어 왔다. 사사까와 재단(평화재단)은 한국뿐만 아니라 몽골 등지에서도 활동을 하는 중이며, 서울의 다양한 행사에 그 이름을 내걸고 있다. 90년대 후반 이후 일본기금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특별한 사건, 이를테면 독도분쟁 등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때 잠깐 거론된 이후, 부정적으로 회자되는 경우도 많지 않은 것이다.
이를 테면 2004년 8월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 개최된 ‘영국 아시아 우표 워크숍’의 경우도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사사까와 재단이 재정적 지원을 했던 행사다. 모든 경비는 주최측이 부담했으나 실제 후원자는 사사까와였던 것이다. 워크숍의 제목은 ‘우표는 비정치적인 것인가? 정치, 사회현상의 연구자료로서의 동아시아 우표’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일본은 한반도에 극우의 시대를 여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극우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하고 아울러 정치와의 끈끈한 결합을 통해 조직화되었고, 이제 민간을 표방한 우익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유의해야 하는 점은 이러한 활동이 모두 정치권과의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는 수시로 바뀌지만 그 하부조직은 그대로 국가의 중추가 되고 있다. 당연히 이들 대륙낭인으로 출발해서 야쿠자와 비즈니스, 사회사업 등 전반적인 작업들을 하는 조직마저도(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두 일련의 연계성을 가지고 출발된다는 사실이 일본의 국가시스템인 것이다. 적어도 이 구도를 알지 못하고 ‘친일의 재구성’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일관계의 역사에서 이들 그룹이 가진 영향력이 오히려 공식적 외교관계보다는 훨씬 상위에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이나 일본,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상호 간의 유대감을 기초로 한 접근은 대개 은밀한 법이다. 특히 한일간에는 그렇다. 앞서 거론한 ‘친한파’ 그룹은 서울에서 자신들의 뜻에 공조하는 사람들과의 결속을 어떤 형태로건 강화해 왔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견제도 했다.
해방 이후 역사에서 그래도 일본으로부터 직접 연계에서 자유로웠던 단 한 번의 대통령은 노무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가 시대에 처했던 중요한 위치를 감지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친일세력을 서울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마지노선이 되어야 할 ‘정권’의 시대적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그렇게 노무현 시대를 통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배후에 ‘친한파’가 없고, ‘일본(당국자)’이 없으며, 그리고 이들 극우의 행동 전위가 없다고 한다면 세 살 박이 어린아이도 웃을 일이다. 노무현이 간과하고 놓쳐 버린, 그리고 대응한다고 하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눈을 돌리는 사이 친일은 성큼 재구성을 하자고 덤벼들었다. 이것이 바로 ‘친일기획자’의 본질적 면모였던 것이다.
3.
‘다시 백 년’(又100)의 출발점과 집중 테제
1995년경. 김영삼 시대가 시작되고서 일본은 한국에서 더 이상 군부독재가 나타날 소지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4.19로부터 5.16을 거쳐, 다시 5.18과 6.10까지 겪은 후에 독재정권 타도의 기치는 김영삼이라는 비록 신한국당이라는 보수정당이긴 했지만 문민의 정부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직접민주주의의 성취가 있었고 더 이상 굵직한 사회 테제가 나오지 않을 만큼 경제적 호황까지 겹친 상태에서 소위 ‘운동권’은 존재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김영삼-김일성 간 정상회담까지 예비되었던 남북한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북한 패망론이 힘을 얻으면서 북한에 대한 고립정책이 오히려 과거 어느 때에 비해서도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유례없는 상중통치(喪中統治)가 이어지고 있었고, 북측 권력 상층부의 소식들은 외부로 새어 나오지 않은 참에 김정일 체제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대두되며 부풀려 질 때였다. 그만큼 김일성이란 인물이 가진 카리스마는 컸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본기획자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작업원칙을 세우게 된다. 첫째, 2010년을 겨냥한 조선반도 재 상륙을 개시한다. 둘째, 서울에 대한 친일의 방식을 재구성한다. 셋째, 가용 가능한 전 자원들을 현 시점부터 확대 관리한다. 넷째, 이 기획의 명칭은 잠정적으로 ‘다시 백 년’(又100)으로 한다.
이 프로그램(기획)은 당시만 하더라도 초 극비로 분류되어 진행되던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이 기획의 초창기 단계에서 여러 누수(漏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관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완비된 상태는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집권 이후 해외의 정보 네트워크를 오히려 줄이는 방향을 선택함으로써 이런 정보를 잡아내지 못했다.
특히 정권 초기의 조직개편 와중에서 해외정보 수집력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 때가 아마도 정보기관이 발족하고 난 이후 가장 많은 시련을 겪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김영삼 시대를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젠 더 이상 누가 목 내놓고 일하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당시 은퇴를 몇 개월 앞둔 정보기관의 한 사람이 했던 이야기였다.
일본의 대한 활동이 (이렇게 까지 다른 목적의식을 가지고) 깊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 측면도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미국이 지배적인 정보활동을 하고 있던 서울에서 기를 펴지 못했었다. 당연히 이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한미간의 채널을 통해서 걸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 정보기관은 보았던 듯 하다.
그렇지만 미국에게는 미일 관계는 또 다른 종속변수였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울에 알려줄 의무는 없었고, 오히려 알고 나서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을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서 미국 정보기관조차도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그랬다. 서울은 김일성 사후 북한의 동향을 구하느라 오히려 분주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깊어지고 있었다. 속속 아사(餓死)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지만 중국을 통한 탈북자들의 행렬을 처리하느라 정보기관은 정신이 없었다.
1997.2.12 조선로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이 베이징 발 평양 행 국제열차를 타지 않고 북경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신청을 하게 된다. 그의 망명은 서울에서 북한 붕괴론의 정당성으로 즉각 포장되었다. 주체사상의 틀을 짠 사람이 망명했으니 이제 북한에서 주체사상은 포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알맹이가 빠진 상태에서 국가가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체제는 동요될 것이고 김정일 체제는 온전하게 운영되기 어렵다는 논리였다. 그의 망명을 둘러싸고 측근비리로 인한 것이라는 등의 기사가 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렇게 활용할 자원으로 기획망명을 시킨 것이었다. 꼭 이것이 원인은 아니지만 그 당시 서울의 권부는 많이 들떠 있었고 제대로 돌보지 않은 국가경제는 조용히 침몰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개인적으로 일본을 자주 방문했었다. 내가 가진 관심은 일본기획자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친일의 재구성’을 진행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주목했던 분야는 네 방면이었다. 첫째, 경제적 접근. 둘째, 조직(야쿠자)을 통한 침투. 셋째, 재일동포(총련)의 활용 가능성 여부. 넷째, 세포(사냥개)를 어떻게 양성하는가.
그 과정에 일본 공안청이 금역으로 대하는 몇 개의 대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쿠자, 창가학회, 재일총련이 그것이다. 왜 금역(언터처벌)인가?
야쿠자의 경우는 명백하게 보인다. 그들은 일왕을 상전(上殿)으로 하는 충성조직이다. 창가학회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에 대해서는 말이 참 많다. 지금 나이 여든이지만 여전히 활동이 활발하다. 그가 교주이며 리더라고 하는 주장에 일부에서는 창가학회가 회원중심 조직이기에 회장이 무소불능의 권능을 가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공명당의 공천은 그가 한다. 일본 공명당은 창가 스폰서이고 서포터이다. 더군다나 창가학회는 비밀스런 일이 적지 않다. 야쿠자와의 관계? 당연히 밀접하다.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山口) 본사(총본부)가 운영하는 비밀비선 ‘구미’(組) 하나가 그들의 수족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공안청의 입장에서는 쉽게 건드릴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창가학회나 공명당도 야쿠자와 같은 우익, 그것도 극우에 가깝다.
총련(總聯)은 90년대 언터처벌 신화가 무너진 상태다. 조금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공안청의 적극 개입으로 사실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기회가 있다면 따로 해보도록 한다.
관건은 일본의 우익은 조총련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차피 걸려 있는 것이 평양인 사람들이고 이들을 세포화해서 활용 가능한 부분도 서울은 아니다. 평양까지 일본기획자가 당시 손을 쓸 때도 아니었다. 황장엽의 망명, 고난의 행군 시기, 늘어나는 탈북행렬 등 오히려 북한의 국가붕괴에 대해 신경을 쓸 때였다.
그러나 재미난 사실도 발견되었다. 일본 우익은 야쿠자를 통해서 일정 수준 북한과도 교류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고 자동차 판매나 굵직한 평양 발 마약밀매 등에 관여되는 모든 일들은 일본 공안청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머지 두 가지 문제의 확인이 필요했다. 경제와 세포(사냥개)였다.
4.
DJ연대기를 통한 친일의 학습효과
경제적 관점은 1997년경에 서서히 드러났다. 일본은 서울의 경제위기를 점치고 있었다.
후카가와 유키꼬(당시 일본 장기신용은행 연구원)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녀는 정확하게 IMF사태가 오기 2년 전에 한국에서 유동성 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이상하게도 서울은 그에 대응하지 않았다. 지금 강만수 장관이 하는 것처럼 그 때도 비슷한 패턴이 계속되었다. 물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김영삼 정부는 확실히 뭔가에 취해 있었다. 1997.11.10 홍재형 당시 부총리와 통화하기 전까지 그는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까맣게 몰랐으니 말이다. 정권 자체가 정치와 선거에 모두 미쳐 있었다는 표현이 옳다.
결국 IMF 구제금융합의서와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가 12.3 체결되고 대기성차관 75억불, 보완준비금융 135억불 해서 210억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00억불이 한국경제를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환율방어를 위해 최근 강만수 장관이 사용했던 돈과 바로 비교가 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았던 것이 일본이 개입하는가 아닌가, 어느 수준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매우 중요했던 대목이다. 11.28 부총리 타이틀을 단 임창열이 급하게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 대장성 장관을 일본에서 만났다. 대답은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구제금융을 일본이 해결해줄 수 없다는 대답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참 지난 후이지만 당시 미재무장관이 미쓰즈카 대장상에게 한국에 대한 금융제공을 보류하고 IMF를 받게 하라고 권유했다는 말이 돌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IMF는 한국 경제의 운용 착오도 있지만 국제금융시장이 한국을 대상으로 ‘겨냥한’ 측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 대비를 못한 정권의 잘못이란 걸 되돌이킬 수도 없다.
한국은 그 이후 97.12.11 자금시장 개방, 98.2.15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5.3 외국인 투자업종 개방 확대, 7.1 1차 공기업 민영화 방안 발표, 8.17 2차 공기업 민영화 방안 발표 등 숨가쁘게 IMF의 경제개혁 요구를 받아들인다. 숱한 기업들이 부도, 파산되었고, 외국기업의 손으로 넘어갔다. 외환보유고 관리의 실패, 과도한 해외단기차입금, 환율운용정책 실패, 그리고 금융기관의 부실, 재벌기업들의 업종전문화 추진 미비 등 원인을 거론하지만 이 사태의 결과로 국민들의 생활패턴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한국사회를 지탱하던 중산층이 한꺼번에 몰락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고, 사회안전망을 구성하던 30~40대를 끝없는 생존경쟁 속으로 몰아 버렸다. 빈익빈부익부의 계층화 현상이 뚜렷하게 생겼다. 수직적 사회체계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사회구조가 형성되면서 다수의 보편적 사회관념도 송두리째 바뀌었다.
