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운동과 동학(東學)

증산도는 무엇인가 2012. 1. 6. 00:41

보천교 운동과 동학(東學)


안후상 /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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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日帝下) 자칭 6백만 민중을 조직했다는 보천교(普天敎). 당시 전 조선의 인구는 1600만명 정도. 과장도 여간 과장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당시 관헌이나 언론 자료에 의하면 족히 일이백만은 되어 보인다. 식민 치하에 쪼들려 살으며 설움받아야 했던 민초들의 절박함을 아우르고 담아낸 거대한 조직 보천교.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동학(東學; 天道敎)과 보천교와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의 일단(一端)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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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운동이란 ?

보천교는 1910년대, 본명이 윤홍(輪洪), 관순(寬淳)이라고도 하는 차경석(車京石, 1880~1936. 지금의 고창군 흥덕면 生) 이라는 인물을 정점으로 한 60방주(方主) 조직(초기 24방주제)을 말한다. 그 조직의 목적이 뚜렷하고, 그 활동 역시 식민지 사회에 적잖은 파급을 몰고왔다는 데서 "보천교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일명 대흥리(大興里)에 본소(本所)를 두고 조직을 확대하니, "국권회복" 과 "천자등극"을 염원하는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주송수련은 동학농민전쟁과 한일합방 등으로 갈가리 찢기워진 민심을 달래고 통합하는 지대한 효과를 낳았다. 이에 깜짝놀란 것은 일제였다. 지난 동학농민전쟁 당시 수천 수만의 농민군이 외우며 하나같이 단결하던 그 시천주(侍天呪)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일관헌과의 마찰은 끊이지 않았다. 

1922년,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구속된 60방주의 한 사람인 이상호를 극력 회유하였다. 조직의 정체를 명확히 하게 되면 관(官)의 보호를 받을 수도, 종교로서 행세할 수도 있다고. 그래서 이름을 "보천교"로 등록, 종교 유사 단체임을 세상에 공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보천교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불리워지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태을교"나 "훔치교" 또는 "선도교(仙道敎)"라 불리웠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교명 등록과 동시에 이전의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운동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천교 조직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일경의 집요하고도 교활한 탄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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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Mandarin by Steve-h - away until Jan 10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보천교운동 탄압의 실체와 물산장려운동

그 탄압의 실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반란죄나 보안법 또는 사상범으로 몰아 구속, 고문하는 등의 물리력 사용이 그것이다. 둘째는 조직과 그 행위를 사교집단(詐敎集團)이나 미신으로 매도하여 근대 교육을 받은 자나 사회 주도층으로부터 질타와 외면을 받도록 하였다는 점. 그리고 반인륜적이고도 비민족적인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낳게 하고 조직을 민중으로부터 괴리시키려 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조직의 내분을 격화시켜 운동의 역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 등이다. 

일제의 이러한 책략에 철저히 이용된 것은 당시 언론들이었다. 

그 탄압의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제주 중문 법정사 항일봉기 :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한일합방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소된 간부 수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십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천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 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 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간부 수십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천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쨓든 조직으로서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다.

일경에 의해 보천교 조직원이 사살된 사건이 전남 고흥에서 발생하였다. 교집회에 일경이 나타나 이를 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교인 한 명이 죽고 나머지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 집단으로 항의를 하는 교인들을 일제는 보안법으로 구속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사회 문제화되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의 집회 해산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미신, 사교 집단의 우매한 종교 행위가 더 큰 문제라고, 논조의 흐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조직을 파괴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 일제는 보천교 조직을 미신?사교 집단으로 매도하여 민심 이반을 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 독립운동자금으로 교금 지원을 한 사례 :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金綴洙)와 당시 동지였던 장덕수, 최팔용 등은 보천교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왔다. 기미독립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익산 금마의 임규(林圭) 역시 보천교의 자금 지원과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상해 임시정부 요인 조만식(趙晩植 ; 개신교 장로 曺晩植과 다른 인물)은 한때 보천교 본소에 거주하면서 교단의 수호사장(외교담당차석)으로 활약하였다. 이때, 교간부였던 한규숙, 정봉규, 정상택 등과 권총 두 자루를 이용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조만식은 1년 6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1931년 신의주도립병원에서 병사하였다.  


- 물산장려운동은 보천교운동의 일환으로, 정읍에서 촉발 :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물산장려운동. 그러나 외산 물품 배격과 자급자족운동은 당시 보천교운동의 일환이었다. 시작의 공간도 정읍 대흥리. 특히 교의 수위 간부 이상호와 이성영(정립이라고도 함. 당시 정읍시 진산리에 거주)의 아우인 당시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이순탁(李順鐸)은 1923년 1월에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勵會) 창립발기인 겸 이사로 활약하였다. 이외, 교간부인 임경호, 고용환, 주익(朱翼), 이득년 등은 이 회의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고용환은 1923년 5월 물산장려회가 소비조합을 설립하였을 때 5인 설립준비위원이 되었다. 보천교 경성진정원과 보광사(普光社)는 물산장려회 기관지인 <산업계(産業界)> 창간호에 축하 광고를 게재하였으며, 특히, 고용환과 임경호가 <산업계> 운영담당자가 되는 등 사실상 보천교에서 이를 운영하였다.

1920년 전후해서 이미 대흥리에는 광목과 면포를 생산할 수 있는 직조 시설이 들어섰다. 염색도 자체적으로 했다. 농기구와 일반 경기계 제작 기술도 들여와 공장을 설립, 가동하였다.상가도 지어 교인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리 옷, 우리 물품 쓰기 운동을 벌여 나갔다. 외산물품 배격은 곧 외세 배격과 같은 것이며 이는 곧 국권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설파하였다.

이외, 민립대학설립도 추진하였다. 당시 민립대학기성회에 보천교 간부 다수가 참여하였다.


-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와 경무국장 아사요시(淺利)의 정읍의 교본소 방문 : 1926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로(齋藤實)와 1928년 경무국장 아사요시(淺利)가 정읍의 교본소를 방문하였다. 이 사건은 대외적으로 여러 가지 추측을 낳게 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조선총독을 대신해 보천교의 차경석이 조선을 대리 통치할 것이라는 억측이었다. 이는 그 동안 들끓었던 "천자등극설"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가설로 발전하였다. 이를 두고 반기는 쪽과 비민족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쪽이 있었다. 아무튼 대리통치든 천자등극이든 당시 조선총독이 차경석을 면담하였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능히 당대 최고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 일로 교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암울한 시대에 유일한 대안이요 의지처로 보천교운동을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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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글: 

한국불교의 중심, 조계사  http://younghwan12.tistory.com/2182

- 조계사 대웅전이 본래 보천교 십일전 본소 건물을 뜯어다가 지은 것이라는 내용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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