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축 중인 중국대사관 건물은 높이 24층과 10층 건물이 나란히 붙어있고, 총면적은 1만 7199㎡로 한국 주재 대사관 중 가장 넓어 초호화 대사관이란 비난이 일고 있다. 전경림 기자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대만 국기)’의 하강식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는 전 주한 대만(臺北)대표부 량차오린(梁兆林) 참사관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뭉클하다고 한다.
하얀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손에 대만 국기를 들고 서 있고, 한성화교고등학교밴드부가 연주하는 비장한 국가연주에 맞춰 대사관 앞 게양대에 걸려있던 대만 국기가 내려갔다. 그는 “제가 찍은 화면이 대만 TV에 그대로 중계되면서 많은 대만인들이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며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1992년 한국과 대만이 국교를 단절하고 대신 한국과 중국(中共)이 수교하게 되면서 하루아침에 대사관 건물을 빼앗기게 된 대만 대표부의 철수 당시 모습이다. 이 처럼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서울시 중구 명동에 새로 짓는 중국대사관 건물이 ‘호화·사치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신축 건물은 90m높이의 24층과 10층 건물이 나란히 붙어있는 초호화 대형 건물이다.
건물의 총면적은 1만7199㎡로 이는 한국주재 대사관 중 가장 넓은 크기다. 현재까지는 러시아 대사관이 1만2012㎡로 가장 넓었다. 건물은 용적률 136.66%를 적용해 2층까지는 하나의 건물로 올라가다 3층부터 업무동과 직원 숙소동으로 갈라진다. 업무동 1층부터 10층까지는 공공업무시설로 활용된다.
중국 측은 2001년 이곳에 당시 6층 건물을 허물고 대사관 재건축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때 충남 공주·연기로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자 재건축을 차일피일 미뤄왔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행정수도 문제가 백지화되자 신축을 결정하고 2002년 5월 효자동의 4층 건물로 대사관이 이주한 후 신축에 들어갔다.
이러한 초고층 대사관 건축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도심의 상징인 명동에 지나치게 고층인 중국 대사관 건물이 자리하는 상징적인 위화감은 제외하더라도 남산 조망권을 훼손하고 너무나 주변 시설과 다르게 높은 건축물이 올라가는 데 따른 민원도 잇따랐다. 각 언론에서도 신축 건물의 호화성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울시는 중국대사관 건립계획을 승인했다.

서울 중구 명동 중국대사관 신축현장. 대사관측은 안전문제상 높이 3미터 담장을 쌓을 예정이다. 주변 경관을 해칠 우려가 있어 서울시와도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경림 기자
신축 과정에 각종 구설수 잇따라
신축 과정에서도 대사관은 그동안 각종 구설수에 올랐다. 초기에는 공사 수주회사 간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삼성물산에서 공사를 수주해 착수하려 했으나 갑자기 삼부토건으로 최종 건설사가 확정됐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와 관련 증권가에서는 “삼부토건 측에서 중국의 조남기 인민정치 상회 부주석에게 직접 로비를 시도해 신축공사를 삼부토건이 맡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최고위급 관료 자리에 오른 조남기 부주석은 삼부토건의 조남욱 회장과 같은 ‘풍양조씨’라 평소 친분이 있고, 조남욱 회장은 조남기 부주석의 장조카인 조흥연 씨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 조흥연 씨가 삼부토건을 지원했다는 것이 소문의 배경이었다.
신축공사는 16개 건설업체가 공사 수주전에 참여, 경쟁을 벌였지만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참여한 회사들은 단기적으론 큰 이득이 남는 공사는 아니지만 향후 중국시장 진출에 유리한 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낮은 가격에 입찰에 참여했지만 결정이 나지 않았고, 공사 수주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자 결국 중국대사관은 중국에 있는 ‘중국건축고분유한공사(中國建築高分有限公社)’라는 건축회사에 공사를 맡기게 된다.
