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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족첸 수행법에서 <명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종교정신과 道/불교 2016. 12. 19. 20:59



그렇다면 족첸 수행법에서 <명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정견에 한번 입문하자마자, 바로 그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편안히 쉬는 것이다.

뒤좀 린포체는 이렇게 말한다.

 

"명상이란 마음이 지어낸 모든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충분히 긴장을 풀고

 어떠한 미혹이나 집착도 없이 리그파의 상태에 주의를 쏟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이란 억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동화되는 것'이라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족첸 명상 수행의 핵심은 리그파를 강화시켜 확고하게 정위시키며 완전하게 성숙시키는 것이다.

 

투사를 일삼는 것이 습관화된 일상적인 마음은 매우 강력하다.

우리가 부주의하거나 마음이 흩어지면 그 마음은 끊임없이 되돌아와서, 쉽게 우리를 휘어잡는다.

 

뒤좀 린포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 우리의 리그파는 강력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의 전쟁터에서 꼼짝 못하는 어린아이 같다." 

이제 우리는 리그파라는 어린아이를

명상이라는 안전한 환경 속에서 돌보기 시작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명상이 단지 정견에 입문한 후에 리그파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리그파의 흐름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문제를 딜고 켄체 린포체에게 물어보았고, 그는 특유의 단순함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당신이 부동(不動)의 상태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리그파이다."

 

만약 우리가 마음으로 무언가를 꾀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순수하고 원초적인 깨달음에서 부동의 상태로 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리그파이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으로 무언가를 꾀하거나 조작하거나 무언가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리그파가 아니다.

 

리그파는 더 이상 아무 의심도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이다.

 

 

이제 당신은 직접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그 상태에 있다면,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확신과 믿음이 리그파 그 자체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은 리그파를 깨달을 것이다. 

 


족첸 수행의 전통은 지극히 정확한 수행이다.

 

당신의 수행이 깊어질수록, 떠오르는 미혹도 더 복잡미묘해진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절대적인 실재에 대한 앎이다.

 

정견에 입문한 후일지라도 스승은 족첸 명상이 아닌 상태들을 세밀하게 가려주고,

당신이 그것을 혼동하지 않게 한다.

 

 

족첸 명상이 아닌 상태 중의 하나는 비인간적인 마음의 영토로 떠내려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사유도 아무 기억도 없다.

그것은 어둡고 둔감하고 무관심한 상태로, 당신은 일상적인 마음의 나락에 빠지게 된다.

 

두번째 상태는 어느 정도 조용하고 약간 명료하긴 하지만 침체된 상태로,

여전히 일상적인 마음에 묻혀 있는 상태이다.

 

세번째는 생각의 부재로, 놀라서 멍청하게 붕 떠 있는 것이다.

 

네번째, 당신의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져 생각과 투사가 만들어낸 환영을 갈망하는 것이다.

 

네 가지 상태는 모두 진정한 명상 상태가 아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상태에 빠져들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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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첸 수행의 정수>는 이렇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과거의 생각은 이미 지나가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떠오르지 않은 그 짧은 <틈>

   현재 순간의 의식이 있지 않겠는가? 

   신선하고, 숫처녀 같고, 한 터럭만큼의 개념도 찾아볼 수 없고, 빛나고, 있는 그대로의 의식. 
   그렇다, 바로 그것이 리그파이다! 

 

- 하지만 그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른 생각이 갑자기 떠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리그파의 찬란한 빛이다. 

-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그것이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인식할 수 없다면,

   그때 그것은 이전에 그러했듯이 또 하나의 일상적인 생각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혹의 사슬"이자 윤회의 뿌리이다. 

만약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의 참된 본성을 인식할 수 있고,

   그 생각을 좇아가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다면, 
   
어떤 생각이든지 자동적으로 리그파의 광대한 공간 속으로 되돌아가게 되리라. 

 

-----------------------------------------------------------------------------------------------------------------------------

 

분명한 점은 이렇게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네 가지 핵심에 내포된 풍요로움과 위대함을 이해해서 실현하려면,

일생 동안 계속해서 수행을 닦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단지 족첸 수행의 맛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족첸 명상을 통해

결코 끊이지 않고 밤낮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리그파의 흐름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상태이다.

 

왜냐하면 정견에 한번 입문해 알아차린 이후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것은

다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을 닦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족첸 수행은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미혹을 다룰 때 특히 효과적이며 독특하다.

 

족첸 수행은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리그파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리그파에 적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 진정한 본성을 꿰뚫는 리그파의 "빛나는 광휘"이며

바로 그 에너지의 현현(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으로 간주한다. 

 

깊은 고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 발견은 흔히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생각이나 움직임이 파도처럼 계속해서 떠오를 것이다.

그 움직임을 거역하거나 고요함만 끌어안으려 하지 말고, 순수한 현존의 흐름이 지속되게 하자.

 

당신의 명상이 충만하고 평온하게 유지되는 상태가 리그파 그 자체이고,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바로 리그파의 빛나는 광휘이다.

 

이것이 바로 족첸 수행의 핵심이자 토대이다.

 

 

족첸 명상은 햇빛을 타고 태양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당신은 마음에 떠오른 것들을 되돌려 당장에 그 뿌리까지, 리그파라는 근원까지 추적하게 된다.

 

정견이 굳건하게 자리잡으면, 무엇이 떠오르더라도 더 이상 속임수에 넘어가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되고,

미혹에 빠지지도 않게 된다. 


물론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만이 아니라 거친 파도도 있다.

분노나 욕망이나 질투 같은 강렬한 감정이 떠오를 수도 있다.

 

진정한 수행자는 그러한 감정을 장애물로 여기기보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애착이나 혐오 같은 습관적인 성향처럼 마음에 떠오르는 것에 당신이 반발한다는 것은 당신이 미혹에 빠져 있다는 신호임과 동시에, 당신이 리그파를 아직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또 리그파라는 근원을 상실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한 감정에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한층 북돋우는 짓이고 자신의 미혹의 쇠사슬에 더욱 단단히 옭아매는 짓이다.

 

족첸 수행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러한 감정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현현하는 리그파 자체의 에너지를 볼 수 있게 된다.

 

당신이 서서히 족첸 수행을 익혀갈수록 거친 파도가 일어나 으르렁거리다가 바다의 고요함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가장 난폭한 감정일지라도 당신을 사로잡지 못하고 저절로 소멸할 것이다. 

 


수행자는 격렬한 감정이 자신을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하거나 신경 쇠약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며,

리그파를 심화시키고 활성화하고 강화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혁명적인 통찰이며, 그 불가사의함과 권능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광폭한 에너지는 리그파의 깨달은 힘으로 승화되기 위한 가공되지 않은 원료인 것이다.

감정이 강렬하고 이글이글 타오를수록, 리그파는 더욱더 강화된다.

 

족첸의 이처럼 독특한 수행법에는 가장 만성적이고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감정적, 심리적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특별한 힘이 함축되어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이제 나는 되도록 간략하게 이러한 과정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훗날 죽음에 직면할 때, 내가 지금 제시하는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족첸 수행에서는 모든 것의 가장 근본이 되는 타고난 본성을 "근원적 광명" 또는 "어머니 광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의 타고난 본성이다.

 

스승이 우리를 마음의 참된 본성, 즉 리그파에 입문시킬 때,

그것은 마치 마스터 열쇠를 건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족첸 수행에서는 전체적인 앎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는 이 열쇠를

"통로 광명" 또는 "어린아이 광명"이라고 부른다.

 

물론 근원적 광명과 통로 광명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둘로 나눈 것은 오직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 구별한 것일 뿐이다.

 

 

스승의 인도로 일단 통로 광명의 열쇠를 얻게 되면,

우리는 실재의 본래적인 본성에 이르는 문을 열기 위해 그 열쇠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족첸 수행에서는 이렇게 문을 여는 것을 "근원적 광명과 통로 광명의 만남" 또는 "어머니 광명과 어린아이 광명의 만남"이라고 부른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나 감정이 마음속에 떠오르자마자 통로 광명(리그파)은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그것의 타고난 성품인 근원적 광명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지하는 순간 두 개의 광명은 서로 융합되며, 생각과 감정은 그 근본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두 개의 광명을 융합시켜 삶에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수행을 완벽하게 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죽음의 순간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근원적 광명이 엄청난 광휘와 함께 떠오르고 완전한 해탈의 기회가 제공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제는 두 개의 광명을 융합하여

생각과 감정을 해방시키는 것이 가장 깊은 차원의 명상임이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사실 "명상"이란 용어는 족첸 수행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족첸 수행에서는 오직 그리고 영원히 리그파만 존재하는 반면,

명상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서" 명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그파의 순수한 현존을 유지시키는 것과 명상이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아마도 "비(非)명상"일 것이다.

 

스승들은 이 상태에서 "만일 당신이 미혹을 찾는다 할지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금은보화로 이루어진 섬이라면 평범한 조약돌을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정견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리그파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두 개의 광명이 계속해서 자연스럽게 서로 융합하게 될 때, 온갖 미혹은 그 뿌리에서부터 소진될 것이고, 우리의 지각 전체가 한순간의 끊어짐도 없이 리그파 그 자체로 나타날 것이다. 

 


명상 수행을 통해 정견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춘 특별한 환경의 은둔지에서 수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스승들은 강조한다. 번잡한 세속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명상할지라도, 마음으로 제대로 체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 족첸 수행에서는 명상과 일상 생활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 수행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얻지 못한다면 명상의 지혜를 일상 생활의 경험과 통합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심지어 수행하고 있을 때조차도, 정견에 대한 확신과 리그파의 지속적인 흐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명상 수행과 일상 생활을 결합시키면서 언제든지 또 어떤 상황에서든지 리그파의 흐름을 유지할 수 없다면, 불리한 상황에 마주칠 때 치유법으로 활용할 수 없고, 생각과 감정이 만들어내는 미혹에 사로잡혀 망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가식 없이 살았으며 많은 제자가 따랐던 한 족첸 수행자의 애교 넘치는 일화가 있다.