일본은 미국의 만류가 없었다면 개입했을 것인가?
그렇다고 본다. 200억불로 한 국가 경제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터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남이 요리해서 차려둔 밥상으로 들어갈 손님이 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손을 놓고 있기 보다 약간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97년 말경의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정치는 경제의 텃밭 이었다.
정권 말기 그것도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채 IMF 구제금융을 받는 사태는 서울 정치판도에도 분명 큰 변수로 작용했다. 정권교체가 벌어진다. 김영삼도 3당 합당을 통해 군사정권이란 범 아가리에 들어갔다고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보수적 성향이었다고 보면 이번은 격변이랄 수 있는 완전한 정권 변화였다.
IMF 사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회창은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김대중과 30년 친구였던 하라다 시게오의 증언(월간조선 2002.5)은 창가학회와 김대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창가학회의 60만 표가 김대중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한국SGI는 이를 부인했다. 아주 강력하게 반발했다. 기사를 쓴 월간조선의 우종창 기자에 대해 강한 자극적 비판도 있었다. 창가학회(SGI한국불교)가 가진 시스템상 ‘이케다 다이사쿠가 회장이지 교주는 아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 개연성은 높다. 왜냐하면 그 사건 이후 오히려 이케다 명예회장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는가는 숱하게 일본에서조차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2002년 시점이라면 김대중 정권 말기였다. 이런 강한 반발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때이기도 했다. 정권이 끝나가는 마당에 구설수에 오른다고 해서 뭐가 대수일까 싶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질 무엇이 있겠는가 거꾸로 생각도 들었던 장면이었다. 물론 종교를 표방하는 집단의 입장에서는 이런 정치적 담합에 참여했느냐 아니냐는 종교진실성과 맞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창가학회가 공명당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는가.
일단 그 부분은 차치하고 과연 그 수치라면 당락(當落)을 결정했는가? 실제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회창의 득표차는 39만 표에 불과했다. 당락이 그 안에 있었다.
창가학회 이케다 다이사쿠의 힘은 대단했다. 김대중도 그것을 인정했다. 75년 이후 꾸준히 사단법인을 추진해왔으나 실패를 거듭하던 한국SGI는 2000년 4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취득한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인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발 종교단체의 서울 상륙을 인정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창가학회는 공명당을 사실상 거느리고 있는 일본 정치조직이며, 일본 내 백도(白道)와 흑도(黑道)를 가리지 않는 종합 비즈니스 체제를 갖춘 거대세력이다. 그리고 난 이후, 2000.9 김대중은 ‘한국SGI가 1999년 강원엑스포를 통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면서 그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데까지 이른다. 완벽한 인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일본기획자의 입장에서 이것은 거의 꽃놀이패가 잡혔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정치와 경제를 동시에 활용 가능한 집단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사사까와 재단의 경우도 그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제국주의 일본을 떠올리게 되어 있다. 자금을 집행하려고 해도 이미 여러 차례 서울에서 반발을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창가학회는 다르다. 교세가 일정 수준 갖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재단법인화가 이루어지면 융통성이 생긴다. 거기다 1999년부터 자민당과는 정책연합을 시작했다. 전위이자 당사자가 되는 꼴이었다.
김대중은 반일(反日)도 배일(排日)도 아니다는 하라다 시게오의 이야기는 분명 일본당국자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창가학회의 선거 지원은 없었을 테니까. IMF 사건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근소한 표차가 이야기 하듯이 이회창 대세론은 분명했다. 그것이 뒤집히는 극적인 지원에 과연 반대급부가 창가학회의 재단법인 승인하나 밖에 달랑 없었겠는가.
IMF는2000.12.4 노벨상을 타러 떠나기 전 김대중이 ‘IMF (제재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끝이 났다. 공식적으로는 2001.8.23 구제금융 195억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IMF 관리체계를 졸업했다. 그러나 1997.12월 이후 약 3년간의 엄혹했던 IMF 체제 하 한국 사회는 곳곳에 시퍼렇게 피멍을 남겼다. 사회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안정적 사회유지 세대와 집단이 모두 경제적인 활로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바쁜 삶을 만들었다. 정치에도 신경이 무뎌지기 시작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한편으로 보면, 김대중은 IMF라는 상황을 극복하였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최초의 남북간 정상급 대화통로를 개설했다는 점에서 그를 뛰어난 대통령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어두운 그림자도 만만치가 않았다. 남북 간에 정치적인 거래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남겨버린 선례는 이후에도 서로가 필요할 때만 활용하는 정치적 ‘화장질 거래’를 고착화시켜 버렸다. 경제적으로는 IMF라는 특수한 환경이기는 했지만 경제체질의 개선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면서 사회 계층화가 고착화 되었고 그에 따른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공과(功過)는 여러 모로 따져볼 일이겠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바로 친일(親日)의 발판을 공고하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창가학회 하나의 재단법인을 내준 것이 아니었다. 일본이 서울로 상륙하는 대로를 열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사채 대부업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1997년 12월과 1998년 5월 경제체제 개혁과 맞물려 자금시장 개방과 외국인 투자업종이 개방되면서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 분야는 철저하게 일본의 몫이었다.
사회의 하부가 경제적으로 점거되기 시작했다. 벤처 투자 열기가 이어지고 일본 자금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투자펀드와 채권의 스왑 거래 형식으로 한국 경제의 저변으로 침투했다. 그 길에는 다른 길 하나가 있었다. 바로 ‘뉴라이트를 위한 길’이었다.
어떤 조직이건 간에 하부 세포(細胞)를 갖추기 위해서는 나름의 명분이 쌓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충성이냐 실리냐, 그도 아니라면 뭔가 얻는 게 무엇인가 하는 교환행위가 반드시 붙는다. 종교나 조직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를 구성할 수 있는 자금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본기획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 내에서 정상적으로 투자되는 기금들을 뽑아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를 목적으로 서울에 재단법인을 설립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친일세력을 갖추기 위해 (일본에서) 서울에다 법인 하나를 세우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사관 옆에 붙여두는 문화센타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는 다르다.
그들은 재단법인이면서도 사업방식이 있다. 일본의 창가학회와 한국SGI가 장부상으로 금전적인 교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진다. 종교법인에 대한 감사는 이루어지지 않는 게 서울의 실정이다. 그리고 창가계(系) 기업을 활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일본에서 서울로 투자되는 자금이 창가계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도 없다. 공공연하게 하지 않는다. 나중에서야 다른 사건이 벌어지면 그제서야 ‘저것이 창가계였구나’ 하는 것이 일본 내의 실정이다. 하물며 한국은 더 파악이 어렵다. 스왑 거래도 있다. 전형적인 상계방식이다.
90년대 말부터 일본은 ‘엔케리 자금’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일본 내 제로금리 상황에서 투자가치가 높은 해외로 움직였다.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5.
DJ-일본 커넥션, 그가 죽어야 터진다?
조금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어차피 이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서 김대중 연대기 일본 세(勢)의 서울 정착을 설명하기 어려우니 한 마디를 보태보자.
김대중 비자금 사건은 숱하게 거론되었지만 그 실체로 드러난 것은 권노갑이 현대그룹으로부터 받은 뇌물혐의와 실형선고 사건만 있을 뿐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관리를 했다는 걸 보여준다. 권노갑의 경우는 오히려 그 금액 수준으로 땜질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는지도 모른다.
박지원의 경우도 비슷하다. 김영완의 집에 있던 비자금 150억에 대해 무죄가 내려졌지만 대북송금특검은 유죄를 받고 다시 사면 복권의 과정을 거쳐 18대 국회 입성까지 했다. 이희호까지 나섰지만 김홍업은 낙선하고 말았다.
여전히 김대중은 여기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1996년 대선을 앞두고 강삼재가 김대중 비자금을 폭로했지만 선거가 끝나고 이내 묻혀 버렸다. 그 후 5년 간은 사실상 정권시기이니 어느 누구도 쉽게 건드리기는 어려웠다. 정권 말기부터 다시 이 문제는 대두된다. 뉴욕 비자금과 관련 밝혀진 것만 해도 3억 6천만불이라는 설(說)로부터 여러 풍문들로 이야기되는 규모도 각각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되어 있다.
비자금 조성을 추측하는 이들이 꺼내는 경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현대에서 조성된 자금 일부가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둘째, IMF 기업정리 차원에서 몇 개의 게이트를 열고 우량기업을 외국에 팔거나 재벌기업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생성했다. 셋째, 기관을 동원해서 시중 금융기관에서 부실처리 가능한 자금을 형성하여 조성했다. 넷째, 국내 대기업과의 결탁에 의해 자금 조성을 하고 이를 그에게 관리권을 맡겼다. 다섯째, 비자금이 벤처 열풍이 불 때 코스닥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안전한 거래소로 빠졌다. 여섯째, 박지원의 출소를 기다려서 부동산으로 비자금이 투입되고 있다는 등이다. 의외로 비자금의 보관 장소는 미국이 첫 번째, 그리고 서울이 두 번째로 언급된다. 작년 김대중의 미국행도 사실상 자금의 관리를 위한 것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한화(최승연)와의 특수한 관계도 떠돌았다.
어느 것이 옳다 아니다 지금 자세히 따질 게재는 아니다. 김대중의 사망과 함께 이 사안은 어느 시점에선가는 반드시 다시 대두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일본친구 하라다 시게오의 말처럼 ‘김대중은 아내와 자식, 조카들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말이 딱 적합하다. 거기에 보태서 최측근의 경우도 관리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동시에 존재했다고 보여진다. 권노갑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그러므로 사건화는 될 일이지만 김대중-노무현으로 그나마 정권이 승계가 되면서 많은 부분은 묻힐 시간을 번 것도 사실이다. 또한 당사자라 하더라도 이 모두를 알 도리는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배달사고로부터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누실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니까. 그렇게 본다면, 김대중 비자금은 김대중, 이희호, 아들들, 친척, 그리고 측근들로 요소가 나누어진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의 공집합도 있을 터이다.
냉정하게 보면 뉴욕 현금 가방 배달설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증명한다고 했지만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없다는 취약점이 있다. 구체적 건물과 보유 금액까지는 나온다. 이를테면 김대중-김홍업-이수동-홍성은-이의근 등으로 연결된 라인이다. 그러나 증빙이 완벽하지 않으니 주목 받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이 사안 자체는 그렇게 쉽게 노출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그만한 준비 없이 해낼 수 있는 ‘비자금 조성’ 행위는 아니란 것이다.
한 사례만 보자면, 현대로부터 받은 150억 원을 보관했던 김영완은 원래 권노갑의 자금담당이었다. 권노갑-정몽헌 간의 미팅에는 꼭 끼었다. 그런 그가 묘하게도 어느 날 김영완의 집 기사와 가정부와 결탁한 강도들에게 가지고 있던 무기명 채권을 비롯해서 금고를 홀라당 털리고 만다. 그와는 관계없이 불거졌던 현대 뇌물사건의 당사자였던 박지원은 김영완이 미국으로 도망가 돌아오지 않는 사이 무죄를 선고 받게 된다. 그렇게 마무리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다들 여기지만 그렇게 해버리는 것이 법조권력과 정치인 간 일종의 묵계처럼 되어 버렸다.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은 필요하다. 필요악이다’라는 식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 이 사건의 경우는 강도사건을 저지른 행위자조차 제대로 대질하지 않았다. 김영완이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관건이 된 150억 채권의 행방도 묘연해진 상태에서 종료되어 버린 케이스다.