대사관을 건축하던 중 한동안은 대사관 담벽 건축 방식을 놓고 서울시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시는 당시 중국대사관 신축계획안을 ‘조건부’로 가결시켰는데 서울시가 붙인 조건은 ‘대사관 담을 투시형으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쇠창살 등으로 담 일부를 개방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중공대사관 측 은 보안상 문제를 들며 이를 거부했고, 서울시는 “관광특구인 명동 지역에 높이 3m 이상의 담벽이 설치될 경우 상당한 위압감을 줄 수 있다”며 투시형 담의 당위성을 계속 강조하며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중공대사관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결말이 났다.
신축 중인 중공대사관은 철저안 보안과 베일 속에 건설 중에 있다. 공사 현장 주변은 10미터나 되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입구에는 의무적으로 부착해야 할 ‘공사안내 표지판’도 설치돼 있지 않다. 모든 공사자재도 중국 현지에서 공수해와 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한 이유를 묻자 대사관 관계자는 “국제관례일 뿐”이라고 대답하며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식통은 “해외 중국대사관들은 건축 자재에 도청장비가 숨겨져 들어올 것을 우려해 철저하게 검인된 자재들만 반입해 건물을 짓고 있다”면서 “이런 방식은 세계 각국에서 중국 대사관을 지을 때의 공통적인 방식“이라고 전했다.
소식통은 “현재 워싱턴 DC에 있는 중국대사관도 2만3230㎡의 면적에 지은 사상 최대의 외교 건물로 건물을 지을 당시 못 하나, 철근 하나도 모두 중국에서 공수해와 지을 만큼 보안에 집착했으며, 건물을 지을 당시 이 건물이 중국대사관 건물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명동 터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자리
대사관이 들어설 자리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구한말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집이 있던 곳이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조선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던 청나라는 3500명의 군대를 보내 서울 각지에 주둔시켰다. 명동 대사관 터도 그중 하나다.
청군의 뒤를 따라온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귀양 간 이경하의 집에서 중국 대사 노릇을 했다. 청일전쟁 이후 청군이 축출되자 이 땅의 소유권은 일본 측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먼저 국교를 체결한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이 건물을 지어 대사관으로 사용했다.
1992년 한·중 양국 간 수뇌부에서 수교문제가 비밀리에 협의되고 있었고 협상 과정에서 중공은 당시 대만 대사관 건물을 차지하겠다는 요구를 강력하게 했었다. 이러한 낌새를 챈 대만은 당시 공시지가로 3000억원이 넘는 재산 가치의 이 땅을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주한타이베이대표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대만 쪽에서는 국내 굴지의 한 기업체에 이 땅을 매각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중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기 전날 오후 5시까지도 비밀을 유지해 이 같은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결국 명동 땅은 중국 측으로 넘어가게 됐다.
중국대사관의 호화 신축에 대해서는 중국내에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중국 일간지 환구일보(環球日報) 인터넷 사이트에는 “중국 국민이 내는 돈으로 이렇게 호화로운 대사관 건물을 짓는 것에 반대한다”는 네티즌의 글이 올랐고, 다른 네티즌은 “중국 정부가 또 가난한 인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 “정부가 배가 불렀다” “전형적인 낭비다. 국제 망신”이라며 비난했다.
국내 인터넷에서는 신축반대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서명운동을 주도하는 한 네티즌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초고층 중국대사관을 세운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끝까지 저지 운동을 펼쳐나가겠다는 뜻을 보였다.다른 네티즌들은 “대사관 신축은 대사관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도 지나치게 큰 건물인 것 같다” “국민 정서상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건설업체 관계자도 "외교공관의 경우 현지 문화 및 주변 환경을 고려해 짓는 게 일반적인데, 중국대사관은 24층짜리 초고층 빌딩인데다 중국식 지붕을 덮을 예정이어서 서울의 중심부를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2011.6.25일 위키트리 기사를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