 

자신의 지식과 학문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한 사문이 그 수행자가 읽은 것이 별로 없음을 알고 그를 시샘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평범한 녀석이 어찌 감히 남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감히 스승을 자처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를 만나서 그의 지식을 시험해 봐야지. 그가 야바위꾼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제자들 앞에서

놀려줘야겠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를 떠나 나를 따르게 되겠지." 

어느 날 그는 족첸 수행자를 찾아가 경멸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이 족첸 패거리들아, 하는 짓이 고작 명상밖에 없느냐?" 

수행자의 대답은 그를 완전히 놀라게 했다.

"명상해야 할 것이 도대체 있기나 한가?" 

그 사문은 의기양양하게 고함쳤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명상조차 하지 않는단 말인가?"

 

수행자는 대답했다.

"내가 언제 마음이 흩어진 적이 있단 말인가?"

 

 

 

 

 

티베트의 지혜 69. 명상 - 족첸 수행법의 핵심/정수 네가지


: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

종교정신과 道 2016. 9. 19. 19:38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 


1.서론 


우리들의 삶이 날마다 평안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어려움이 없이 지나가기를 열망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고통의 바람이 불어와서 힘들어 할 때가 많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구약의 시인처럼 “ 하나님이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라는 절규가 나올 때도 있다. 이런 고통들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우리를 공격하고 이 같은 고통을 견디고 이기기 위해 힘든 싸움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에는 내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고통가운데서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이중고를 경험하며 그 때문에 낙심하기도 한다. 고통의 의미와 고통당하는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끝없는 의문이 생기는데 “나에게 주어진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많은 철학자들이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이 주는 의미들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접근과 답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되지 못함도 우린 알고 있다. 



건강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고통이나 죽음의 의미를 탐색하지 않지만 고통의 회오리 속에 휘말릴 때 자신을 돌아보고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고통은 사람들에겐 위기인 동시에 기회인 것이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3:1-2) 전도서의 기자의 말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천하의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보내실 때 단순하게 보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보내신 것을 알 수 있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까지 고통을 겪고 연단의 길을 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주제이다. 삶의 현장에서 겪는 크고 작은 고통을 통해서 고통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고 그 고통이 주는 교훈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혹은 ‘의미치료’는 실행경험에 근거한 실존적 치료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한계성과 잠재력(가능성), 실패와 비전. 우리의 총체적 경험, 만나는 사람들, 극복해야할 좌절들. 깨달아야할 희망들, 완수해야할 책임들을 볼 수 있게 하는 생생한 안목을 갖게 해준다. 인생은 가끔 모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의미를 가졌다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한다. 모든 사람들은 프랭클이 말한 ‘의미에의 의지’에 의해 동기 지어지지만, 어느 땐 억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에는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고, 의미를 추구하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의미치료의 기본원칙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존재하고 그들이 의미를 갈망한다는 것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오직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들이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는 바를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의미치료는 또 다른 차원에서 지시적인 치료방법이기 때문에 다른 치료방법과 구분된다. 그것은 인간의 영적인 힘으로 우리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는 인간내재의 잠재력의 저장소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종교에 그 초점을 맞추어 왔지만 의미치료는 그들의 종교적인 성향이 무엇이든 모든 인간에게 적용 가능함을 보여준다.1) 



Ⅱ. 본론 


1. 프랭클의 생애 


빅터 프랭클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만들었던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 높았던 유태인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인간으로서의 취급을 받지 못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의미요법(Logotherapy)이라는 상담방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수용소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인간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추구할 때 살아남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고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프랭클은 이러한 인간 이해를 근거로 정신요법에 새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프랭클의 새로운 심리요법을 로고테라피 혹은 실존분석이라고 부른다. 인간실존의 기초로서 책임성과 윤리성에 착안하면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는데서 부터 실존분석 또는 실존심리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 


프랭클은 인간이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에 의해 살아가는 것을 발견했다. 


프랭클의 이러한 의미를 향한 추구는 오늘을 사는 인간에게 자신의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게 하고 초월적인 그 무엇을 묵상하게 하는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 


프랭클은 1905년 3월 6일 출생하여 비엔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거기서 1949년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6년 이후에는 신경과 전문의가 되어 비엔나에 있는 폴리그닉 병원의 신경과 과장으로 근무했는데 37세인 1942년 운명적인 계기를 갖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랭클은 장래가 촉망되는 소장(小壯) 정신의학자로서 비엔나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직 유태인이란 사실 때문에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 동안 악명 높은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와 다카우등의 강제 수용소에 억류된다. 누이동생 한 사람을 제외하고 부모와 형, 아내를 대학살의 제물로 빼앗긴 그곳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자신이 일찍이 신뢰하던 모든 것을 엄격히 시험해야하는 모진 시련을 겪게 되었다. 


기아와 추위, 죽음의 위험가운데서 삶의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나치스의 집단 수용소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프랭클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 왜 당산은 기 극도의 고통가운데서도 죽으려고 하지 않는가?” 


허무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몇 사람은 자식을 만나고 싶어서, 자기의 재능을 그대로 파묻을 수 없어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고 죽을 수 없어서 라는 대답을 했다. 그는 허무와 무의미 가운데서도 사람이 근본적으로 지닌 강인한 생의 긍정을 발견했다. 



프랭클은 자기를 진단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그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를 말한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임상 실험의 결과를, 주림과 추위와 허약 속에서도 그 내용을 글로 담아 두었다. 그러나 그 글들이 어느 날 게쉬타포에게 발각되어 단숨에 몰수되어 소각되었다. 이 경험은 프랭클에게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글들을 잃어버리는 비극적인 경험 앞에서 그는 삶이란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옷 속에서 그 옷을 입었던 죽은 포로가 쓴 종이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쪽지에는 유태인의 기도문인 쉐마 이스라엘( Shema Israel)의 “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내용의 기도문이었다. 그는 그 내용을 정통적인 의미와는 달리 해석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고통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나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삶을 긍정하라는 명령같이 느꼈다. 그에게 있어서 그 기도문은 단지 종이 위에 써있는 글씨가 아니라 그의 철학을 탄생시키고 죽음의 수용소라는 처절한 실험실에서 그것을 검증하게 만든 엄청난 소명이었다. 그의 그 이론은 아우슈비츠에 어기 전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그곳에서의 가혹한 경험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는 이 일 때문에 더욱 더 북 바치는 생의 의욕을 느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그의 심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뺏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가치고 파멸하고 배고픔과 추위와 만행을 당하면서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현실 앞에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키면서 그 숱한 고통을 감수했던 것이다. 


인간 실존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프랭클은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사람의 절망과 허무감은 마지막 이전의 것이다. 사람의 깊이 있는 생은 긍정이며 적극적인 창조이다.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서 더 강해진다. 이것을 찾지 못해서 마지막 이전에 실망에 빠지고 만다고 생각한 프랭클은 전쟁이 끝나고 비엔나로 돌아와 폴리클리닉 병원의 신경과 과장이 되었고 1947년 비엔나 의과대학의 신경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거기서 프랭클은 인간 실존을 위해 ‘의미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연구를 시작하게 되고 ‘의미요법’을 주창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론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 및 많은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2. 프랭클의 의미요법 


‘Logos" 란 본래 ’수집‘ ’평가‘ 혹은 철학적으로는 ’이성‘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이 발전하여 우주적인 실재 헬레니즘에서는 우주의 본성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Logos'가 종교적으로 신의 말씀, 진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심지어는 인격적인 의미마저 부여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는 ‘ Logos'를 프랭클은 ’의미‘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3) 


즉 의미요법이라는 말은 의미에 대한 치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프랭클은 1938년에 최초로 ‘실존분석’ 혹은 ‘의미치료’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빈스방거의 ‘현존분석(Daseinan aiysis)와 구별하기 위해 실존분석이란 말보다는 의미요법이란 용어를 강조했다.4) 


의미요법에 의하면 한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투쟁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원초적 동력(primary motivational force) 이 된다. 인간은 단순히 원본능, 자아, 초자아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또 사회나 주위 환경에 단순히 적응하려는 존재도 아니다. 또 사회나 주위환경에 단순히 적응하려는 존재도 아니다.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며 자기를 초월해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의미를 찾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것이 다양한 정신적, 심리적 장애 내지 질환이 되는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돕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업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갖지 않고 그로부터 자꾸 도피하려는 경향을 바로 잡아 삶의 과업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함께 그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줌으로써 한 개인의 문제를 극복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요법은 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장래에 실천되어야할 임무와 의미에 중점을 두게 한다.5) 


프랭클은 의미요법에 대해서 말하기를 세 가지의 질병을 치료하는 정신요법이라고 한다. 첫째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데서 유발되는 영적 신경증(Noognic Neourosis) 이다. 둘째는 전통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적 신경증(Psychogenic Neurosis)이다. 셋째는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육체적 신경증( Somatognic Neourosis)이다. 이것은 의미요법이 특수한 분야의 질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정신요법이 다루는 모든 질병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치료의 체계라는 것이다. 