더 심한 것은 정몽헌 회장 자살사건이다. 월간조선이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뭔가 있을 거라고 다들 생각한다. 그러나 밝혀지는 과정은 첫 단추부터 쉽지 않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문다. 심지어 그 직접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현정은 회장마저도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다. 그 사람들은 무섭다’고 한 발 뒤로 뺀다. 취재했던 기자들은 자신들이 취재 과정에서 ‘알지만 입을 열지 못하는’ 여러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들’의 입이 무섭긴 하다.
그러니 무서운 당사자가 세상에 사라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일은 너무 많다고 봐야 한다. 내가 모르는 일을 거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여기에 김대중-일본 간의 커넥션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연 김대중 비자금과 일본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인가?
2002.11.1. 서울중앙법원 형사합의23부에서는 묘한 판결이 나왔다. 김홍업, 그의 ROTC동기 김성환, 후배 이거성, 류진걸 등에 대한 재판선고였다. 대통령 아들을 등에 업고 새한그룹 등에서 수뢰를 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2년~5년, 추징금도 5억5천에서 18억 6천만원이 판결되었다. 이중 한 인물인 ‘이거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일본커넥션’을 자주 이야기했고 그것이 바로 김홍업 비자금이라고 했다. 물론 수형생활 중의 ‘떠벌린(과장한) 것’일 수 있었지만 ‘이 내용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작은 것으로 들어왔다. 말을 잘 맞춰야 하는데 서로 잘 만나지를 못하겠다’ 라는 이야기에 이르면 내용은 조금 달라진다.
이거성은 권투 동양챔피언 출신으로 풍산 프로모션을 운영했다.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성을 데리고 있었는데 2000년 일본의 총련계 복서 홍창수와 리턴매치를 성사시킨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홍창수는 일본명 도쿠야마 마사모리로 불리며, 그 이후 9차 방어전까지 성공했다가 타이틀을 잃은 후 2005년 13개월 만에 챔피언에 다시 오른다. 그리고는 2007년 은퇴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왜 한국 국적을 취득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불편해서’라고 짧게 대답했다. 연세대 어학당에서 몇 개월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작년 밝힌 바 있다. 2001.6 북한도 방문했고 당시 ‘노력영웅’,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바도 있다.
그렇다면 이거성이 이야기한 일본 커넥션은 어디인가는 가능한 대상 초점이 된다. 그가 말한 일본 내의 라인은 ‘야마구치구미’였다. 일본의 대개 격투기 흥행이 그렇듯이 야쿠자가 개입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홍창수의 복귀전이 오사카에서 열린 것도 흥행이 목적이긴 했지만 그 곳이 그의 패트론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쿠자와의 큰 거래에서는 반드시 이행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별도의 수단이 필요하다. 그는 어떻게 이 보장을 얻었을까?
김홍업은 병원-형집행정지-출소를 거쳐 나오자마자 바로 국회의원 신분을 취득하려고 했다. 4.25보선이다. 그가 세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신분을 얻어야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홍업이 감옥에 있는 동안 김홍업의 몫으로 된 비자금은 이희호가 관리를 했다. 그러니까 이희호 비자금은 김대중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지는 셈이다.
이거성의 행적은 그 이후 알려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홍창수-야마구치-그 배후’에는 일본 내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 창가학회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단초가 발견된다. 그것이 바로 김윤규 사건이다.
2006년 말부터 활동을 재개한 김윤규는 코스닥업체(샤인시스템) 인수, 2007년 초 건설사 인수(세양건설)뿐만 아니라 보다 자금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들에 대한 과감한 투자제안을 북측에 하기 시작했다. 그가 뭘 믿고 이런 사업을 하겠다고 하는 건지 북측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주변의 자금을 끌어들인다’고 하지만 그의 실제 자금원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바로 이 자금을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가 늘어났다.
창가학회의 창가계 기업들은 서울에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업채권의 스왑 거래를 통해 부동산, 기업대출 등에 있어 상당 지분을 획득하고 있고, 심지어 일본자금을 사용하지 않는 중소기업은 전체의 절반도 안 된다(심지어 90%는 일본계 자금을 쓴다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금을 기준으로 한다면 최소 30% 수준은 넘는 것으로 추정됨)고 하는 수준에서 스왑형 자금 전달은 대세에 해당한다. 자금의 원천이 창가학회 또는 창가계라면 김윤규가 집행했고 앞으로도 하려는 것은 2002년 초까지 일본으로 넘어가서 관리되었던 김대중(김홍업-이희호) 비자금이었던 셈이다.
2002년 이전까지 자금의 전달 방법도 굳이 뉴욕의 교포단체가 주장하듯이 샘소나이트 가방에 실어서 나를 이유는 없었다. 자금 시장의 개방과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이 완화되었고 외국인 투자업종 개방도 확대된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회계상의 약간 편법으로도 얼마든지 자금관리는 가능했던 때였다.
이들 자금이 어느 수준으로 증식(增殖) 되었는가도 별개의 문제다. 현재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는 최초 자금이 약 3,000억원 수준이었고, 그것은 지난 7~8년 사이 일정 수준의 증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미뤄 짐작 가능하다.
김홍업은 18대 국회 진출을 시도했지만 낙선을 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변신을 하는가를 지켜본다면 일본과 김대중 비자금은 확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추후 다시 다뤄보기로 한다.
6.
안병직, 친일의 사냥개(Hound)를 양산하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많이 갔다. 김대중 연대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시간이 곧 친일이 완벽하게 숙주(宿主)를 찾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왜 뉴라이트가 활개를 치게 되었나를 우선 살펴 보자.
안병직. 그를 살펴보지 않으면 현재의 ‘뉴라이트’라는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젊은 날에는 좌파성향의 소장학자였다. 80년대 중반 그가 만난 사람이 당시 교토대 경제학과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다. 여기서 그가 내거는 것이 바로 ‘중진자본주의론’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요약하면 ‘아시아 경제는 좌파이론 주장처럼 종속적이거나 반봉건적이 아니라 후발산업국가의 이득을 취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합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 모토 하나로 안병직은 세칭 ‘낙성대학파’를 결성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뛰어든다.
식민지근대화론.
전근대 조선사회에 자본주의 맹아(萌芽)란 존재하지 않았고 개화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야 자본주의가 이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즉, 일본이 조선의 자본주의를 심었다는 것이다. 그는80년 대 후반 90년대 초반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이른바 ‘도요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근대조선의 연구’(1989), ‘근대조선수리조합연구’(1992)이 만들어진다. 이 연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그는 이대근과 결합, 이전까지 없었던 수량경제 관점에서‘과학적인 경제사 연구’,’자료를 통한 실증적인 분석’을 표방하며 가치있는 결과물을 냈다고 주장했다.
안병직은 이 연구가 3년 이상, 연구자만 14명 이상 소요되었음에도 "도요타로부터 지원 받은 금액이 300만엔 플러스 100만엔 수준"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는 무척이나 연구의 순수성에 대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다. 학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연구가 있는 것도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물론 수량경제의 관점에서 적용되고 인용된 통계적 수치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안병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기 시작한다. 정치였다.
안병직, 이병훈, 주익종 등은 이를 정치적 각도에서 해석하면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어느 사이 ‘일제의 모든 행위가 당위가 있었다’로 발전하고, 거기서 더 한 걸음을 뻗쳐 ‘현재의 일본이 주장하는 바도 모두 옳다’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순수성은 사라졌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걸음을 본격적으로 정치를 향해 옮기게 된 경로에는 90년 대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 개 단계를 거치게 된다. 첫째, IMF환경이다. 둘째, 김대중시기였다.
1974.10.5 일본 총리부에 법인으로 등록한 도요타 재단은 도요타 자동차 등의 기업부설 법인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지원을 하는 경우, 국익을 위한 경우 등 다양한 목적성을 띨 수 있다. 안병직이 받았던 주제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였다. 그는 나카무라 사토루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식민지근대화론’은 의도적 식민지 시대의 찬양이 개입되어 있다. 즉, ‘경제’라는 요소에 한정해서 일제를 들여다 보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가졌던 1930년 대 접근은 결코 근대화에 부합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안병직은 마침내 ‘종군위안부도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할 경우,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일단 모든 하부 과정이 종결되어야 하지만 식민시대는 결코 경제적 기반조성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수탈(收奪)이 동반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해방 이후 후발산업국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뉴라이트는 다시 두 가지의 요소를 끌어 들인다. 첫째, 분단의 현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우파’로 정의하면서 ‘좌파’에 대응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해방 이전의 역사보다는 해방 이후의 경제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다시 새로운 모순이 탄생한다.
안병직의 주장은 학자의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일본기획자의 후원을 받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사회에 각인하기 위한 정치행보에 돌입한다.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함께 역사학자의 영역인 근현대사를 재단(裁斷)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마침내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는 ‘대안교과서’를 2003년 내놓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논리로부터 출발한다. 중진자본주의론이건 식민지근대화론이건 간에 근현대사의 영역은 경제적 관점만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에겐 ‘경제라는 잣대’ 이외는 어느 것도 돌볼 필요가 없는 요소가 되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뉴라이트 교과서가 ‘경제발전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역사 해설서’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주장이 한국 사회 국가 내부에서 왜 반향을 일으키고 세력화가 되는 것인가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도의 첫 개념이 잘못되어 있었기에, 또 학자 종교인 그룹들이 정치적 행보를 취하는 것이 오래갈 것이라고 보지 않았기에, 더 보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폄하 해버린 것이다. 관건은 이 이론을 정작 현실 정치세력이 받아들여 교묘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IMF 환경은 이 점에서 첫 머리에 꼽아야 할 요소에 해당한다.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해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요청한 IMF 지원은 한국 사회의 고강도 경제개혁 요구를 동반했다. 강제적인 개혁이었기에 사회 곳곳에서 그 동안의 고정관념이 마구 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경제가 발전이 아니라 부도위기를 맞게 될 수 있는 환경에 처하면서 ‘경제’는 어느 요소보다도 강조되는 테제로 승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배금주의와도 다른 심리구도다. IMF라는 터널을 거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가졌던 최소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분노마저도 슬그머니 희석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어찌 되었거나 살아남고 봐야 한다는 생존지향 우선의식이 깊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권 초반기가 넘어가면서 자본시장의 개방 등 세계경제와 연동성이 강하게 부여되어 버렸다. 정권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지만 IMF 이후 채택된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은 국민들에게 경제우선주의를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는 중이었다. 물론 정치적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정권교체의 당위에서 첫 머리는 항상 ‘경제살리기’라는 주제가 올라왔다.
2004년 11월 초부터 동아일보가 뉴라이트를 ‘운동’으로 부각시켜 대대적인 기획연재물을 게재했다.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11월 23일 신지호의 자유주의 연대가 나오고, 2005년 1월 교과서 포럼, 3월말 뉴라이트 싱크넷, 11월 뉴라이트 전국연합까지 창립된다. 2006년 1월 뉴라이트 교사연합, 4월 뉴라이트 문화체육연합이 그리고 뉴라이트 재단, 6월 기독교 뉴라이트가 구성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로 간주된다. 즉, 식민지근대화론은 시작이었을 뿐 그 이후 벌어진 것은 모두 시대상황이 만들어낸 일종의 ‘정치적 선전이론’으로 이들 조직들에서 사용되고 그를 통해 연대를 가져간 것이다.
뉴라이트는 한나라당을 포획하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형성된 반 노무현 정서를 활용하면서 뉴라이트 이론(이것은 이론이 결코 아니다. 정치적 프로파겐다 수준보다 더 천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법률, 교육 등 전반에 침투시키기 시작한다.
안병직은 과연 이런 작업들이 순수하게 초기의 ‘이론적 힘’만으로 가능했다고 믿는 것일까? 다른 힘이 없이 자체적인 사회 내부의 동력만으로 이런 구성이 가능했다고 믿는 것인가?
일본기획자는 이들을 목적에 활용하는(토끼를 잡는) 충실한 앞잡이 사냥개(Hound)로 활용해 들어갔다. 사냥개는 치밀한 형식을 거쳐 포획되고 양성되었다. 그 사냥개가 또 다른 사냥개를 확산시켰다. 권력, 정치, 이권, 안전 지향자와 회색지대라는 다섯 가지 유형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안병직은 어디에 속하는가?
그는 권력 지향자이며 정치 지향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그에게는 이제 학자로써의 자격(資格)이 부여되기 보다는 정치 선동자, 나아가 친일부역자라는 명칭이 온전할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각기 목적으로 가지고 세력화된 집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뉴라이트 정권이라 해도 좋을 MB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들 내부에서 지분(持分)을 나눠가지듯이 일본기획자도 이들을 통해서 이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근접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도 안병직이 이런 방향을 선택했다면 그는 친일매국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는 ‘친일의 기계’일 뿐이다.
7.
뉴라이트 화(化)? ‘일제지배 찬양파’를 양성하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는 무엇을 믿고 이런 친일행각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했다는 자신감이다. MB 정권은 여하히 되었건 간에 뉴라이트의 이론이건 선전을 받아들여 정권을 잡았다. 그러니까 이것이 일시적인 신기루 효과이건 아니면 대세이건 간에 자신들의 성공담이 곧 사회 국가 전반의 중추이론이라는 자만감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여건만 본다면 그렇다. 자신들의 이론에 공격은 할 수 있으나 정합성(整合性)을 유지하는 세력이 보이질 않는다. 즉, 회색지대만 있지 세력으로 대두될 정치화된 반대 대응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거침없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학자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은 역사교과서를 비판은 하지만 정작 이 교과서를 받아들이고 옳다고 하는 정치인이 존재한다. 박근혜는 3.26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출판기념회 축사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발언했다.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전율하지 않고는 못 배길 수준의 ‘친일에 대한 극찬’에 해당한다. 누가 그녀로 하여금 이렇게 발언하도록 부추겼을까? 박근혜 계파에까지 뉴라이트가 깊숙하게 자리한 것을 보면 확실히 뉴라이트는 정권에서 성공한 모델이라는 게 인증된 셈이다.
둘째,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믿는다. 한나라당 내부에 깔린 국회의원 중 60~70%가 뉴라이트, 청와대에 뉴라이트 핵심이 포진, 주요 기관에 뉴라이트가 선발, 그리고 사회 각 영역에서 뉴라이트가 세력화되어 장악을 개시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고자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도구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권이 자신들의 편이므로, 언론이 자신들의 주장을 수용해서 기사 방송의 방향을 맞추어주므로, 그들은 이것을 자신들이 옳기 때문에 사회가 그렇게 한다고 확신한다. 반대는 소수일 뿐이라고 자기최면까지 걸기도 한다. 반대하는 측은 ‘좌파’(좌빨용공)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특히 80년대 세칭 주사파의 영역에서 뉴라이트로 변절한 자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가지는 경향이 있다.
최근 뉴라이트를 추종하거나 혹은 그 고용된 인터넷 활동가(속칭 ‘알바’)들에게 내려진 지침은 이렇다고 한다. 첫째, 친일에 대한 비판에 정면 대처하라. 둘째, 친일도 친미와 같이 실용외교이며 우리가 취해야 하는 정책이고 국민들의 자세다. 셋째, 글로벌 시대에 친일이 왜 나쁜가. 이 정도의 확신이 있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친일이 대세다’라는 생각을 굳혔다고 봐야 한다.
네티즌 중 한 사람은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눈 밝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흐린 눈을 가진 사람만 못 볼뿐이다.
"이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친일지배찬양 친일파다. 그러므로 이제 ‘일제지배 찬양파’ 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뉴라이트의 오늘을 보면, 정치 세력화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유형의 묘한 친일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자발적으로 이 세력에 편입되는 것이 (사적으로) 좋다는 판단을 내려서 가입하는 부류다. 일종의 기회주의에 해당하지만 출세주의, 금권주의 등 어떤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일종의 후발 가입자다. 둘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뉴라이트로 분류되어 있는 경우다. 보수우익이건 아니건 자신들을 지지하는 집단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들과 동류라는 인식으로 대접하는 케이스가 바로 그런 예다. 뉴라이트는 그들을 자기 편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뉴라이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셋째, 회색지대에 있는 친일이다. 학문적으로만 봐서 뉴라이트는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혹은 친북세력에 대한 지나친 경도(傾倒)가 싫다고 생각하고, 자신 스스로 그래도 보수성향을 가지고 있는 참에 뉴라이트가 내건 ‘신보수우익’이라는 깃발 하나만을 보고 자신도 그 부류에 속한다고 스스로 믿는 경우다.
이것이 뉴라이트가 집단화, 의식화, 혹은 자체적인 최면을 거는 과정에서 나타난 엉뚱한 파급효과에 해당한다. 물론 이 현상 또한 MB 정권이 탄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제살리기’라는 테제가 사회 국가 내에서 먹혀 드는 형식, 그리고 집권 이후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혹은 공권력을 통한 밀어붙이기의 정도를 보면서 나타나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하고, 유관순을 체제 전복 기도자로 부르며, 종군위안부가 실제 없었던 과장 왜곡이며, 독도도 일본의 땅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가 온전하게 이 땅의 정신세계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다. 나는 불가능한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하는 목적을 찾아보면 반드시 이 일에는 철저한 기획이 동반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기획의 일단을 보았던 입장에서 한국 사회 국가가 어렵고 가치 있게 지켜온 정체성과 정통성을 한 순간에 정권이 바뀌면서 송두리째 잃어가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이들의 믿음은 유지될 수 있을까?
어찌 되었건 MB 정권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라는 점에서 자신들의 민주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촛불민심이 ‘정권전복 운동’이라고 보고 경계한다. 그렇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권의 다수가 아직 뉴라이트가 왜 이렇게 친일의 방향으로 가는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인지를 모른 채, 단순하게 정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만을 미시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미세한 현상을 쫓아가며 그 진체(眞體)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뉴라이트는 물이 오르는 중이다. 친일의 재구성이라는 과제는 확산 일로에 있다. 그들 내부에서도 그렇지만 정권이 존재하는 한 자신들은 이 정권의 중추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받아들여졌기에 자신들은 바로 정권이다 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두고 볼 일이다. 친일이 과연 한국이란 사회 국가에서 정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인지 아닌 지를 봐야 한다. 만일 받아들여진다면 한국은 이미 일본의 속국이자 피지배, 나아가 완전한 식민지가 된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0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백 년’이란 일본의 마수에 걸려든 것이 된다. 그렇게 될 것인가?
8.
Cult Japanophilism
논리와 정책, 그리고 현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형국이다. 그래서 일단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바를 하나씩 다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면 현실인 듯 하지만 논리만 있을 뿐인 주장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비판해 본다.
첫째, 뉴라이트와 친일 간의 상관관계다. 앞서 현실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했지만 부연하자면, 뉴라이트가 학술적으로 정리되던 식민지근대화론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그 이후 정치적 세력화를 겨냥하면서 끌어 들인 논리는 모두 친일, 어쩌면 친일 그 이상의 것일 수 있다. 즉, 매국(賣國)이다. 한 사회 국가는 경제만으로 유지되고 품격(品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래된 시대와 역사가 있는 법이다. 그 점에서 ‘자본주의’ 하나만으로 시대 역사를 모두 농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뉴라이트 접근법이 만일 정책이라면,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책적인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백 번 양보를 하더라도, 친일이란 사대주의적 관념을 넘는 매국행각으로는 절대 시대와 역사를 유지할 수 없다. 뉴라이트가 지금과 같은 스탠스를 지속 유지한다면 이제 친일 수준에서 매국, 나아가 시대와 역사를 파는 매판역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정의 내려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둘째, 이와 관련해서 뉴라이트가 가진 이론은 이제 더 이상 ‘식민지근대화론’이 아니다. 즉, 우리 역사를 훼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과학적 경제사, 사료에 의거한 실증분석이라고 하지만, 나타난 사료마저도 부정하는 상태에서 나올 이론은 의미가 없다.
종군위안부가 자료가 없다? 그렇다면 종군위안부 할머니는 자료보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을 부정하는 발언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뉴라이트는 ‘새로운 우파’가 아니다. 이 명칭을 자기가 붙여 주었다는 동아일보의 어떤 이도 있다고 한다. 2005년경 동아일보 연재 때 서로 협의한 적이 있으니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이 그렇다고 해서 ‘새롭고’(new)’, ‘우익’(rignt)이 될 수가 없다. 진정한 우익은 일단 국가 국민우선주의가 있어야 한다. 만일 한 사회 국가를 다른 사회 국가로 종속(從屬)시키고자 하는 목적 또는 의도, 이론이 과연 우익, 우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가? 그건 보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컬트(cult)가 옳지 않는가? 배경이 무엇인가 물으면 1980년대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배경을 통해 89~92년 재해석을 내린 중진자본주의론, 식민지근대화론을 섞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정치계가 이에 푹 빠진 듯 하다. 새롭다거나 보수우익의 구미에 맞고, 상대적으로 진보나 개혁 세력과는 차별화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된 듯 하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뉴라이트라는 이름은‘cult japanophilism (사이비 친일세력)’ 정도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넷째, 뉴라이트의 근간으로 이야기 되는 자유주의, 국제주의는 친일과 한일 동맹주의(자)에의 추구로 해석된다. 친일(혹은 친미)도 실용외교라고 하고, 글로벌 시대에 친일도 왜 나쁘냐고 주장하는 근거를 못 찾는다면 그것은 국적(國籍) 유지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굳이 국수주의(國粹主義)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격(國格)을 가슴에 담지 못하자는 자가 애국자가 될 수 없고, 그런 자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안병직은 ‘경제발전을 위해 민족주의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시대 역사도 다 버려도 된다는 논리는 해괴망측한 것이다. 그것은 실용이 아니다. 실용의 원 바탕은 이론보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실재 상황에 의거해서 ‘맞는 것’(是)을 구해나가는 것이다. 친일이 올바른 선택인가? 그것을 선택하고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 믿지 않는다.