프랭클은 이 세 가지의 신경증의 원인을 모두 의미와 연결시키고 있다. 곧 정신적 신경증이나 육체적 신경증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성적인 무기력 때문에 정신적으로 억압이 되고, 육체적으로 장애가 왔다면 그것은 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3. 의미요법의 목적 


의미요법은 인간의 무의식속애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이끌어 내어 자신의 삶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하는 요법이다. 의미요법의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심리상태에 관심을 갖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실현되고 충족되기를 기다리는 가능성을 지닌 의미와 가치의 세계를 향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나 가치의 의문을 가질 때 그 사람은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문을 가진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임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6) 따라서 의미요법은 삶에 대한 인간의 노력을 이끌어내려고 하고 또한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의미요법에서는 인간의 삶을 삼중의 방향에서 의미 있게 할 수 있다고 보는데 첫째, 우리가 삶에 무엇을 줄 것인지 하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무엇을 이 세상에서 취하느냐 하는 것인데 즉 우리가 경험하는 가치에 의해서인데 이는 만남과 체험을 통해서 그가 세계로부터 휘하는 것으로서 프랭클은 이 방법의 모델로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는, 변경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하여 취하는 심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피치 못할 운명과 직면하거나 수술마저 불가능한 병에 걸렸을 때 그럴 때에 인간이 가장 높은 가치와 심오한 의미, 즉 고난의 의미를 실현하는 최종적인 기회가 주어지면 그 자신이 이러한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따라서 의미요법은 정신요법에서 말하는 인생에 대한 능력을 회복시키는 목적을 포함하면서 환자가 고난을 받는 의미와 목적을 찾게 하고 증대시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프랭클은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충족감이요 사명감이란 것이다7) 그러므로 의미요법은 당연히 삶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이끌어내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4. 의미요법의 기본개념 



사람들은 누구든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이를 가리켜 인간의 제 일차적인 관심사라고 하였다. 오늘 날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겪고 있는 문제는 대체로 우리가 이 일차적인 관심사를 구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주제는 단순히 사람에게서 그런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간성의 한 면인 것이다. 프랭클이 인간의 ‘고충차원’을 말하는 것은 이 특성을 강조하려는 데서이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 아니라 인생의 실격자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단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 남느냐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 탐구는 이른바 ‘생존가치(survival value)'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특히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와 디챠와 같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겪은 그의 쓰라린 체험에서 이런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모두가 겪고 있는 똑 같은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미래에 성공하고자 하는 일과 만날 사람을 위하여 그 의미를 찾으며 기다리는 강한 성향의 소유자 였다. 


그러나 이런 의미와 목적 또한 생존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일 뿐이며 충부조건은 아니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의미와 목적과 꿈을 품은 채 그것을 펼치거나 드러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프랭클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겪었고 또 현재 진행 중이며 미래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삶의 의미를 고찰하고 ‘의미요법’ 혹은 ‘의미치료’라는 중요한 상담기법을 발견했으나 그와 똑 같은 많은 사람들은 나치의 수용소에서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들이 가진 꿈과 믿음이 현실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죽음의 현장에서 머리를 번쩍 들고 죽음과 용감히 직면하는 많은 사람들의 영웅적이며 순교자적인 죽음의 모습에서 프랭클은 삶의 무조건적인 의미를 깊이 통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무려 600만 명이라는 무고한 생명이 히틀러의 무자비한 학살로 죽어간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랭클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시련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한계상황에서도 그 사실을 엄연히 받아들이고 그와 맞서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랭클의 경우, 그것은 단자 살아야 한다는 생존적 희망을 넘어서 반드시 가족을 다시 만나고 자식을 키우고 책을 발간한다는 일의 수행과 결부되는 의욕이었으며 또한 나치스의 세력에 끝까지 항거하여 끝내 풀려나고 말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위기상황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과정은 단순히 생존을 바라는 희망을 갖는 것만이 유일한 조건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어코 수행하고 말겠다는 일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후일의 회고담에서 강조하고 있다. 프랭클의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처절하고 절망적이라고 해도 사명을 자각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들린다. 




꼭 일년 전 5월 말이었다.3학기 째였는데 무언가 모를 중압감을 느꼈다.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부담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한다.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보다는 나 지신이 박사과정에 걸맞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 자괴감,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육신적으로도 좀 지치기도 해서 서울에 사는 언니에게 놀러와 달라고 했다. 여러 형제 중 가장 절친한 사이인 둘째 언니가 내려왔고 그동안 유보했던 즐거움 찾기를 함께하며 며칠을 지냈다. 


집 가까이에서 숨어있는 절경을 발견하고 언니가 오면 같이 가려고 했던 장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곧바로 차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카 센터에 갔더니 잠시 손보더니 됐다고 해서 이제 되었거니 하고 산중턱인 그곳으로 차를 타고 올라갔다. 언니에게는 잠시 후면 도착할 그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중, 갑자기 차가 힘을 잃고 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도로 내려가려고 해도 후진해야 하기에 할 수없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천천히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차가 쏜살같이 뒤로 밀려가는 것이다. 그 순간의 당황과 황당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거의 5~60도는 되는 경사였고 차가 뒤로 밀려갔기에 뒤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속수무책인 상태였는데 뒤는 쳐다볼 수도 없어 앞쪽을 보니 산에서 내려오던 등산객이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보았다. 


‘이제 끝장이 나는 구나“ 길지 않은 그 시간에 참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고 뒷자리에 탄 언니도 사태를 짐작 했는지 아무런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는 것 같았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나는 ”아! 개인적인 종말이란 이렇게 느닷없이 맞을 수 있겠구나“ 하는 객관적인 느낌을 가지면서 동시에 ”나는 그렇다 해도 언니는 어쩌지? 이건 순전히 내가 실수한건데 다른 사람까지 피해를 보면 안 되는 건데. 언니네 식구들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무엇 엔가에 차가 한번 부딪치고 곧이어 ’쿵‘하며 다시 부딪치며 멈추어 서는 느낌을 받았다. 뒤로 가는 중이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멈추고 보니 차 뒤엔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아래는 계곡이었다. 연출을 한대도 어려울 만한 지점에서 상황은 끝이 났는데 나는 그야말로 털끝 하나 손상된 곳이 없었다. 차가 뒤로 밀리면서 운전석 의자가 뒤쪽으로 제끼어 졌고 그 바람에 운전석의 공간이 커져서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고 상처도 없었다. 뒷자리에 탄 언니는 허리 부분에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넋이 빠진 것 같은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잠시 않아 있는데 앞쪽에서 내려오던 그 등산객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그 바람에 나도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은 멀쩡하게 나오는 나를 보고 자기가 더 놀라는 것이다. 공포가 지나고 나니 수치심이 느껴졌지만 그 사람은 친절하게 자기가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네며 무언가 위로의 말을 했다. 언니는 길섶에 앉아서 진땀을 닦고 있었는데 나는 정말 너무 미안해서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 언니는 이런 와중에서도 살았다는 게 기적이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차에는 접근하기도 싫었지만 보험증권을 찾아야 하기에 간신히 문을 열었다. 잠시 전까지 나의 분신처럼 느껴지던 자동차는 뒤 범퍼가 움푹 쭈그러든 모습으로 흄물스럽게 쳐 박혀 있었다. 등산객의 말을 들으니 뒤로 굴러가던 차는 나무 벤치에 한번 부딪치고 그대로 갔다면 계속 아래로 갔겠지만 나무 벤치에 부딪치면서 오른 쪽 방향으로 꺾여지면서 그 큰나무에 부딪쳤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무벤치가 많이 망가져 있었다. 대형사고가 날 조건이었다. 차는 망가졌지만 사람이 멀쩡하니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감사가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온 몸엔 힘이 없어져서 퍼질러 앉아서 보험회사 직원을 기다렸다. 보험회사 직원이 득달같이 와서 레카를 불렀는데 레카가 오더니 한대로는 안 되겠다며 한대 더 불렀고 우리는 차를 꺼내는 것을 보지 않고 보험회사 직원의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언니와 나는 서로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쉬었다. 그날 밤 우리는 이번 사고의 의미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크리스찬이 아닌 언니의 의미와 나의 의미는 일치하는 것도 있었지만 궁극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직은 갈 때가 아니어서 살았나보다. 이렇게 죽음 가까이 가보니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이란 생각이 들어.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그런데 그 순간 왜 남편보다 아이들 걱정이 더 되었는지...” 라는 언니의 말에 “나는 그 순간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나지 않았어. 이렇게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무섭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평안을 느꼈어.” 그러고 나서 한참을 더 얘기하다보니 그 순간의 느낌에 대한 것은 스러지고 그 다음에 찾아온 감정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고 힘이 쭉 빠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하나님 앞으로 부르실 때 그 마지막 순간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넉넉히 감당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평소의 생각을 점검받는 경험이었다. 


그날의 사고는 그 이후로 계속되는 영적인 도전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그날 죽을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생존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생물학적인 우리의 생명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목도했고 그 자신도 순간순간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금방이라도 처형될 것 같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미를 추구해야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란 생각이 든다. 똑 같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다면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명의 연장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깨달은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간과하고 살다가 위기의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기에 포함된 기회의 부분일 것이다. 궁극적인 면에서 본다면 의미는 인간이 창출해낼 수 없다.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의미의 길을 걸으며 그것을 추구해 나갈 때 언젠가 그 길 끝에서 의미를 주신 분을 섬광(蟾光)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이란 것을 알게 한 자동차 사고 이후 나의 생각은 많이 변화했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만을 위해 살 수가 없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되었고 온 천지에 가득한 의미를 발견하고, 발견한 의미를, 그 의미를 주신 분의 뜻대로 추구해 나가는, 어쩌면 수동적인 태도의 삶을 살게 되었다. 내가 주도하는 삶의 피곤함과 고달픔, 그리고 그 삶의 무게에 짓눌리어 살아가는 인생의 안타까움에 더더욱 공감하게 된 것이다. 


십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 나는 아파트 25층에 살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 제일 꼭대기 층 이었는데 아파트 주변에는 오일장에 섰다. 식구가 많지 않아서 장날에 물건을 살 일은 별로 없었지만 장 구경은 즐겼다.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일들에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시장 구경은 어릴 적부터 나의 취미였다. 그날은 장이 서는 줄도 모르고 집안에 있었는데 마침 열어놓은 창문으로 소음이 들렸다. “참, 오늘이 장날이구나. 나중에라도 한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저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이 싸우는 소리 같아서 내려다보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둘러서 있고 커다란 소리로 말다툼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자리다툼 때문인 것 같았다. 자릿세를 내지 못하는 뜨내기 장사꾼들은 눈치를 보다가 결장하는 곳이라도 있으면 좌판을 벌이는데 자리 주인이 오면 비켜줘야 해서 아무래도 그런 문제에 얽힌 일 같았다. 싸우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모였던 사람들도 떠났지만 나는 현장에서 이십 오층이라는 거리감을 유지한 채 어두워오는 장날 풍경을 내려다보면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었다. 식탁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어느 집의 가장이 분명할 것인 그 사람들, 누구의 잘잘못이 아닌 삶의 무게 때문에 힘겨워하는, 보편적인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마음 졸이며 애태우며 살아가는 가장들의 기본적인 의무인 먹고 사는 일, 먹여 살리는 일의 버거움을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아무의 죄도, 누구의 죄도 아닌 것인데 마치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 되었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심중에 느꼈다. 집안엔 어둠이 가득했지만 세상의 어둠이 더 크게 느껴져 전기 불도 켜지 않고 많은 눈물을 흘린 그날의 그 경험은 그 이후의 나의 삶에 화두처럼 자리 잡았다. 인생이어서 겪는 무게감이야 누군들 느끼는 것이겠지만 하필 그날 그 장면을 통해 내가 느끼고 붙잡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깊이깊이 생각했다. “아!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구나.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신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깊은 공감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보류했던 기도를 했다. ”주님, 저는 주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군요. 제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늘 나의 무의식이 명령하는 것이었는데 나의 의식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백하면 한 자락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자아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내가 차마 입으로 고백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내 눈에는 지금껏 보이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마음의 소원은 있었지만 내적으로만 머물러 있었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세상과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세상에 대한 분별력이 생겼다. 강건하면 팔십을 살 수 있다는 그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참으로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삶이 마음먹은 대로 형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는 나의 삶에서 사는 날 동안 유효한 것임을 믿고 있다. 


삶의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는 강한 성향이 있다고 의미요법은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요법의 동기적 측면에 관한 이론이다. 이를 위하여 프랭클은 의미요법에서 의미를 분리시켜 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환원론(reducitionism)적 입장이다. 


그는 어린 시절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환원론적 입장을 말한다. 13살 때 과학 선생님이 “ 인생은 따지고 보면 연소과정, 즉 산화작용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복 수 있다”는 말을 했을 때 프랭클은 다짜고짜 일어나서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다. 이때 선생님은 질문을 무시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과학 선생님이 환원론자였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프랭클의 해석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의 문제에 부딪치는 때가 많다. 그럴 때 흔히 우리는 옛날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댄다. 그러나 프랭클은 비록 그렇다고 해도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은 항상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형태의 상황을 제시한다. 따라서 그 의미 또한 독자적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전통을 따라 이어져 내려갈 수는 없으며, 오직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가치만이 전통의 붕괴에 따른 영향을 받게 된다. 


흔히 본능은 유전자를 통하여 전달되면 가치는 전통에 의하여 이루어 진다고 하지만 가치는 특이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발전에 의하여 달라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프랭클은 묘미 있는 말을 한다. 개인 각자에 따라 독자적인 의미탐구를 시도하는데 비록 보편적인 가치가 전면적으로 붕괴하는 일이 있어도 개인이 추구하며 발전하는 독자적인 의미탐구는 중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가치는 죽는다. 그러나 의미는 영속한다” 



프랭클이 누누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의미는 독자성이 있으며 항시 변화하지만 그것을 결코 망실되지 않는다. 삶은 결코 의미 없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한다, 창조한다, 엄청난 만남의 경험을 한다와 같은 때에만 큰 의미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의 희생자가 되는 처절한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의 잠재 능력은 이런 때에 발휘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비극을 넘어 승리하며 고난을 이기고 성취의 보람을 얻는다. 


의미의 두 가지 단계 


의미요법에서는 의미를 삶의 ‘궁극적 의미(ultimate meaning)' 와 ’순간적 의미(meaning of the moment)' 두 가지 단계로 나눈다. 전자는 무한을 상징하는 큰 전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 말씀, 의지를 시사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자연과학이 밝히는 질서에 비한다면 질서의 정의가 분명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 즉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걱이 우리에게 피해가 적다라는 실용성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나 우주의 대 질서를 헤아릴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우주의 대질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그 의미를 찾아 나설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의미탐색은 부단히 이어져가는 과정이며, 거기서 우리는 실천의 결정이나 수정을 거쳐 변화해 나간다. 


프랭클은 궁극적인 의미를 믿는데 그의 의미요법은 뒷문을 통하여 종교와 내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의 해답은 종교에 있다고 했지만 종교의 정의를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프랭클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랭클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긴 세월에 걸쳐 직접 체험한 임상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실존은 인식의 정도가 높든 낮든 간에 항상 의미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게 되었다. 



십년 이상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 집사는 세상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다. 수학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입시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실력 있는 선생님이란 평을 받고 있어서 항상 자신이 수강생을 선택하는 입장이었다. 수학 뿐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도 수준급이어서 외국인을 만나서 대화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남편은 일류기업의 중견간부이고 해외출장이 잦은 편이다. 슬하의 남매도 공부를 잘하고 게다가 미모까지 갖추었다. 어려움이라면 시댁과 친정이 은근히 경제적으로 기대고 있는데 그것도 자신의 수입이 많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든 목소리가 높은 편이었으나 탁 트인 성품 때문에 적은 없는 편이었고 목사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분이다. 솔직담백한 성품이 좋아서 나도 이 집사를 좋아했다. 이집사의 남편은 절기교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이집사의 남편이 7월에 서울로 발령이 날 것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1월에 서울에 집을 사서 미리 이사를 했다. 막상 발령이 난 곳은 쿠웨이트여서 4월에 다시 가족이 쿠웨이트로 이사를 했다. 나와는 그 후로도 계속 메일을 주고 받으며 교제를 했다. 수영장이 딸려 있는 좋은 환경의 집을 구해 살고 있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내주고 남편이 그곳에서는 한인교회엘 열심히 출석한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이집사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올 4월 초였는데 일주일 만에 부음을 들었다. 친정어머니, 교민교회의 교인들, 그리고 우리교회에서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끝내 죽고 말았다. 곧이어 부산의 한 병원으로 시신이 운구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았더니 순직이었기에 회사에서 나와서 장례절차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큰 기업체에 소속되어있었기에 수많은 청장년들이 장례식장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 이 집사는 더 큰 외로움을 겪고 있었다. 사람은 많고 많았지만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의 부재 때문에 ‘군중속의 고독’을 체험하는 것처럼 보여서 수많은 인파 속에 있는 이집사가 나의 눈에는 외롭게 떠있는 섬처럼 보였다. 


그 망극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어서 눈물 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잠시의 조문을 마치고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후 이 집사는 쿠웨이트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나왔다. 부산으로 온 이 집사는 창원에 있는 우리교회를 찾아왔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서 땅만 쳐다보고 왔다는데 그동안의 고통 때문인지 겉모습이 많이 상해 있었다. 몇 시간 여유가 있는데 오랜만에 우리 집에 가고 싶다는 이 집사를 데리고 집으로 왔는데 그녀는 말하기를 “ 집사님, 하나님이 안 계신가 봐요. 하나님께 가는 길은 기도하는 것 뿐 이라서 그렇게도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매달렸는데 내 기도는 아무 것도 안 들어 주셨어요. 우리 친정어머니 교회며 기도원에서도 기도하고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게 날밤을 새며 많은 분들이 기도했는데 그렇게도 어처구니없이 가버리다니.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대접하려고 내놓은 것 중 차 한잔을 겨우 마시는 그녀 앞에서 인간의 무능함과 유한함 때문에 나마저도 그녀의 말에 공감을 하고 말았다. “ 그래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공동체 앞에서는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지만 골방에 있을 때는 불신앙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곤 해요. 내게 믿음이 있기는 한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그 질문에 대한 것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그런 불신의 밤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할 때, 두 손바닥 가득히 물을 떠서 얼굴에 가져다 대면 내 얼굴을 감싼 두 손안에서 정확하게 물로 씻어지는 세안(洗眼)의 과정에서 지난밤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씻겨 내려가는 그런 작은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더군요." 나의 이 말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눈가를 닦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지 한달정도 밖에 되지 않은 그녀에게 말은 위로가 되지 않을 터여서 우리 집에 피어 있는 꽃에 대한 것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침 우리 집 베란다엔 그녀가 이사 가면서 준 화분들 몇 개에 꽃이 피어 있었다. 


“쿠웨이트에 가서도 꽃을 많이 키웠는데 온 집을 꽃밭으로 만들어 놓고 왔어요.‘ 하는 그녀의 반응에 자연스럽게 꽃 기르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집사님, 많이 우셨지요? 눈물이 마를 정도로 우셨을 텐데 또 우네. 마침 잘됐어요. 여긴 우리 둘 외엔 아무도 없으니 집사님 울고 싶으면 마음 놓고 우세요.“ 마치 그 말을 기다라가도 했다는 듯 등을 들썩이며 한참을 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도 같이 울었다. 물론 내게도 어느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실컷 울면서 나의 슬픔을 풀었던 것이다. 