다섯째, 뉴라이트의 ‘선진화’는 ‘과거를 잊자’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향이다. 과거로 인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올바르게 청산하는 법을 따라 가면 된다. 독도문제가 발생하고 뉴라이트는‘독도에 대해 일본도 주장할 근거가 있다’고 했지만,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주장을 설득할 근거를 가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과연 일본과 과거가 없이 독도문제가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건국’(建國)이란 용어만 사용한다고 1948.8.15 이전은 우리 역사에 없는 것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묘하게도 ‘선진화’라는 개념에는 ‘선진국화’ 보다는 ‘과거는 (무조건) 잊는 미래에의 행보’에 강세가 들어가 있다고 보인다. 이것은 ‘꼼수 용어’에 불과하다. 워낙 ‘선진’(先進)이란 단어가 여기 저기 많이 사용되어서 그렇지만 보다 올바른 표현은 차라리 ‘진보화’(進步化)가 더 나은 것 같다. 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다면 그것은 진보-보수라는 틀에 의식이 갇힌 것이다.
여섯째, 뉴라이트는 냉전반공주의가 아니다. ‘갑’과 ‘을’의 온전한 관계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기획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무조건 ‘갑과 을’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주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기획이 따라야 하고, 그 각론이 우선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뉴라이트 방식의 접근은 자기 노선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좌파’로 몰아붙인 해방 직후 친일노선의 그것과 꼭 닮아 있다.
일곱째, 뉴라이트의 오늘 모습은 짬뽕이다. 보수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우익도 아니다. 전 세계에 이런 모습과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딱 하나다. 일본(日本)이다. 극우보수 정치계가 존재하면서도 폭력조직의 극우화를 활용한다. 온건파가 있지만 정치적 실리를 위해서는 강경도 선택한다. 국수주의도 존재하고 국가주의도 존재한다. 혼재 되어 있는 이 그림판이 한국에 맞을 것이라고 옷을 입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것은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은 일종의 사기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은 결국 한국이 일본이란 옷을 입고 겉은 한국이지만 정신은 일본화하라는 것이다. 독립(獨立)된 정신이 없는 나라에 국격(國格)을 기대할 수 없다.
9.
친일기획자의 수괴 일왕(日王)
친일기획자를 찾아보자.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몇 가지 단서 이외는 드러난 바가 없으니 말이다. 그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며, 국가이고 또한 세력이라고 본다.
일단 최상층부로 올라가면 자민당 강경 우파들의 이름이 줄줄 떠오르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이 일에 깊숙하게 관여되었다고 가장 의심하는 사람은 모리 요시로(森喜郞) 전총리다. 그가 풍부한 우익자금력을 사용하면서 한반도의 중요 인물들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음은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그의 성향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는 자민당 내의 파벌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이 일에 있어 정치계에서는 분명 주장 격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1937년 7월 14일 생. 이시카와 현 출신. 와세다대 졸업. 1959년 자유민주당 학생부 입당. 1975년 총리부 총무부장관 그 이후 관방장관, 문부대신, 건설대신 역임. 2000.4 자민당 총재, 제85대 내각총리대신. 2004년 자민당 신헌법 기초위원회 위원장.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이 그의 이력이다.
그는 2000년 총리 시절 몇 가지 주요 발언을 하게 된다. 일왕과 독도에 대한 것이었다. 일왕에 대해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다."(2000.3.17)라고 했고, 독도에 대해서는 2000년 KBS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일본총리로는 처음으로 직접 표현까지 사용하며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도, 국제법으로도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관된 입장입니다."라고 밝혔다.
그가 주목된 최근의 이유는 2008.1.10 서울 방문 때의 일 때문이었다. 모리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만났다. 그러나 그 이후 묘하게도 정부부처 개편에서 해양수산부가 폐지 되었다. MB-모리 간의 밀약이 있는 것은 아닌가는 의구심이 퍼졌다. 그러나 4월 MB의 방일 일정이 있고, 독도문제도 원만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밀약은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노무현이 역점울 두었던 해양수산부가 ‘한 방’에 공중분해 되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가진 일본정부, 정계를 장악할 수 있을만한 그의 이력도 중시하고 또한 그의 기질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은 매우 계산적이고 강력하다. 그래서 이 자를 ‘친일의 재구성’ 제1의 배후로 지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어느 일 개인의 독주가 아니라 과두(寡頭) 시스템이 매우 강하다고 보면 그의 대표성은 충분히 인정되지만 결국 그 배후까지도 찾아봐야 한다는 점에 이의는 없다.
그의 이력 중 ‘관방장관’에 주목해야 한다. 내각책임제인 일본은 서울과는 시스템이 다른 구석이 많다. 그러니까 2000년 이후만 해도 벌써 네 번째의 총리가 일한다. 모리 요시로-고이즈미 준이치로-아베 신조-후쿠다 야스오다. 총리는 내각 책임자이고, 총리실 산하에는 일본 국가정보체계의 중심기구인 내각정보조사실이 자리한다.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2008.2.15 요미우리 신문에 실렸다. 총리실의 정보수집 및 분석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5명의 분석관을 내조실에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정보분석관을 의미한다. 총리에게 제공하는 ‘정보평가서’의 원안을 작성하는 게 임무이고 임기는 3년이다. 임기가 있다. 이전까지는 경찰청, 방위성, 공안조사청의 국장급이 격주 개최하는 ‘합동정보회의’에서 협의를 거쳐 정보를 내각정보관을 통해 전달했다. 강화된 것이다.
아베신조(安信晉三) 전 총리는 총리시절 일본판 NSC를 추진했다. 정보체계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백지화된 상태다.
지금도 첩보전쟁이 도쿄에서 이어진다. 지난 1월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관방장관은 내조실 전체직원을 대상으로 한 비밀감찰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러일간의 군사정보를 둔 첩보전쟁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 이지스함, MB 체제 등 최고급 군사 방위산업 기술 정보의 취득을 위한 정보기관간의 혈투다.
내조실은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의 정보체계를 보면 내조실이 국가정보기관의 몫을 담당하고 통합막료회의 직속기관인 정보본부가 군사정보기관, 공안조사청의 국내치안유지, 관련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시스템이다. 내조실은 첩보위성 2기까지 직접 운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내각정보조사실은 국가정보기관으로 내각 관방장관 직속이다. 그러니까 보고체계가 내조실-관방장관-총리 이렇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조실이 일왕의 ‘궁내청(宮內廳) 친위대’라는 이야기는 뭘 의미할까. 이것은 여전히 일왕이 국가정보의 맨 꼭대기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일왕은 최고재판소 장관과 사실상 총리를 임명한다. 그런 점에서 모리 요시로의 발언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다’라는 것은 단순하지 않고 현실성이 높은 말이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던 날,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아래의 도표 하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란 나라는 확실히 한국과 다르다. 한국의 시스템과 자꾸 연동해서 임의적 판단을 해서 일본이 보일 턱이 없다.
특히 일왕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상징적인 존재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취임 후 일본을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앞에서 고개 숙인 일은 비난 받아도 마땅한 측면이 있다. 당당했어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단순히 비즈니스 계에서 겸양은 미덕이기 때문에 그리한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이 변명이 될 것인가?
내각정보조사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래야만 ‘친일기획자’를 찾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 이 업무는 당연히 내조실이 적격이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일하기는 가장 좋은 일본의 국가정보체계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대외로 알려진 조직보다는 그렇지 않은 촉수(觸手)가 더 많기로 유명하다. 그건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나 마찬가지다.
1995년 말경, 내조실 산하에 특별분과인 ‘조선반도문제위원회’가 생긴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공안조사청도 정보본부도 모두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특별한 팀들을 다 꾸리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생긴 이 조직(기구)이 하는 일이 바로 ‘다시 백 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침략 프로그램이고 일본이란 국가가 사활을 건 전략구상과 집행을 한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여기의 멤버가 누군가가 아니라 어떤 보고체계를 가졌는가 인데 일본을 들여다보면 이건 확실히 ‘일왕’이 그 맨 꼭대기에 있다. 그러니까 일본 전체가 이 계획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고, 일반 국민들과는 다른 전형적인 과두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창가학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들도 ‘일왕의 신민(臣民)’이라 보니까.
여기는 모든 필요한 인력, 합당한 능력자를 초빙하고 관리하는 일들이 이루어졌다. 앞서 정보분석관을 신설하고 그의 임기를 3년으로 한다는 것은 바로 인재의 선발 및 활용을 의미한다. 과연 그들을 3년만 사용하고 더 이상 활용 않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업무 중 지득(知得)한 기밀이 예사롭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포진한다. 전형적인 국가권력이 바탕이 된 정보체계와 실행 기제(機制)가 갖추어지는 것이다. 1995년 말의 경우엔 이런 시스템이 막 정착되는 단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의 이름을 가장 먼저 거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교수이면서 동아시아연구소를 관장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남북관계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학술적 정치적인 토론 자리에는 빠짐없이 이름을 올린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균형감각을 자랑한다. 물론 일본의 입장까지도 때로 비판적 견해를 가지기도 한다. 그는 조선반도문제위원회 초창기에 역할을 많이 했다. 지금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있는 게이오대를 중심으로 배출된 신지호의 경우, 사실상 그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땄다. 신지호의 전향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단순하지가 않다. 그는 과거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90년대 중반 이야기다.
"서울에 가서 이야길 하면 내 말을40% 이상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유감이다."
대통령 특별자문위원 외국인 2호 타이틀을 6.27 받은 다케나카 헤이죠(竹中平藏)는 이력이 화려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특별히 발탁을 한 데다 그 이후 기용의 효과를 단단히 봤다. 경제재정상-경제재정금융상-총무 우정민영화상을 거쳤다. 성공적 인사였다. 일본이라고 해서 내각 책임제 하에서 게이오대의 일개 교수가 관직에 바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그 일을 해냈다. 그리고 서울에 등장했다. 언제든지 대통령과 전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특별자문위원이다. 민영화, 재정경제 운용의 경험 등으로 본다면 대통령이 늘 한 수 배우게 될 인물이다. 그는 게이오대 시절, 그러니까 고이즈미가 발탁하기 이전 어떤 신분이었는가. 단순히 대학교수였는가, 그 경력으로 일본의 재정경제를 담당하는 자리에 갈 수 있는가. 일본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서울을 들여다 보는 일본의 눈은 세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첫째, 서울의 경제상황이다. 전례로 IMF의 상황을 보았고, 2000년 이후 엔케리 자금을 비롯해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진 상태다. 변동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남북관계다. 일본은 ‘북한’이란 요소에 절대 무심할 수가 없다. 그들의 최대 위협이기도 하다. 평양은 일본 회사의 대표처 하나도 내기 어렵다. 오히려 서울 회사가 평양사무소를 내는 것이 더 쉽다고도 할 정도다. 일본에 대한 원천적인 거부감이 남아있는 평양을 일견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이를(위협) 여하히 분쇄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북핵(北核)에 일본이 호들갑을 떠는 게 결코 아니다. 그만한 두려움이 있다. 셋째, 대미 관계다. 일본은 미국을 벗어나서 동북아에서 생존할 수 없다. 아직은 힘이 미약하다. 그들의 군사력이라고는 하지만 과장되어 있다. 미국이 없는 일본군사력은 자체적으로 중국, 남북한과 경쟁의 상대가 못 된다. 독보적인 수준은 절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다시 백 년’이 가진 지향점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생존과 미래의 국익을 유지할 마지노선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서울을 장악해야 한다는 무거운 목표의식이 있다. 수단과 방법이 문제가 아니다. 일본식으로 보자면, 일단 뽑은 칼인 셈이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인력과 조직, 네트워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중이다. 목하 소리는 없지만 전쟁인 셈이다. 아니, 서울을 보면 이미 친일매국세력과 국민 간의 혈투가 벌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진짜 전쟁은 일본기획자와 누군가 경쟁을 해야 하는 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서울의 대항노선이 온데간데 없으니 국가로조차 보여지지 않는다.