마침 여분으로 사놓았던 ‘깨어나십시오’를 한 권 선물로 주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데려다 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 집사님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괴로우셨죠?” “그래요. 내가 명색이 모태신앙이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진 않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남편이 죽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생겼어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아직도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해소되지가 않아요. 교회에도 가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 때문에 가요. 마음 같아서는 교회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러다가 아이들이 신앙을 잃어버릴까봐 염려가 돼서 지금은 그저 몸만 교회로 가는 거죠.” 


그녀의 상처 받은 마음, 치유되지 못한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리고 터미널에 도착하고 버스를 타기 전에 한 마디만 말해 주었다. “집사님, 하나님 앞에서 많이 울고 많이 물어보세요. 지금 집사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녀를 보내고 나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나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고 메일을 한통 보냈다. “집사님, 기회가 되면 상담학공부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우선은 집사님이 무언가를 의지해야하고 또 치유 받아야 하고 집사님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다고 생각하고 아이들 양육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답신이 왔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이런 상처를 입고 보니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게 있어요. 내가 만약 상담공부를 한다면 나와 똑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요. 왜냐면 이번에도 쿠웨이트 한인교회에서 몇 년 전 다 큰 아들을 잃은 집사님의 위로가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그분 말씀이 가슴에 남아요. 기회가 닿는다면 꼭 상담학을 공부해보겠습니다.“ 



이 집사, 그녀가 우리 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할 때 아무런 부족함도 아쉬움도 없는 환경이었기에 많이 경직되었었고 또래가 비슷한 다른 교인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주면서도 그런 것에 대한 인식을 가지진 않은 것 같았는데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발견한 의미의 한 자락을 붙잡은 것 같아 보인다. 고통이 그녀의 눈을 열어서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을 보게 해 준 것이라면 남편의 죽음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은 장차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를 생각했다. 


1) 의미에의 의지 


프랭클의 의미에의 의지는 프로이트의 쾌락의 의지, 아들러의 권력에의 의지와는 대조가 되는 의미치료의 동기 이론이다. 프랭클은 쾌락이나 권력에의 의지는 원래의 의미에서 의지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한다. 쾌락의 의지는 사람이 실제로 쾌락을 얻으려고 해를 쓰면 쓸수록 그것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기패배의 원리이다. 의미에의 의지는 개인이 우선적 추구로서 인생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으며 의미를 창조하고 발견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8) 


삶의 근본적인 힘은 본능적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발견과 의미에 대한 역동적인 의지에서 흘러나오게 된다. 사람이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는 그의 삶에 있어서 본능적인 충동의 ‘이차적인 합리화작용’이 아니고 근본적인 힘이 된다.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는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사실임을 주장하며 인간의 가치를 인간의 자기표현으로 보려는 경향을 경계해야한다고 말한다. 자기실현의 추구는 어떤 방법으로도 일차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살아가면서 삶에 있어서 많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지적하고 있다.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향하기 보다는 완성시켜야할 어떤 것 또는 사랑을 통하여 만나야할 어떤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신의 추구’가 아니라 ‘의미의 추구’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대의명분에다 자기 자신을 둠으로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수록 보다 인간적인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즉 인간을 다른 존재와 만나는 존재이며 실현되어야 할 의미에 도달하고자 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니체(Nietzsche)가 말한 대로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인간은 거의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을 프랭클은 의미를 통해 증명했다. 프랭클은 그의 극단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피할 수 없는 고통, 극단적인 상황들 앞에서 만약 인생에게 목적이 있다면 그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괴로움과 죽음, 인간이 피해가려는 그것들에도 분명히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이라도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만 하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방법은 대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프랭클의 주장이다. 


프랭클의 실존분석에 따르면 무의식 속에는 본능과 충동만이 우글거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양심, 그리고 종교심 등도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9) 


인간의 무의식속에 잠재해 있는 의미들을 이끌어 내어 자신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위하여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이 의미를 찾ㄱ 그것을 위해 결단하는 것은 각 개인의 “의지의 자유”에 달려 있고 그 결단 여하에 따라 삶의 참다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외부로부터 어떤 것이 다가오든지 그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는 각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인간이 인가다워야 한다는 인간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 실존적 공허 


프랭클에 의하면 실존적 공허는 인간이 다음의 두 가지를 상실할 경우에 생기는 결과라고 한다.10) 첫째는 인류역사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기본적인 동물본능의 일부를 상실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본능에 의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데, 인간은 그것을 상실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어떠한 충동이나 본능도 인간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즉 인간은 행동할 바를 능동적으로 결정해야한다. 둘째는 사회가 발전해 감에 따라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전통이나 가치가 상실되는 경우이다. 종교적 조직성과 사회습속이 약화됨에 따라 결저응ㄹ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본능도 인간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고 ,무엇을 하기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본능이나 전통은 인간에게 무엇을 마땅히 해야할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던 것을 하고 싶어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게 되고, 이로써 동조주의와 전체주의가 생겨난다.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보다 남을 흉내 내는 군중의 일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프랭클의 진료소에 찾아오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 가운데 55% 정도의 사람들이 삶의 뜻임을 느끼지 못하는 경험, 곧 실존적 공허를 경험했다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실존적 공허의 현상은 주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분명해진다. 기계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을 계속하며 늘어가는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다. 실존적 공허가 원인이 된 환자의 경우,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어 실존적 공허를 극복함으로써 치료를 도와주어야 한다.11) 


3) 정신적 신경증 



정신적 신경증은 충동과 본능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관한 문제에서 생겨난다. 그러한 여러 문제들 가운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되는 경우이다. 즉 의미요법은 실존적 공허가 다른 원인과 더불어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노이로제를 심인성 노이로제- 즉 좁은 의미의 노이로제-에 맞서서 정신인성 노이로제(noogenic neuroses)라고 한다. 프랭클은 개인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서 생기는 통상적 신경증과 구분하기 위해 ‘정신인성 신경증’이라는 용어를 창안했다. ‘Noos'는 그리스어로 ’마음‘이란 뜻이다. 즉 ’정신인성 신경증‘은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차원에서 영적 핵심에 속한다. 특히 정신인성 신경증은 도덕적 갈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정신인성 노이로제‘는 ’심인성 노이로세‘와는 달리 그 기원이 심리적 어원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어원에 있는 것이다. 12) 


'정신인성 노이로제‘는 여러 가지 본능적 갈등이나 충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치충돌, 윤리적 갈등, 정신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노이로제는 이른바 id, 자아, 초자아라고 하는 심리적 구성요소와 충돌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인성 노이로제는 오히려 다른 가치들 사이의 충돌이나 혹은 최고가치 즉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간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에 대한 욕구불만, 즉 실존적 욕구불만의 결과이다. 그래서 환자가 만일 무의미감에 대한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면 프랭클은 정신인성 노이로제로 간주한다. 


프랭클은 실존적 공허가 곧 정신적 질병으로 표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병이라고 하기 보다는 실존적 고민이라고 본다. 이것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삶의 의미를 찾으므로 해결된다.13) 



4) 인간현상으로서의 자기초월 


인간은 자신의 의미성취에 대한 원래의 관심이 좌절되면 의미가 아닌 다른 것에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인간의 의미를 떠난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이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인간의 의미를 떠난 다른 것에의 지나친 경향이 주의와 관련되면 더욱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쾌락이냐 행복은 인간이 의미와 목표를 성취함으로써 오는 부차적인 효과이지 그것을 위해 인간이 지나친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에서 멀어진다. 행복의 이유가 있는 이상, 인간에게 살아갈 의미가 있는 이상, 인간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프랭클은 주장한다. 


부메랑(Boomerang)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던진 사냥꾼에게 되돌아오듯 인간도 자기의 사명이나 의미를 잃게 되면 자기에게 집착하게 된다. 



4. 의미치료의 기법 



의미요법은 결코 만능의 심리치료기법을 주장하는 입장이 아니다. 삶의 의미탐구를 일차적으로 강조하는 이 요법은 임기응변의 적응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며, 과거의 심리적 외상보다는 미래의 도전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생활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능히 이려내는 정신력을 함양하는데 주력한다. 그 대표적 기법으로서 거론되는 것이 역설의도법과 반성제거법이다 


의미요법은 실존의 해석을 통하여 개인의 쾌적한 정신건강을 도모한다. 그러나 치료자는 해석자가 아니며 그의 역할을 프랭클의 말대로 “단지 내담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눈을 제공하는데 있다” 이는 자신을 너무 높이거나 비하하는 데 대한 경고이며 지속적 발달을 지향하는 자기주체성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자각에 대한 강조이다. 내담자의 자기이해가 바로 그가 수용하는 피드백의 근간이 된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기계와도 같다고 보는 사람은 조작적인 기계에 관심이 쏠리며, 분석적인 면에 치우치는 사람은 욕동과 욕구에 관심이 쏠린다. 말하자면 의미요법은 교육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담자가 스스로 깨우치야 하는 자각의 교육이다. 


거듭 말할 필요도 없이 의미요법에서는 자아발견, 책임완수, 자기초월과 같은 인간성의 자질이 강조되는 만큼 조작적, 환원론적, 비인도적 기법은 일절 통용되지 않는다. 일단 신뢰의 분위기가 형성되면 의미요법과 부합되는 철학과 일치하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수용될 수 있다. 그래서 그림, 상상, 꿈의 해석 등을 통하여 내담자의 억압되어온 의미와 목표 및 무의식의 가치기호 경양을 살피는데 도움을 얻게 된다. 