서울이 왜 이런 분위기에 무딘가? 1994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한국의 국가정보체계는 사실상 ‘샐러리맨 화’ 되어버린 경향이 크다. 정권교체의 와중에서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체계의 유지라는 관점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의 사적 용도로 활용되는 경향마저 있었다.
물론 국정원이 대통령 직속기구이며 대통령 한 사람을 보고 사는 조직이지만, (아무리 개편을 하고 국민 곁으로 온다고 해도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그렇다.) 절대가치가 대통령의 추구점이 되면서 견제역량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이 똑똑하지 않으면 일도 그 수준밖에는 안 된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업무는 최하층부 필드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이다. 골라서 확인하며 더 깊이 파헤치는 밝은 눈을 가진 윗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 다녀도 소용이 없다. 사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일본의 이러한 동향에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별로 영양가가 없다고 판단했거나 혹은 건드리기 무척 난해한 주제다. 그러나 한 국가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 방기(放棄)된 것도 사실이다. 요즘 돌아가는 형세를 보면, 친일이 활개짓을 치도록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10.
‘친일 이해의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했던 이유
제1부 자료들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왜 이 자료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도 말이다. 이것은 철저한 ‘오리엔테이션’ 자료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워낙 ‘친일매국세력’이란 눈 앞의 개념에 함몰되어 있고, 그 배후에 있는 ‘친일기획자’에 대한, 그리고 이들 간의 연동성에 대해 무지한 것이 서울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건 앞줄의 혼선을 야기하는 전선(Front)일 뿐이다. 그러니까 ‘사냥개’와 싸우는 것이 된다. ‘사냥꾼’을 잡지 않으면 사냥개와 싸우다가 지쳐 버린다. 오히려 촛불민심으로 태동되었지만 완전히 도매금으로 ‘좌파’라는 마타도어에 당하고 있는 ‘집단지성’ 만이 이 방향을 나름대로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일단 가볍게 현상을 볼 수 있고 전체적인 형식을 재정리해서 자료를 만든 것이 바로 2008.6.30의 보고서다. ‘해방되었는가?; 독립되지 못한 나라에 서다’라는 제목은 이 글의 방향을 이야기 해준다. 부제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치밀한 공략 시나리오와 느낌만 있지 대처형식이 없는 대항노선’이 있다는 것. 둘째, ‘도쿄-워싱턴-서울을 잇는 반민족 전선이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독도 사안에 중립적 위치를 지키겠다는 것이 바로 ‘주권도 없는 바위섬’(Liancourt Rocks, 리앙쿠르巖) 표기다. 우리에게 있어 독도는 일종의 자존심이고 시대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곳이라는 것을 미국은 모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뻔히 안다. 그러면서도 저런다. 왜 그런가? 그 이면에 한미관계의 실익을 겨냥한 미국의 ‘꼼수’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 상황인가? 잘 해결된다고 해도 걱정되는 부분이고, 해결되었다고 된 것도 아니다.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도 MB 정권은 한미동맹 복원과 강화로 갔다. 좋은 방향이긴 하다. 그러나 실속이 없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보다는 일본의 동향이 더 큰 문제였다. 촉수는 일본에서 먼저 뻗어져 오고 있다. 이를테면 관전자와 싸움꾼, 그리고 거드는 인물이 동시에 엉켜 있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피아의 식별과 분간이 잘 안가는 형국이다.
제1부의 전체 목차와 부제를 게시해보자. 그것만으로도 전체를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해방(解放) 되었는가? ; 독립되지 못한 나라에 서다.
MB 정권은 정말이지 태생적인 오류가 있다. 그가 정치적인 친위세력을 고르는 과정에서 뉴라이트를 선택했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 따지고 보면 그가 고른 것도 아니다. 뉴라이트가 MB를 선택했다. 더군다나 한나라당 전체가 여기에 몰입했다. 정권교체라는 대명제가 그들에게 국민 가운데 어떤 세력이건 간에 받아들여도 좋은 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그만한 여건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반(反) 노무현 정서’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노무현 식 접근법이 타당성도 있고, 그의 발언에서 진정성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소명을 다한 듯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정권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 자체를 바꾸려는 세력에게 어정쩡하고 사이비성에 가까운 ‘뉴라이트’, ‘신보수우익’이란 간판에 당했다는 게 좀 어이없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안도 마땅하지 않았다. 국민의 선택권이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정치세력이 대응력이 있고 팽팽했어야 하지만 일방적이었다. 내부적 분열은 곧 시대 정체성을 전혀 읽지 못한 정치세력이 가진 결정적 오류였다. 이것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서 아직도 뉴라이트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대항력조차 구비되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MB를 ‘지저귀는 기계’라고 정의 내렸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건 이 태생의 오류는 그로 하여금 자유로운 관념을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신세를 입었고, 또한 정국이 요동을 치는 가운데 믿을 곳이 없다는 것, 그들이 바로 정권의 친위세력이란 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유감스런 일이다. 상황이 보다 열악한 방향으로 흐르는 데는 한 국가가 철학적인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러한 여건이 탈각(脫殼)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탓도 있다. 누가 해야 하는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강제로 해줄 만한 야당세력도 없거니와 여당 자체 내에서도 벌써 정화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묘한 형세가 나왔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공포는 사실상 과장된 측면이 없지가 않다. 물론 자세히 따져보면 보건 측면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이 사안의 핵심은 바로 ‘주권’(主權)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검역주권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그 물품을 들여와서 먹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 손에 쥐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한 MB 정권이다. 하물며 친일을 위해 무엇을 포기하지 못할까 싶은, 그리고 뉴라이트와 사적 정치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국민도 포기할 것’이라는 예상이 바로 촛불민심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토의의 과정에서 ‘집단지성’으로 발전했다. 다른 것이 아니다. 정보교환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구분법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그것이 집단지성이다. 집단지식이 아니다.
나는 이 시대를 ‘빈민족과 반일’의 혼란기를 거친다고 본다. 거기에는 ‘반미’도 분명히 존재하므로 사실상 ‘반 사대주의’라는 개념도 섞인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이 국제화, 세계화 이런 식의 논제와 뒤엉키는 것이 아니라 올곧게 서는 것, 다시 말해서 국격(國格)과 국민의 격(格)이란 것이 세워지기 위한 강력한 투쟁이라고 본다.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립주의를 선택하자는 것도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본’인데, 거기에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가진 시대와 역사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인하고픈 ‘살아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이것을 무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정책이나 혹은 국가가 지향할 방향, 그리고 국민이 살아갈 태도 등도 ‘기본’이 서지 않고서 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점에서 뉴라이트의 이른바 핵심이론인 ‘경제발전을 위해 민족주의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분단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있으며, 또한 대한민국이란 정부가 수립되고 이를 지켜내야 할 소명 또한 있다. 이것은 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다. 모두 한 바구니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모두 휘저어서 상처를 주려고 하는 것이 오늘 서울의 모습이 되어 버렸다.
가장 나쁜 것은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이 형성한 전선이 오래 전부터 그들이 익히 경험한 방향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는 그냥 온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국치(國恥)를 당한 이후 강점시기, 강압의 시대-순무의 연대기-완전한 병참 기지화 했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욕심이 한계에 달해 폭발하면서 겨우 ‘해방(解放)’이 되었다. 분단이 있으니 ‘독립’이 없다는 것보다 그 이후 한국이 걸어온 길에서 슬그머니 ‘일본’이 들어 왔다. 그들은 미국이란 우산 아래서 한국이란 사회 국가의 정체성에 침투되어 있었던, 기생(寄生)했던 셈이다. 이러한 경험이 단순히 공생(共生)의 의미를 넘어서 실질적인 지배(支配)라는 관점까지 들어온 것이 바로 2000년 이후의 현상이다. 그래서 화들짝 놀란 것이지만 국가와 사회는 이에 대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한계라고 보기에는 이들 친일세력과 일본기획자의 의도는 교묘했다는 것이다. ‘경제살리기’라는 테제에 복속(服屬) 당했다거나 사기(詐欺)였다는 등의 한탄은 지금 시점에서는 ‘당했다’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망’은 IMF 이후 무너졌다. 게다가 김대중-노무현 시기 신자유주의 정책은 국민들에게 끊임없는 생존경쟁을 요구했고, 결국 이 안전망이 이번에 가동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정권이 ‘밀어붙이기’를 강력하게 시도한다는 것이다. 조화(調和)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찍어 누르기’를 기본 스탠스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의 기질을 그들은 ‘눌러야 말을 듣는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앞줄에 세운 ‘사냥개’가 그 역할을 하게 되므로 일본기획자는 그 욕(辱)을 듣지 않고도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시대와 역사가 부끄럽게 되었다는 사실이 제1부의 마지막 제언(提言)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역사를 전혀 무용(無用)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촛불민심과 집단지성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능동적이라기 보다 수동적이다. 대통령제 하에서 임기 5년의 시간만 보내면 다시 새로운 체제가 온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5년 뒤에는 선거로 바꿀 수 있다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일본의 ‘다시 백 년’이란 프로그램을 완성시켜 주는 함정(陷穽)이다.
2010년은어떤 의미인가?
오코노기 마사오는 말했다. 한일관계는 2010년 일왕이 서울을 방문하는가 아닌가에 달렸다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곧 백 년만에 다시 찾은 자기네 시대와 역사라는 걸 뜻한다. 그들의 시대이고 역사이지 한반도의 그것은 아니다. 그 또한 일본은 반동강만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나머지 반을 찾아가야 할 소명도 있다는 관념도 있다.
제1부의 자료에서 ‘평양의 보수적 사태 파악력 든 물건을 모르고 써먹으려 한다’는 그 관점에서 쓴 글이다. 평양이라고 해서 일본의 이러한 포획(捕獲) 기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도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단순하게 남과 북 간의 체제적 싸움, 냉전적 의식, 그리고 겉치레만의 협력구도만을 만드는 사이 서울이 이러한 지경에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보다 더 서울을 향해 능동적으로 본질적으로 시대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접근을 했어야만 했다. 구태의연한 낡은 교본을 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선하게 거시적으로, 또한 미시적으로 각론이 있게 협력구도를 짰어야만 한다. 그것이 외침(外侵)이란 개념에서 민족적 필요성을 높이게 만드는 지름길이었고, 그를 통해 이러한 개념이 들어올 틈이 없이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지가 못했다. 몇 사람의 장단에 놀아난 흔적이 있다는 게 서글프다.
김대중-노무현 시기를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좋은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망실시켜 버렸다. 놓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 내의 남남갈등이 깊어진 이유는 그것이 기획이나 각론, 방향에서 정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거시적인 비전을 가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래서 앞선 두 개의 정권도 절대 잘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고 나는 강하게 비판한다. 잘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봐도 관점은 똑같다. 정부수립 이후 평양에서 있었던 친일세력의 단죄가 아무리 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이미 60년이 흘렀다. 그 사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모르는 맹인(盲人)이었던 평양이 무에 잘했다고 자기네의 논리를 옳다고 주장하며 꺼내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11.
‘개별적 이익’이 겨레를 슬프게 한다.
제2부 이야기도 해보자.
목차의 구성은 내가 하고픈 이야기의 골간(骨幹)에 해당한다. 나는 글을 쓸 때, 대체로 목차를 먼저 잡은 이후에 거의 바꾸지를 않는다. 내가 본 의식의 흐름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일부 특별한 경우에 약간씩 변화되는 것이 있다. 제2부의 경우는 그런 것이 좀 있었다. 서울의 상황이 점차 악화일로에 접어든다는 판단이 들어서 그랬다.
노골적 밀어붙이기 시즌 큰비 벌써 내리기 시작하다.
- 그들식의 자신감, 준비의 치밀성에서 비롯되다.
- 뉴라이트가 아니다. 친일매국 정권의 친위(親衛)다.
1. 뉴라이트 기독교, 종교 헤게모니 통일로 들어서다.
2. ‘한일동맹론’의 밑그림 그리기가 시작되나?
3. 독도문제 외교는 눈에 보이는 ‘쇼’다.
4. 친일, 그들만의 ‘교본’(敎本)은 있는가?
5. 창가학회(공명당), 왜 대종교를 노리는가?
6. BBK 노하우, 정권 초기 원용되다.
7. ‘건국절’의 숨은 야욕 목표는 ‘교육’이다.
8. 막 나가기 김주현과 제성호
9. 촉수(觸手), 무개념 중간지대 형성에 공을 들이다.
10. 뉴라이트 자금원, 일본으로부터 서울 자체로
11. 경제와 교육 손경식과 이장무 스토리
12. 일본기획자, 정체를 밝혀 보자.
13. 서울사냥개, 양성되고 포획되고 확산된 스토리
14. 친일이라 떳떳하게 목소리를 내는 나라가 되다.
15. 청와대, ‘컨트롤 타워’가 없는 이유
16. 변절의 시대, 그들에게 ‘민족’은 없다.
17. 야쿠자 대신 공명당이 나선 이유?
18. ‘다시 백 년’이 슬슬 이야기가 돈다?
19. 미국은 정말 MB정권 이후를 준비하나?
20. 일본이 갈구(渴求)하는 서울 병탄(倂呑) 이후의 모습 개헌정국
21. 국민과 친일매국은 어느 수준에서 대결할 것인가? ; 슬픔과 노여움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날
제1부와 제2부를 합쳐서 모두 70개의 소제목이 부여되었다. 원래는 100개까지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도 없었거니와 지금 제3부를 통해 할 이야기도 있었다. 몇 가지 중첩되는 내용이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각 상황이 복잡한 몇 개의 공집합처럼 얽혀 있었다.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보는 일은 그래서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지난 십여 년을 추적해왔던 일이다.
상황은 앞으로도 자꾸 발생을 한다. 그것은 따로 정리를 해야 할 일이다.
제2부의 핵심은 ‘이유를 밝혀보는’ 것이었다. 약간 더 본질적이다. 제1부가 오리엔테이션 이었다면 이것은 약간 속내를 들여다본 케이스다. 물론 완성본은 아니다.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일개 이름없는 처사가 할 일이 못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내용이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개의 방향이 존재한다. 하나는 서울 내부에서 하나는 일본으로부터 서울로. 이것은 아주 조밀(稠密)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지난 60년의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60주년’이라 부르는 8.15 행사는 내게 충격을 주었다.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부터 들려오던 이야기였다. 설마 했었다. 이건 아예 노골적인 접근이다. 해방, 광복, 정부수립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건국’(建國)은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비친다. 과거 역사를 모두 내팽겨친다. 그러면서 미래로 가자고 요란스럽게 외치기만 한다. 왜 가야 하는가? 미래로 가기 위해서 과거는 필요 없는가? 역사는 버려도 좋을 만큼, 망각 속에 넣어둬도 아무 일이 없게 되는 것인가?
시도는 치밀했다. 건국60년준비위원회가 정부당국과 뉴라이트에서 동시에 뜨는 걸 보면서 이것은 ‘기획’(企劃)이란 판단을 했다. 모사(謀事)를 그리했다. 왜 그랬나?
지난 몇 년간 집중적으로 일본기획자가 타고 들어온 이슈의 핵심은 두 가지다. ‘경제와 교육’이다. 하나는 현실적인 장악을 위한 것이고, 또한 미래에 대한 구속도 동시에 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정신의 포획’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껍데기만 사람이지 알갱이는 다른 걸로 바꾸겠다는 의도다.
일제시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말했던 일본은 정작 일본 내지(內地, 본토)를 일등신민으로 반도(半島, 한반도)를 이등신민보다 못한 지경으로 대접했다. 그것이 식민지였다.
때로 ‘협력’을 부르짖지만 정작 ‘협’(協)이란 서로가 힘을 분산하여 함께 드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cooperation이란 단어는 ‘서로가 함께 공평하고 동등하게 움직이는’것이다. 그래서 여기 함정이 있다. 대개 협력을 주장하는 외국 치고 한반도에서 진정하게 함께 종이를 맞들 수 있었던 파트너가 없다는 것, 일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빤히 노출되는 접근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도 중시하지만 ‘교육’에 대해 몹시 강박관념을 가지고 집중한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안병직과 같은 ‘사냥하는 기계’를 잘 활용한 것도 그 대목에서는 기획이 우수하다고 보여진다. 그 이후는 더 심각하다. 지난 십 년, 민주주의라는 혜택을 입고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서 서울의 20대는 오히려 생존경쟁과 개별적 오락에 대개 빠져 버렸다. 국가니 국익이니 민족이니 하는 단어가 거추장스럽게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 다시 ‘경제발전 제일주의’가 침투한다. 잘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시대와 역사적 투쟁은 서로가 조화되기 무척 어렵다. 그걸 맞추어주는 것이 ‘스승’이지만 그런 ‘시대의 스승’을 이제 서울에서 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사적 이익이 너무 많이 게재되었다.
‘나는 친일이다’ 라고 목소리를 높여도 비난은 있으나 ‘이에 응징하는 테러’가 없는 나라가 된 한국이다. 과연 일제강점기를 잊어도 될 만큼 시간이 흐른 것인가?
한 술 더 뜨는 게 바로 ‘친일이 어때?’하고 고갤 들이미는 행위다. 그보다 더 얄미운 것은 ‘친일도 대세다’, ‘친일도 국제사회에 실용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라고 현란하지도 않은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그야말로 일제강점 찬양파이고 강점해달라고 간청하는 매국노들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이 되었다. 의기(義氣)가 사라진 민족에 사회에 기대할 정신은 무엇인가. 갑갑하다.
일본기획자가 생각하는 ‘서울이 병탄(倂呑)되었다’ 고 생각하는 기준도 자세히 적어보았다.
앞서 ‘일왕의 2010년 서울방문’ 이야기를 적었지만, 기획자는 그러기 위한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모습에는 친일이 아무렇지 않게, 그저 그렇게, 혹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교육환경이 우선이다.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나는 정말 ‘대안교과서’라는 말이 하기 싫다. 이것이 어떻게 ‘대안’인가)를 학교교육에서 보충교재로라도 사용하는 날이며, 아니 에둘러서 이것도 하나의 학문적 접근법이며 우리가 인정해도 좋을 이론이고 행동방안이라고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 학교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한 마디로 몸서리가 쳐진다. 살아 오면서 먹은 걸 다 게워놓아도 좋을 정도로 구역질이 난다.
숱한 80년대 운동권들이 ‘변절’을 했다.
그들은 변명한다. 그 말들이 걸작이다. 친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데 그들은 친북, 좌파 등 북한 이야기를 꺼낸다.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일본의 논리다.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정권이 백색테러를 감행하고, 야쿠자를 동원한 나라다. 그러나 공산당이 명백을 유지한다. 북한에 대한 일본식 콤플렉스나 두려움이 이들 변절자들에게 고스란히 비춰진다.
인권도 나온다.
특히 북한인권을 이야기 한다. 자신들이 젊은 날 걸었던 주사파의 행적에 대한 반성도 한다.
그러나 본질이 다르다. 지금 대항하고 있는 것은 일본 세(勢)의 서울침략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말한다. ‘그게 어떠냐?’로 되묻는다. 이것은 변절이 아니다. 변용(變容) 수준이 아니라 변체(變體)를 했다. 겉은 한국인일지 몰라도 속은 일본인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이 서울이건 서울 바깥이건 간에 꽤 있다. 겉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이었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답시고 미국, 일본을 위해 일했다. 그것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시대와 역사를 물어보면 이렇게 답한다. ‘그건 그거고!’
MB 정권은 무능하다.
친일매국세력에 동화되었다는 느낌, 그리고 저항처리를 하기에는 입지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자괴감, 그래서 아예 더 깊이 동화되어 버리자는 속셈도 보인다. 여기에 종교가 개입된다는 게 우습다. 보수우익 기독교를 표방한 ‘뉴라이트 기독교’가 뉴라이트 운동 초기에 결성된 것은 바로 사적 이익에 밝은 대형교회, 친미숭미 기독교와 권력지향적인 기독교가 합쳐지면서 자신들의 종교만 있다면, 그 세력만 확장하고 안전을 지킨다면 친일이건 친미이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른 종교에 대한 압박도 가한다. 정권 속으로 뛰어든 전형적인 ‘정치적 종교’, ‘정치화된 종교’를 종교의 사회참여라고 강변한다.
사회봉사가 아니라 정치사업이다. 국가권력의 핵심부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들의 이익에 합당하면 그것을 ‘최선’이라고 언제든지 항변할 수 있는 뻔뻔함도 생겼다. 이른바 밀어붙이기는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공권력이 종교편향을 보이는 것도 그들 식으로는 옳다고 보는 대세일 뿐이다.
국민과 친일매국세력이 대결을 벌이는 중이다. 그래서 슬픔도 노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나는 제2부를 끝내고 많이 울었다. 한 사내에게 이토록 시대와 역사, 민족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일본과 친일세력에 분노했다. 내게는 온전한 시대가 필요하다. 역사를 원한다. 그리고 온전한 의미를 가진 민족을 갈구한다. 이들과의 대결은 그저 치고 박는 싸움이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혈투이고, 나 혼자의 죽고 살고 수준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나의 시대 이후에 내 아이들의 시대까지 건 전쟁이다.
12.
잡설(雜說)
제3부를 일차 마무리 한다. 오늘이 7월 29일. 아직 내가 결정을 내릴 시간은 이틀이 남았다. 그 때까지는 다른 부족한 내용의 정리와 이 기록도 이어갈 것이다. 어제 저녁부터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다 보니 여러 군데에 보완하고 보충할 곳도 있을 것이다. 아직 이틀의 시간이 있으니 그런 저런 일들을 하면 될 것 같다.
지난 이틀 간 이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한국이란 나라를 원망(怨望)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싶었다. 지식은 무엇이고, 지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었다.
‘독립’(獨立)은 이제 서울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멀끔한 건축물 하나로 새겨질 정신이 아니다. 그 독립기념관마저도 친일특별법에 반대했던 인물이 관장으로 앉았다. 상식 밖이다. 아니,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차라리 그 사람을 다른 자리에 앉혔어야 한다. 여기는 독립의 순수성만이라도 유지해주는 혜량(惠諒) 정도는 갖추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니 정권이 제대로 된 구석이 없다고 평가 받는다.