의미요법의 첫째 목표는 내담자와 그 증상을 구분하는데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정신력과 그 자원을 자각함으로써 공포, 강박관념, 열등감정이나 우울감과 같은 증상으로부터 자기거리를 두면서 능히 이를 이겨내게 한다. 그리하여 생리적, 심리적 또는 사회적 운명의 무기력한 희생자로 자인하는 자기 패배적 태도를 물리치게 한다. 의미묘법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담자의 의미탐구 능력을 중시하며 자신의 결점을 알아서 극복하는 일은 그 다음에 오는 부차적인 일로 인식하게 한다. 



의미요법의 둘째 목표는 태도수정에 있다. 일단 내담자가 증상에서 물러서는 자기 거리를 휘할 줄 알게 되면 그는 개방적인 자기수용 태도를 배우게 된다. 치료자는 자살기도와 같은 위기상황에서만 내담자에게 새로운 내도수정의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이와 같은 절박한 때에도 가치체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어디까지나 내담자의 의견을 존중하여야한다. 



의미요법의 셋째 목표는 철저한 개입이다. 새로운 태도와 함께 이상증상이 해소되는 과정을 통하여 내담자가 능히 그 상황을 이겨내게 한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피드백의 경험을 배우면서 의미를 찾는 새로운 방향성이 열린다. 이것은 의미요법이 절단된 신체를 도로 결합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환자로 하여금 낙담에 빠진 채 삶의 뜻에 대한 무관심이나 좌절에서 오는 반발을 이겨내도록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의미요법의 마지막 목표는 장래의 정신건강을 위한 예방치료가 된다. 모든 증상을 물리치고 난 이 단계에서는 내담자의 삶과 그의 생활 상항에서의 의미를 탐색하는데 역점을 둔다. 가치체계의 위계를 바로잡는 작업을 통하여 장차 겪을 수도 있는 실존의 좌절을 예방한다. 이로써 자신의 삶의 책임을 감수하는 건전한 삶의 실천자가 되게 인도한다. 




1) 역설 의도법 



심리치료에서 역설적 기법을 이용한 역사는 오래된다. 사실상 역설적 기법은 여러 가지 심리치료과정 속에 잠겨져 있어서 그것이 실제로 역설적 심리치료의 발전에 기여한 공헌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랭클은 역설적 심리치료의 기법을 다룬 모든 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두철미하게 이 기법을 실천한 공헌자로 꼽힌다. 



가) 역설과 모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두 개의 낱말 ‘역설’과 ‘모순’을 자주 사용하지만 이 두 낱말은 혼동하기 쉬운 말이다. 전후가 맞지 않아 상식에 어긋난 것 같지만 진실처럼 보이는 진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의견과 반대되는 주장, 정당한 전제에서 오는 타당한 추리이지만 자기 모순적 결론에 이르는 명제를 가리켜 이를 역설(Paradox)라고 부른다. 역설과 모순은 같은 뜻의 낱말이 아니다. 모순의 경우 모(矛)는 창을 의미하며, 순(循)은 방패를 의미한다. 고사에 따르면 초나라 사람이 자기의 창을 자랑하면서 그것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뚫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기의 방패를 자랑하면서 어찌나 견고한지 무엇을 가지고도 그것을 뚫을 수 없다고 뽐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지나가던 사람이 그렇다면 그 창을 가지고 그 방패를 뚫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모순을 이렇게 전후가 어긋남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역설은 진실 같으면서도 동시에 거짓이기도 한 진술이다. 서양고사에 따르면 2000년 전에 크레테의 현자 에피메니데스가 “크레테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진술을 하였는데 이 말이 오늘에 이르게까지 역설, 즉 패러독스의 동의어나 다름없이 되어 있다. 만일 이 진술이 진실이라면 크레테 사람인 에피메네데스도 거짓이 되며 또한 크레테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라고 하면 그의 진술이 진실일 수 있지만 그는 또다시 거짓말쟁이가 된다. 패러독스는 이와 같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패러독스에 관한 몇 가지 낱말을 소개한다. 


논리학자들은 패러독스의 형태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이율배반(antionomy) 인데 이는 모순된 진술이지만 증명 가능한 것이어서 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즐겨 다룬다. 둘째는 의미론적 이율배반((sematic antinomy) 또는 역설적 정의(paradoxical definition)라고 불리는데 우리는 흔히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불일치에서 오는 것으로 이미 언급한 에페메네데스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된다. 흔히 말하는 만고의 역리요 또는 논리의 비약이 담겨진 진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유형이 역설적 기법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시 되는데 그것은 실용적 역설(pragmatic paradox)이다. 모순의 경우와는 달리 실용적 역설에서는 선택이 없다. 그래서 만일 메시지가 명령이라면 거기에 따르기 위해 거역해야한다. 또한 자신이나 타인에 관한 정의라고 하면 바로 그가 아닌 종류의 사람이라고 정의되어진다. 따라서 역설적 치료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므로 변하게 된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이러한 원리와 실용적 역설을 말해주는 고전적 실례가 되는 것이 바로 “자발적 행동을 하라”는 역설적인 명령이다. 이 명령에 따르려고 하지만 곧 할 수 없게 된다. 오로지 자발적 행동을 포기할 때만 비로소 자발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용적 역설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경우가 증상의 처방이다. 즉 역설적으로 말하여 증상을 알려 주므로 내담자로 하여금 더욱 그 증상을 심하게 해 줄 뿐이다. 



나) 의미요법과 역설 의도법 



프랭클은 1929년에 처음으로 역설 의도법을 활용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 활용이 정식으로 알려진 것을 1939년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 이 기법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65년에 발간된 


‘의사와 영혼 : 심리치료에서의 의미치료(The 에서였다. 진실로 역설적 의도법이야말로 의미치료기법의 백미일 뿐 아니라 모든 심리치료기법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찬사가 아닌 것이다. 


프랭클은 처음에 이 기법을 주로 공포증과 강박증 환자에게 시도했다. 그리고 또한 말더듬, 얼굴 붉힘, 식은 땀, 불면증, 무대공포증과 같은 원치 않는 행동형식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응용했다. 프랭클의 정의에 따르면 역설적 의도법은 내담자로 하여금 두려운 일, 무서운 일을 감히 한다거나 그런 일이 잠시나마 닥쳐오기를 바라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상불안에서 오는 공포의 악순환을 분쇄할 수 있다. 역설적 희망이 공포를 제거하면 예상불안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역설적 의도법은 실제로 불안신경증과 공포증 반응이 예상불안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공포를 주는 여러 가지의 조건은 모두가 예상불안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역설적 의도법은 예상불안의 감소나 제거,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신경증적 조건을 없애는 것으로서 그 악순환을 멎게 하자는 데 있다. 프랭클은 비단 증상의 치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 신경증에 대한 환자의 태도를 바꾸는데 있다는 데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 내도의 변화를 가리켜 실존적 재정립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환자가 신경증적 상태를 단절하는데 있어서 유머가 불가결의 요소임을 강조했다. 그는 환자들로 하여금 중상을 표출하면서 스스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니체는 가장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는 동물이라고 했다. 


의미요법의 입장에서 프랭클은 유머를 인간특유의 능력인 자기해리(self_detachmant)의 발현이라고 본다. 이 능력을 자기초월(self_transcendence)과 함께 인간을 결코 인간 이하의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게 하는 오직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인간현상이다. 사람은 바로 자기해리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농담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공포를 일소에 붙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자기초월의 능력 때문에 자신을 잊을 수 있으며 헌신적으로 자기실존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 기계론적, 환원론적 입장에서 정신건강을 다루는 일은 인간의 치료적 자산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프랭클은 단언한다. 아무리 첨단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도 컴퓨터는 웃지 못하고 쥐는 실존의 의미를 모른다. 



역설 의도법은 간결하고도 명쾌한 치료기법이다. 그러나 이 기법은 세심한 진단을 내린 후에 실시해야 한다. 심장질환이 있는 공포증환자를 함부로 거리에 나서게 하여 심장마비에 걸려도 무방하다는 무책임한 일을 할 수는 없다. 살해 의도는 전혀 없으면서 자신을 살해하는 공포심을 가진 강박증환자에게는 자신의 목에다 갈을 들이대 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살우려가 있는 우울증환자에게 무턱대고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의미요법의 치료과정을 통해 환자는 그 상황에 적절한 대처방식을 지어내면서 스스로 자신의 공포증이나 강박증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역설의도법의 적용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을 때 바로 환자가 치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역설 의도법은 너무 간결하게 때문에 병인보다도 증상에 치우치는 흠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치료기간이 길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 지속되는 치유결과를 얻는다는 법도 없다. 


역설의도법이 결코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방법이 아니라는 그의 신조를 거듭 강조한 프랭클은 이 방법이 병인론적 근거를 따질 수 없이 어떠한 신경증적 또는 정신증적 상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심층적인 병인을 가릴 것 없이 증상만을 제거하는데 적용할 수 있으며 단기치료의 방법으로도 적합하지만 경우에 따라 환자로 하여금 그의 실존적 가능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하기 위하여 치료자는 장기적으로 이 방법으로 환자를 다룰 수 있다고 했다. 


2) 반성 제거법 



반성 제거법은 지나치게 걱정하는 나머지 어떤 문제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기법이다. 문제하고 함은 신체적, 심리적 또는 실존적인 현실생활에서 겪는 문제를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신경통, 관절염 같은 증세를 치료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신체질병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일부러 사서 고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쓸데없는 걱정인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혀 걱정에 말려드는데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염려(念慮)과다(過多)를 피할 수 있을 까에 관심을 두게 된다. 멀쩡한 사람이 건강을 너무 염려하는 나머지 병원을 찾아간다. 지나친 걱정을 마침내 자기를 무기력한 존재라고 받아들이게 한다. 건강 염려증 환자를 일부러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의미요법의 반성 제거법은 이런 경우에 효과적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원인에서 오는 문제라면 반드시 의료적 또는 약물적 치료를 받아야 하며 반성 제거법은 어디까지나 보완적인 계책이 되어야 한다. 


3) 자아 발견법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성공하기 위하여 가면을 쓰고 산다. 이러한 가면을 벗겨보면 거기에 비로소 그 사람의 참 모습이 나타난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자아(real-self)와 남에게 비쳐지는 사회적 혹은 이상적 자아(ideal-self)의 양면을 지니고 산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은 내담자로 하여금 자기보호를 위하여 쓰고 있는 탈속에 있는 자아의 참모습을 발견하자는데 있다. 프로이트는 욕동과 본능에 얽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찾아내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 정상경험 



정상경험은(Peak Experience) 소크라테스 대화법에 시동을 걸게 한다. 카운슬러는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과정에서 정상경험을 불러오는 일을 삼가야하나 내담자가 그런 경험을 회고할 적에는 의미가 담긴 메시지를 지적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카운슬러는 내담자가 지나는 김에 하게 되는 그러한 일화를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대개 우리는 의미의 탐구과정에서 그런 기억의 가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게 된다. 정상경험을 대체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기는 일이지만 정신적 항공등을 켜놓는데 있어 효과적이다. 


정상경험은 흔히 고통어린 상황에서 생겨난다. 어떤 사람이 마치 큰 부담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다면서 3년 동안 아내와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의 아내는 오랫동안 암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른 다음 날 그는 항공편으로 여행을 떠나야했다. 비행 중 창밖으로 햇빛이 충만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 홀아비는 갑자기 큰 환희를 느꼈는데 그 황홀한 경험을 가진데 대해서 그는 죄책감을 가졌다. 몇 년 후 다시 우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친구에게 지난번의 그 경험을 얘기하면서 자신이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친구의 대답은 그의 생각과 반대였다. 삶이 그에게 잘못이 아니라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지적인 논쟁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이든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총체적인 전체의 일부라는 것과 또한 고통 속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야말로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이와 간은 정상경험을 겪어본 내담자들은 그것을 회상하면서 예기치 못했던 희망에 넘치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14) 



친정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내가 결혼한 지 10개월이 되었을 때 일이다. 6남매 중 어머니의 편애에 가까운 관심을 받으며 자란 나는 그때까지 엄마가 없는 삶에 대해서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그야말로 하루 만에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이라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에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 있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다음 날 아침, 우리 가족들은 돌아가신 엄마가 전날 아침에 마지막으로 해놓은 밥을 먹었다.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어야 했던 것에 대해서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장지에 도착해서도 그곳이 아버지의 고향이다 보니 친척들이 장례 준비를 해놓았고 장례를 치르고 내려오다 산 중턱에서 쇠고기 국에 밥한 그릇을 먹으면서 나는 어머니께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그날 점심 때 큰 가마솥에서 쇠고기 국 냄새가 퍼질 때 엄청난 시장기를 느꼈고 여느 때 보다 더 맛있게 밥을 먹었던 것을 이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조금 전 하관할 때 그리도 펑펑 울던 우리 자매들은 한결같이 국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서로를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우리 밥 맛있게 먹는 것 보고 좋아 하셨겠다. ” 언니의 그 말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동의했다. 우리 어머니 살아생전에 식구들 먹일 것에 목숨 거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설명하지 못할 우리의 식욕을 어머니의 뜻이라는 의미에 접목을 시키며 우리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을 상상만 하고 있을 때는 어느 지점에선가 생각이 멈추고 말지만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감당할 만한 힘이 주어진다는 것을 어머니의 장지에서의 점심식사를 통해서도 맛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적 내가 자주 꾼 꿈이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내가 통곡하는 장면인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상상 속에서 보다는 그 상황을 훨씬 더 잘 감당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면이 생각나는데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큰 올케의 장례식장에서이다. 11월 초였는데 올케의 장례식장인 서울대 병원 근처, 혜화동 거리의 단풍과 낙엽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올케가 아직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슬픔을 잠시 잊고 이파리를 떨구는 나무들의 아쉬움에 마음이 뺏긴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올케의 기일 즈음이면 언니 보다 더 살갑게 느껴졌던 올케를 회상하면서 그날의 노란 은행잎이 떨어진 거리를 지나던 운구행렬의 비장한 아름다움이 기억난다. 화장장으로 향하는 거리거리마다에서 무수히 떨어지던 낙엽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 때문에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잠시 잊었다. 그날 그 순간, 그처럼 비통한 시점에서 나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느껴져서 아내를 잃은 오빠, 엄마를 떠나보낸 조카들의 애절한 마음을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했던 잠시의 순간을 가졌다. 그리고 화장장으로 진입하는 길 또한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말을 하진 않았지만 차안에 타고 있던 대부분위 사람들, 아마 오빠마저도 바깥의 환경에 잠시나마 마음이 빼앗긴 경험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정상의 경험은 고통 중에서 맛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주는 위로와 희망과 통찰에 대한 것은 현재 상황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정상경험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경험을 통해 앞으로 맞이할 고통의 시간을 잘 견딜 수 있는 심리적인 근거를 지닐 수 있고 정상경험이 누적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내적 자원으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보면 고통스럽고 힘 드는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취미나 기호를 따라 하는 것도 있지만 고난으로 뛰어드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분명 정상경험이 있을 텐데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가지다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똑 같은 행위를 통해 남모르는 희열을 맛보는 것도 정상경험이 아닐까? 


내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있는데 심 수년전, 처음으로 높은 산에 등산을 갔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는데 처음 산의 초입에서부터 힘이 들어서 웬만하면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었는데 말할 용기가 없어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지 30분까지는 죽을 맛이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자 힘은 들지만 그 가운데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앞에 오르는 사람의 등산화 뒤축만 보면서 산 정상에 까지 올라갔고 간신히 내려오면서 다시는 등산을 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등산후유증으로 며칠을 고생했는데 매달 가는 모임이라고 다음 달에 또 등산을 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통 가운데 느꼈던 쾌감이 없었다면 한 번으로 그치고 말았을 일이지만 그 이후 등산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취미가 되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즐겨하지 않는 다른 일에도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을 깨닫는 것도 고통 중에 느낄 수 있었던 정상경험 때문일 것이다. 성인의 반열에 있는 많은 분들이 정상경험의 유지를 결단한 것으로 판단되는 것도 정상경험이 주는 놀라운 통찰력 때문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분들의 행위를 마냥 찬양하지만 그분들에게 있어서는 어쩌면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5. 의미치료와 개인적 경험 


의미요법에 따르면 우리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의 영역은 아름다움이나 진리나 사랑을 경험하는 데 있다고 한다15) 


음악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심포니의 완벽한 연주를 듣고 있을 때 누가 그 사람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의심할 여지없이 뻔할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산의 의미나, 신앙심 깊은 사람에게 잊지 못할 예배에 관한 것, 예술가에 있어서 걸작에 관한 것, 과학자에게 심오한 발견의 순간에 대한 대답은 동일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절정경험이라 한다. 어떤 한 순간이 전체 인생을 소급하여 의미로 넘치게 할 수 있다. 


사랑은 지구상의 60억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택해서 다가오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전한 행위로서의 의미치료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안에서 현재의 당신(thou)를 볼 뿐 아니라 우리 앞에 열려 있는 많은 잠재력을 보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자기(self)는 본능(id)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는 바로 당신(thou)을 선택한다.” “ 반려자 속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을 본다 ....그의 유일성 속에서”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그 혹은 그녀로서의 반려자에게 “yes"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협력하여 개발할 수 있는 미래의 잠재력을 본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과 결혼한 많은 다른 사란들처럼 나도 남편과의 만남에서 절정경험을 했다. 20대의 나는 외형적인 면에서 볼 때는 많은 것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TV아나운서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남들의 눈에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혼처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조건’ 이란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시집을 잘 가는 것’에 목숨을 건 여성들이 많았던 시절이어서 내가 받았던 프로포즈들이 다른 이들에겐 부러웠겠지만 왠지 나는 그런 것에 끌리지 않았다. ‘시집 잘 가는 것’의 진정한 의미라면 당사자의 주관적인 행복감의 기준에 맞아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부모님도 잘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리도 탐나고 아까운 자리를 거절하다니 미쳤다.”는 극언을 들은 적도 있었다. 직업적인 중매쟁이들이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수시로 연락을 했지만 그런 일들은 나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우연의 사건으로 남편을 만났고 그 사람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상태로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람의 조건이 나의 가족에게 반대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불 보듯 했지만 내겐 그것이 걸림돌이 아니었다. 늘 고분고분하지만 본질적인 것에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나의 성정(性情)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부모님이 할 수없이 승낙을 하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너무나 순종 잘하는 딸이었기에 어머니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힘들었겠지만 어머니는 나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격 부드럽고 긍정적이지만 본질적인 것을 침해당하는 것은 참지 못했고 모든 선택의 기준이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 어머니는 결혼문제가 아닌 다른 선택의 문제에서도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가는 나의 행보에 대해 모르실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이목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붙잡은 의미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경험에 지나친 위미를 부여한 나머지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결혼 후 몇 년이 지난 후부터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남편은 처가의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헸다는 부담감이 있었는지 그분들이 염려하는 부분인 경제적인 면에서의 입지를 다져 안심을 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게 되었고 시작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는 남편의 사업이 망하기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곧이어 임신을 하게 되었고 딸을 낳았다. 산후에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고 나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살던 집을 팔아 빚을 갚고 그 와중에 아이를 낳게 되자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았다. 임신 중에도 계속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모든 요인들이 결합된 결과가 산후우울증이었다.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느낌 보다는 양육에 대한 부담감이 더 컸고 실질적인 생활의 면에서 너무 무능하고 무지한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사태였다. 나이 서른에 첫 아이를 낳은 사람의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아이를 잘 키우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나는 딸아이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남편이 퇴근해서 오면 부리나케 아이를 떠맡기곤 했다. 남편은 원래 아이들을 좋아하기에 아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남편의 몫이 되었다. 딸아인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급한 일이 생기면 늘 아빠를 먼저 찾았다. 