‘해방’(解放)은 분단 역사가 이어지는 한 어려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분이라도 얻은 것을 다시 챙겨가려는 음모(陰謀)가 깊숙하게 진행 중이다. 사냥개는 양성될 만큼 양성되어 거리를 활보 중이다. 그들의 눈에서 빛이 나고, 그 반대에 선 사람들이 기가 죽는다. 그들에게 빌붙은 공권력이 춤을 춘다. 그들에게 법(法)이라는 잣대는 자그마한 자(尺)가 아니라 물대포이고 방패이며 곤봉이다. 권력자는 슬그머니 뒷자리로 내려 앉은 채, 이 사태에서 관계 없다는 듯 행동한다. 지식인은 침묵한다. 정치는 온전하지 못하다.
국격(國格)이 아름답게 유지되고 있지 못한 오늘이다. 슬프다.
13.
‘고시치노 기리’ 아래 고개 숙이다.
이명박 대통령(아래 편의상 대통령 명칭을 빼기로 한다.) 이야기를 해보자. 한 국가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의‘사태’(事態) 중심에 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2008.4.21 한일 정상회담 이후 기자 회견장 사건은 서울에서 인터넷에서만 회자되다 묻혀 버렸지만 중요한 단서 하나를 제공한다.
고시치노 기리(五七桐)가 등장했다. 기자회견장의 두 정상의 탁자 앞에 붙은 문장(紋章)이 그것이다.
오동 잎이 아래로 세 갈래, 그 위에 오동 꽃 세 송이가 나란히 솟아있는 형상이고, 세 송이 꽃 중 가운데 꽃잎은 모두 7장, 양 옆의 꽃들은 각각 5장씩 달고 있는 모습이다. 그걸 고시치노 기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사용했던 상징물이고 그 연원을 거슬러 가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이기도 하다. 그것이 등장했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리에 대통령이 자리를 했다. 단순하게 외교통상부의 실수였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은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등장해도 좋다는 ‘누군가’의 허락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일이다. 왜 그랬나?
대선기간 중 이명박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가 구설수에 올랐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일단 그 중에서도 출생지 문제가 가장 컸다. 오래 묵은 호적이 등장하고, 그걸 보면서 분석들이 있었다. 대개 결론은 오사카 출생이 인정되는 견해였다. 일본식 이름인 츠기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도 1941.12.9생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시대였다는 점을 인정해줄 수 있다. ‘한국계 일본인인가, 일본계 한국인인가’ 라는 세간의 비난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받아들인다 해도 굳이 그렇게 탓할 수 있는 과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약간 다른 각도의 조명을 해보았다. 그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부친에 대한 부분이다.
1907년 생. 본명 이덕쇠, 1939.6.6자로 이충우로 개명. 193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활. 해방 당시 38세. 일본에서 약 15년 이상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 이명박도 일본에서 5세까지 생활.
이것이 간단한 이력이다. 1930년경에는 전쟁 전이니 징용이 없었다. 생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가 가진 인식은 반일이었을까, 아니면 일본을 사모하는 것이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아마도 사모 쪽이 가까울 것 같다. 그 점은 형인 이상득에게서도 발견된다. 오히려 이것이 중요하다. 그는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실세 형’이기 때문이다.
2008.6.17 정두언 파동에 휩쓸린 이상득은 일본행을 선택한다. 그가 일본에서 접촉한 인물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등장한다. 일본의 정재계 인사와 일본부품 소재전용공단 포항 유치를 위한 관계자, 교포기업 면담 등의 스케줄도 보인다. 그런데 모리 요시로와의 면담이 있다. 그는 지난 1월에도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왔었다.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었고 확실히 집권 후에는 일본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뛰어 다닌다.
그래서 대선 기간 내내 친일은 화두가 되었지만 ‘경제살리기’라는 테제는 선거판을 휩쓸어 버렸다. 친일청산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앞선 민심이 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선택은 했지만 친일을 마음 놓고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친일이 대세가 된 데는 이명박의 역할이 컸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일단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친일이란 색깔을 물씬 드러낸 뉴라이트를 친위세력으로 했음에도 직접민주주의에서 승리한 세력이 되었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것이다. 나의 의문은 과연 이명박은 일본기획자의 이 의도를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른다? 아니라고 본다.
알고 있다?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다시 백 년’이 가동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나는 이명박을 ‘지저귀는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일본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도 했고, 일본에 대한 선망(羨望)의 정서도 보였다. 관건은 이것이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 그들에게 안방을 내어줘도 그것이 ‘실용이다’라고 주장하게 될까 하는 우려다. 그것이 사실로 입증된다. 고시치노 기리 사건은 중요한 일례이고, 이것은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일본기획자의 치밀한 배려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잘 드러난다. 이명박-박근혜, 어느 쪽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대선에서는 승리가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이명박을 선택한다. 박근혜의 경우, 친일매국세력에 동조하는 척 하면서도 그들에게 뒷통수를 때릴 여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박정희가 바로 그 예다. 박정희는 좌파 성향에서 이른바 민족주의를 가진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좌파는 민족주의라는 테제를 심어 주었고, 그것은 박근혜도 비슷하게 유전 받은 부분이 있다. 이명박은 상대적으로 좌파에서 자유로웠고, 이득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지는 그의 방식의 ‘실용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그의 곁에는 친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정치적 후견인이자 멘토인 이상득이 있다. 게다가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구속 수감되었던 이력이 있다. 적어도 친일은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다.
이상득-모리 요시로 간의 관계가 단순히 한일의원연맹의 연계로만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9월 또는 11월 경제위기설과 연관성이 부여된다. 2008.7.30 이상득은 "위기를 너무 과장되게 이야기하고 있다"며 정권위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위기는 그렇지가 않다.
미국이 이번에 한국을 도울 것인가 아닌가는 독도 사태를 둔 미국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중립적이라고 하지만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 표시가 난다. 말뿐인 한미전략동맹에 비해 미일관계가 더 끈끈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한미동맹 보다 미일동맹을 중시한다.
왜 그런가? 한미동맹에서 얻을 것보다는 미일 동맹이 덩치가 더 커서 그렇다. 그것뿐이 아니다. 미국도 일본의 ‘다시 백 년’이 가동되고 있음을 어느 수준에서는 눈치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일본에 장악된 한국을 중시하는 것이 결코 그들의 이익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미 상당 부분 일본에 점유된 상태이고, 그 방향으로 일본이 이끌고 있는 참에 굳이 서울을 진정을 다해 상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변수는 미국이 일본의 이런 의도를 일정 수준 견제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살리는 것이다. 한국, 일본 양쪽을 필요에 따라 쥐락펴락하는 것인데, 그 경우라 하더라도 결국 이익의 극대화가 어디 있는가 따지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그럼 또 제 일의 원칙인 ‘한미동맹인가, 미일동맹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속에 독도문제도 있다. 미국이 약간 양보하는 척 해주더라도(이를 테면 지명 명기 등에서의 여전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견지하는 방식이나 혹은 겉으로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척 하면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꽃놀이패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어느 특정 시점에서는 판단이 내려지고 그것은 ‘중립’이 되어 일본을 도와주는 형식이 구성될 것임은 예상 가능한 미래예측이다. 그것이 지금의 한미관계다.
이명박의 한미동맹 복원 선택은 그래서 착각이었다. 한일관계에서 독도에 대한 높은 목소리는 실질적인 효과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배후에서 한-미-일 동맹이란 틀 속에서 조차 이것은 게임의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동맹인가 아닌가 보다는 이것이야말로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갖 방식으로 친일의 촉수가 번뜩인다. 중장기전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일본의 부품소재전용공단이 왜 ‘포항. 영일’로 오는 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이상득의 지역구라서? 그는 부인하겠지만 이것은 독도를 겨냥한 접근이다. 그래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2008.7.21 국회본회의장. 민주당 최영희가 독도문제에 대한 정부 대처가 미흡하다고 따지다가 일본인 전용공단 조성지역이 이상득의 지역구 포항으로 결정되지 않았냐며 사실여부를 한승수 총리에게 묻는다. 한승수는 ‘포항쪽이 아닌가 한다’라 답변하고 이에 이상득이 앉은 채 ‘포항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일인데…’하고 고함치는 장면이 발생했다.
이상득은 이 일을 두고 ‘일반공단 유치는 맞지만 일본인 전용공단 유치는 전혀 결정되지 않은 것이며 총리가 실수로 잘못 답변했다. 독도와 연결 시키는 것이 터무니 없어 고함을 쳤다’고 해명했다. 과연 그런가?
한일해저터널 실현을 위한 일본의 초당파 의원 연맹이 발족된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닌가? 자민당의 에토 세이시로 전 방위청 장관,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 간사장,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 전 대표 등 15명이 지난 1월 ‘꿈이 있는 프로젝트’,’ 평화 창조의 상징으로 추진하고 싶다’던 바로 그 프로젝트는 일본인 전용부품소재 공단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가진다. 동해 일본인 벨트의 완성이야말로 일본이 꿈에서도 가지고 싶은 해양과 대륙을 한 몸으로 잇는 새로운 형식을 구성하고자 ‘꿈꾸는’ 방식이다.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친위세력으로 활용한 뉴라이트는 한 몸이 되어 한국 사회 국가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해치려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악성(惡性)이다. 해묵은 지난 60년의 친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행될 일본기획자의 의도대로 이끌려 가는 상황을 걱정한다.
그들을 통해 당선 되었다고는 하지만 왜 이명박은 그들을 ‘토사구팽’(兎死狗烹) 시키지 않는 것일까? 그럴만한 생각은 가지고는 있는가를 반문한다. 올바른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도 중요하다. 당연히 과거를 통한 현재가 있고,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마저 ‘괴담’(怪談)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다느니 하면서 감출 수가 있을까? 대통령이 이 상황을 어찌 보는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14.
1차 마무리를 하며
7월 30일. 일단 여기서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다시 제4부를 써야 될 듯 하다. 못다한 이야기가 많지만 지금 급한 것은 올바르게 정리된 상황의 정리라고 본다면 이 수준으로도 능히 그 목적은 달성한 것으로 본다.
제4부에서는 한반도 이야기를 더해볼까 한다. 이 땅의 분단역사에서 어떻게 일본기획자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지 그 방안까지 생각하고 써보려고 한다. 매우 복잡한 주제이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방안까지 만들어두지 않고 이 비망록을 끝내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작업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 비망록에 앞서 쓴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읽기’ 제1부와 제2부를 이 글의 앞에 붙임으로써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행장(行狀)을 꾸리다>를 마무리한다. 앞서 쓴 글이 ‘오리엔테이션’ 성격이 강하다면 이 비망록은 일종의 친일과 일본기획자, 그리고 서울 정치가 연동된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었던 많은 일들은 지금도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일제 36년 그리고 친일세력의 63년을 합하면 실제로 내후년이면 우리는 100년째를 맞게 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19세기 말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날들은 온전한 독립을 이루었는가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할 일이 많다. 좋은 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밝은 시대를 꿈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친일기획자의 의도를 분쇄하는 것이 더 급하게 보이는 때다. (2008.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