절정경험에의 지나친 의미부여가 초래하는 결과는 환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절정경험 뿐 아니라 의미의 문제에서는 전체가 아닌 부분을 붙잡으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인간이 창출하지 못하고 부여하지도 못하는 영역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의미, 자기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아무런 의미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단지 의미를 추구할 수 있고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고 의미 자체이신 분에게 질문할 수 있을 뿐인 존재이다. 


절정경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어렵고 힘든 일들을 넘어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결혼한 지 올해로 27년째인데 생각해보면 고비 고비 겪어야만 했던 숱한 사연들이 있었고 아슬아슬한 위기도 있었지만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의 그 절정경험을 회상하며 넘길 수 있었고 절정경험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어서 약효가 떨어질 만하면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절정경험이 나의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절정경험 안에 있는 신비한 요소는 그것이 내편에서 원한다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 절정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느닷없이 내게 찾아와서 한없는 위로와 무아(無我)의 지경으로 인도한 절정경험은 모든 인간들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되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 비록 누더기 같을 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볼 때,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도 입증이 된다. 삶의 고비 고비에서 기적 같이 찾아오는 절정경험은 마치 징검다리와도 같이 그것을 딛고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래서 절정경험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수많은 절정경험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이해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는 성경말씀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떤 개인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그 사람이 가진 것 중,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지금도 내게 어려운 일이다. 남들이 보면 기득권자로 보일지 모르지만 정서적인 부분에서 나는 늘 마이너리티(minority) 이다. 조직 안에서는 적응하기 어려웠고 그 중 가장 연약해 보이는 이에게 마음이 간다. 인간관계에서는 한결같이 하향평준화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Ⅲ. 의미요법과 영성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든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의미에의 의지’를 가졌고 우리가 의미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느낄 때만이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명백하게 제한된 상황 내에서도 우리 인생의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하나님의 질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보다 더 위대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확신은 여러모로 표현되었다. 즉,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기 위해 분투 노력해야한다는 니체의 발언으로부터 인간의 그의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는 틸리히와 바르트의 주장에 이르기까지이다. 


일상적 관찰에 의하면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존재는 항상 의미에로 향해 있다는 프랭클의 주장을 확신할 수 있다. 그의 논문 속에서 프랭클은 “의미의 선견 지명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의미에 관한 예감은 또한 의미치료에서 ‘의미에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의 근거이다. 


우리가 공기를 숨쉬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의미를 믿는다. 자살하는 사람조차도 의미를 믿는데 만일 삶을 계속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만일 그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면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자살을 할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프랭클의 의견은 엘리자베드- 퀴블러 로즈(Elisabeth-Kubler Rose)의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연구에 의해 증명되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무신론자조차도 그들의 무신론적 견해로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으나 그들의 무신론적 견해로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으나 그들의 무신론적 합리화를 넘어선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신뢰로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이상한 평온과 안정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종교를 인간의 궁극적 의미추구라고 보았다. 따라서 신앙이란 궁극적 의미에 대한 신뢰로 이해했다.16) 의미요법은 그 자체로서 신학이 아니며 인간의 평면적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론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의미요법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양심의 배우에서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철학적인 통찰을 통해 발견한다. 의미요법에서도 종교적 신앙에 대한 은총에 대해 말하지만 결국 인간이란 결단의 자유를 갖고 자신의 내일을 형성해 가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보다는 은총에 덜 유의한다. 


또한 피할 수 없는 절망의 경우에도 태도적 가치를 통한 불안과 삶의 허무성에 대한 해결을 말하고 있지만 그 희망은 매우 막연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의 모든 질병과 죄의 상처가 치료되며 하나님의 도우심 안에서 결단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의미요법은 정신건강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기독교 신앙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환자에게 의미요법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해서 심리요법적인 최종 결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지향하는 목표는 심리학적인 해결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된 목적이 다르다고 해도 부차적인 목적의 성취가 따르게 되는데 즉, 종교가 정신건강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정신건강을 가져올 수 있고 의미요법이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할지라고 환자의 신앙을 찾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랭클의 의미요법이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도날드 트위디(Donald Tweedie)는 ‘의미요법과 기독교 신앙’에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기독교 상담자들은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결국 의미요법의 차원을 넘어서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프랭클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로버트 레슬리Robert Leslie)는 ‘상담자 예수’라는 책에서 “의미요법의 상담방법과 이론은 현대의 어떤 치료방법보다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일치라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한편 꾸중을 해야 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야단을 치셨다. 의미요법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처럼 프랭클의 의미요법에서도 이 명령은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그러므로 의미요법과 기독교 신앙은 공통의 장을 갖고 있으며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쾌락에의 의지 또는 권력에의 의지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넘어서서 의미에의 의지를 주장하는 의미요법은 성경적인 인간이해와 많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의미요법 자체가 이미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향한 개방성은 초월의 결단을 통해 기독교 신앙에 접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의미요법에서는 궁극적인 의미가 영적 차원에 있다고 본다. 물론 영적 차원으로서의 로고스(logos)는 의미요법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성경 요한복음(1:1)은 이렇게 사작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In the beginning was logos, Logos was with God and logos was divine)" 이 ‘말씀’을 프랭클은 ‘의미’라고 풀이한다. 그래서 그의 해석에 따르면 ”태초에 궁극적 의미가 있었다. 의미는 곧 하나님이시다“ 이 해석을 통해 우리는 의미요법에서 실존과 목적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역동적인 해석이다. 프랭클은 인간차원의 의미와 초월적 차원의 궁극적 의미가 만나는 지점을 상정한다. 그것을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지만 우리는 인간실존의 의미의 선을 따라가는 노력을 쉬지 않고 이어나간다. 마치내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모든 의미가 하나로 합쳐지는 지극히 높은 의미에 이르는 바 여기서 우리는 진, 선, 미가 되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프랭클은 비엔나에 돌아와서 이런 글을 썼다. “하나님은 제일차적이자 또한 궁극적인 제 이인칭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참된 속성은 제 삼인칭이 아니라 오로지 제 이인칭으로만 이야기 할 수 있다. 나는 일선의 참호에서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하나님과 이야기 했던 사람이 훗날 강단에 올라서서 마치 지닌 날 참호 속에서 직접 이야기 했던 하나님과 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17) 


하나님은 인간의 차원이 아닌 전 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프랭클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떠한 차원에도 존재하지 않는 만유의 근원이다. 우리가 만일 선사시대의 동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마치 영성을 한간이나 물리적 수준으로 환원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프랭클은 하나님의 응답을 직접 받는다거나 ; 


“하나님은 죽었다” 라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랭클은 이렇게 말한다. 



바닷물에 떠있는 배를 통해서 수심을 측정하기 위하여 음파를 수중에 보내면 되돌아온다. 그 반향을 보고 해저에서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 그 심도는 무한정이다. 너무도 깊어서 조용하기 때문에 놀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침묵이다. 



Ⅳ .결론 


과거의 많은 치료들은 옛날의 교육방식 때문에 책임을 어려움으로 여기고 있다. 의미요법은 ‘책임에 대한 교육이다’ 외적인 영향도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고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지에 관해 할 말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희생자고 전락되었다고 생각한 필요가 없다. 


의미치료는- 환자를 사회에 적응시킴으로서 평온을 유지하는데 목적을 두는 치료들과는 달리- 긴장 없는 생활을 치료의 목표로 보지 않는다. 긴장은 인간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서 삶의 일부분인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의 불건강한 긴장은 우리의 정신적 근육을 강하게 만든다. 가장 건강한 긴장은 현재의 우리와 성장을 지향하는 우리가 지닌 꿈 사이에 있다. 혹은 프랭클이 좋아하는 구절인 ‘존재와 의미사이의 긴장 이다.18) 


인생은 우리에게 쾌락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미를 제공한다. 정신적인 건강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사람에게 온다. 행복은 의미발견의 부산물로서 오는 것이다. 의미요법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완전한 견해를 제시함으로서,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예측하는 것이다. 


의미치료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가? 우리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성취, 우리의 절정경험 등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가 싫어해서 변화하려고 하는 요소,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실패, 우리가 스스로 뛰어넘으려는 우리의 심연(深淵),그리고 봉우리가 존재하고 도달할 수 있음을 안다는 것도 중요시한다. 


의미치료는 그 자체로서 치료적-치료하고 예방하는 것- 이다. 


프랭클은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고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삶의 절망, 고통, 죽음의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됨의 기본적인 의지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를 발견하고 불안과 좌절, 고통과 죽음 앞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율적인 인간, 의미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실존적 인간회복으로서의 의미요법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런 관계들이 올바르게 설정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치유가 일어나고 인간의 삶이 회복되는 것이다. 


참고 도서 

. 의미요법 : 이남표저, 학지사, 2000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HT1s&fldid=DKCL&datanum=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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